분명히 꿈의 장난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일이겠지만,
나는 하룻밤에 세 계절을 경험했고
또 다른 세 사람의 '나'를 만난 것이다.
벽난로의 붉은 불꽃을 보고 있었을 때
세상은 온통 눈보라 속이었다.
자작나무 길은 숲 속으로 아득하게 뻗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한 소년이 도착했다.
소년은 차가운 얼굴을
내 가슴께에 묻고 한참을 울었다.
바둑이가 죽었다고 끝내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그리고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돌아가셨다고 했다.
나는 뜨거운 코코아를 소년에게 대접했다.
소년은 벽난로 앞에서 잠들었다.
불꽃의 춤이 소년의 흰 뺨 위로 물들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어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64쪽
그때 두 번째 손님이 도착했다.
청년은 검은 박쥐우산을 쓰고
자작나무 길을 따라 왔다.
비가 너무 오는군, 그는 내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내 안으로 들어와 내가 되었다.
나는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조금 전의 그 소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내 생의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조용히 나무 탁자 위에 쓰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받은 종양 제거 수술,
병실의 외로움, 반목했던 사람들,
이제는 멀어진 한 사람에 대한 기억들,
사랑과 미움, 직장들과 인터넷,
길의 무한선율, 물의 얼굴을 한 스승과의 만남,
야콥슨의 전환사, 거울 속의 라캉, 시의 편린들,
아스피린 혹은 광기, 선풍기 소리.'
모든 것이 꿈만 같이 여겨졌다.-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