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지대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품절


네 아버지는 사람을 많이 죽여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어. 술 취한 남자 중 하나가 말했다.
나는 말했다. 그땐 전쟁중이었잖아요. 아버지는 스물다섯 명을 무찔러 훈장을 받으셨어요. 여러 개의 훈장을 집으로 가져오셨어요.
네 아버지는 순무밭에서 여자를 겁탈했어. 남자가 말했다. 다른 군인 네 명과 함께. 네 아버지가 그 여자 가랑이 사이에 무를 박았지.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 여자는 피를 흘리고 있었어. 러시아 여자였어. 그뒤로 몇 주 동안 우리는 무기란 무기는 죄다 무라고 불렀지. -10쪽

전쟁터에서는 고향 사람들하고 잘 지내기가 쉽지 않은 법이죠. -11쪽

러시아에 있을 때 그들이 내 머리를 박박 밀었어. 그건 가장 가벼운 형벌이었지, 어머니가 말했다. 나는 너무 배가 고파 비틀거렸어. 깜깜한 밤에 순무밭으로 기어들어갔지. 감시인은 총을 가지고 있었어. 날 보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쏴죽였을걸. 밭은 적막에 싸여 있었어. 늦가을이었고, 서리를 맞아 거무죽죽해진 무 이파리들이 들러붙어 있었지.-14쪽

네 아버지랑 나는 버찌를 따러 갔단다. 우리는 버찌를 따면서 다퉜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 아무도 없는 넓은 포도밭에서 버찌를 따면서도 네 아버지는 날 건드리지 않았어. 내 옆에 말뚝처럼 서서는 미끈거리는 버찌씨만 끊임없이 뱉어댔지. 네 아버지가 나한테 툭하면 주먹을 휘두를 거라는 걸 그때 이미 알았어. 집에 돌아오니까, 마을 아낙네들이 벌써 광주리 가득가득 케이크를 구워놓았고 남정네들은 살찐 송아지를 잡아놓았더구나. 송아지 발굽이 거름 더미에 놓여 있었어. 대문을 지나 마당에 들어서는데 그 발굽이 보이더구나. 나는 아무도 모르게 다락방으로 가서 울었어. 내가 행복한 신부가 아니라는 걸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어. 그때 결혼을 하기 싫다고 말하고 싶었지. 하지만 이미 송아지를 잡은 뒤였고, 만일 그런 말을 했더라면 네 할아버지가 날 살려두시지 않았을 거야.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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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ng 2010-11-21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런 곳이 있었군요..^^

아, 제 이름 쓰지 않으면 모르실려나?

whistle 2011-04-13 22:01   좋아요 0 | URL
알고 있어요. 여기서 만나니 반갑네요: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