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기록
마르티나 도이힐러 지음, 김우영 옮김 / 서울셀렉션 / 2020년 2월
평점 :
절판


모처럼 귀한 책을 만났다. 한국 근대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은 종종 보았지만 이 책은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서양인의 눈으로 60~70년대 한국의 모습을 기록한 것도 의미가 있지만, 도시와 시골 풍경 외에 양반 가옥의 모습, 안택고사와 동제(洞祭), 상례(喪禮) 같은 마을의 풍습을 단순한 방문객의 시선이 아닌 한 집안의 식구이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바라본 시선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저자 자신은 이렇다 할 촬영 기술도 모르면서 아무 생각없이 셔터를 눌러댔다고 겸손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그녀가 가끔씩 강의에 활용할 수 있겠다던 사진들은 50년이 지난 지금 그 자체로 귀한 자료가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1935년 스위스 태생으로 현재 런던대 명예교수로 있는 마르티나 도이힐러 Martina Deuchler 교수다. 그녀는 네델란드에서 동아시아학을 전공하고 하버드대 동아시아 언어문명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다. 하버드 박사과정 중에 논문에 필요한 자료를 찾던 그녀는 자기보다 앞서 그 책을 대출한 남성을 알게 되는데, 그 인연으로 둘은 결혼하게 된다.

 

 

 

그녀의 남편인 조직량(영문 이름은 Ching Young Choe)’이라는 인물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국내에 알려진 자료는 거의 없고 1957년 경향신문의 한 칼럼에 하버드대 박사과정 중인 그의 이름이 짧게 언급된 것이 보인다. 당시 논문 작성 중이라던 그는 1960년에 대원군 시대에 대한 논문으로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독일에서 한국사를 강의하다가 1966년 취리히에서 별세했다.

 

저자는 남편과의 짧은 결혼 생활을 마치고 1967년에 하버드-옌칭연구소의 장학생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서울대 규장각에서의 추가 연구와 시댁 방문을 겸해 이뤄진 두 차례의 한국 생활을 통해 그녀는 당시 한국의 생활상을 3천 장이 넘는 사진 기록으로 남긴다. 60~70년대의 한국을 보여주는 그녀의 사진은 잠시 스쳐가는 관광객의 시선과는 사뭇 다르다. 때로는 경북 영천 어느 가족의 일원으로서, 때로는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때로는 신비한 동양 문화에 매료된 외국인으로서 다양하면서도 깊이 있는 사진적 시각을 보여준다.

 

책에 실린 사진들을 보면 그 몇 년 사이에 한국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높은 빌딩들이 지어지는 사이로 사람들은 여전히 소달구지를 끌고 다녔고, 파헤쳐진 도로에는 (1974년 가을에 개통된) 지하철 1호선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는데 그게 불과 몇십 년 전의 일이다. 1968년 당시에도 이미 드문 광경이 되었다는 상여 행렬, 초가집들로 둘러싸인 황룡사지, 천마총 출토 당시 모습, 황토빛 흙만 보이던 발굴 전 모습에서 발굴 후 지금 우리가 아는 모습으로 확연히 달라진 천마총의 변화도 눈에 띈다. 불국사나 안압지(월지)가 우리 눈에 익은 현재의 모습으로 탈바꿈하기 이전 옛날 모습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저자는 마을 안팎의 모습과 여성들의 문화에 대해서도 세세히 사진으로 남겼다. 사진은 저자 자신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계모임이나 안택 고사, 길쌈과 방아 등 여성들의 활동에 같이 참여하고 관찰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더 친근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이른바 외간 남자들은 출입할 수 없었던 안채 역시 그녀의 카메라 앞에서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런가 하면 가면극이나 서원의 제례, 동제, 만신의 굿에 대해서도 역사학자로서 자세히 관찰하고 기록하였다. 안택 고사나 굿의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신묘한 경험에 대한 글에서도 섬세한 관찰력이 돋보인다.

 

1894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조선을 방문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내 머리카락을 뽑아가고...(중략)... 내가 그들과 정말 똑같은 살갗을 가지고 있는지, 똑같이 피가 흐르는지를 알려고 했다며 당시 외국인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호기심에 대해 기록한 바 있다. 80여 년이 흐른 뒤에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아서 저자 역시 할머니들은 금발이 진짜인지 확인하려고 슬그머니 내 머리카락을 만졌다는 글을 남기고 있다. 비숍 여사의 표현대로 한국인들의 밉살스런 친근함의 표현이 성가실 법도 하지만 한국인의 호기심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것 같아 조금 웃음이 나기도 한다.

 

'서울셀렉션'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알리는 잡지인 “Seoul”을 통해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뜻밖에도 책을 통해 만나서 반가웠다. 본문에는 한글과 영문이 함께 수록되어 있어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좋다. 사진 기록으로서의 가치와 함께 내용 또한 흥미로워서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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