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깃발
제임스 브래들리.론 파워스 지음, 이동훈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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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역에 있던 노숙자에게 목도리를 건네는 '목도리녀.'

개인적으로 난 그녀의 행동에 '작위성'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세상엔 어느 누구나 인정하는 '미덕'이 있게 마련인데,
이런 것에까지 '악의'가 스며들었을 때 그 사회가 주는 비정함을 내 스스로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 '스틸 컷' 한 장이 만든 또 다른 스토리의 '허구성'이다.
  

 

1. 서울역의 목도리
 
서울역에 있던 노숙자에게 자신이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건네고, 빵과 우유를 사주던 모습이 일반인의 카메라에 찍혀 유명세를 탄 대학생이 있었다. 마침 그 곳을 지나던 한 시민이 자신의 휴대폰 카메라에 그 모습을 담아 인터넷에 소개하면서 이 사건은 유명해졌는데, 이후 국내의 여러 매체가 이를 기사화했다. 그녀는 ‘목도리녀’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가 됐고, 그녀의 아버지 역시 십수년간 독거노인을 돌보는 등 선행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두 모녀는 ‘부전여전’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목도리녀가 취업을 준비 중인 미국 유학파 출신이라는 것과 모 금융회사에서 그녀를 고용할 것이라는 기사가 났다. 그리고 이 기사는 확인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허위’기사 혹은 조작 기사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사태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자, 목도리녀는 모든 언론과의 접촉을 끊고 잠적을 했다. 목도리녀를 지켜보던 몇몇 네티즌들은 그녀가 취업을 위해 선행을 미리 ‘계획’하고 찍었다는 음모론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녀의 행위는 실제인가, 거짓인가. 
 

영화 <아버지의 깃발>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키워드로 쓰이는 사진. 이 사진 한장이 미국민들에게 주는
감동은 컸다. 전쟁은 곧 끝날 것이며  따라서 내 아들이, 남편이 곧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었고,
훨씬 더 '의도적'으로는 '미국의 승리'를 확신케 해주었다. 그런데, 이 사진이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면?

 

2. 아버지의 깃발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2월, 미군해병부대가 일본군의 요새지역인 이오지마섬에 투입된다. 한 달이 넘도록 전투를 계속한 끝에 미군은 이오지마섬의 꼭대기에 성조기를 꽂는 데 성공한다. 마침 그 모습이 한 사진작가에 의해 찍히고, 이 사진은 신문매체를 통해 미국 전역에 소개된다. 이 사진은 언제 끝날지 몰라 지루해 하던 미국인들에게 ‘전쟁의 종식’ 혹은 ‘연합군의 승리’라는 메시지를 던져 주었다. 미국인들은 사진 한 장에 열광했다.
 
  그러나 사진 속 장면은 신문의 설명처럼 그들이 ‘처음’ 성조기를 꽂을 때가 아니었다. 사진 속 6명의 대원 중 끝까지 살아남은 3명의 대원은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었지만 침묵한다. 전쟁 때문에 엄청나게 늘어난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들의 성금이 필요했던 미국 정부는 이들을 영웅으로 만들고, 진실을 조작할 것을 지시한다. 이들 만들어진 ‘영웅’은 국가의 필요에 의해 전국을 돌며 모금운동을 벌이고, 사진에 열광했던 미국인들은 주저 없이 돈을 내놓는다. 이들은 전쟁 중에 스러져간 동료들과 별 것 아닌 행동 하나로 ‘영웅’이 된 스스로를 비교하며 괴로워한다. 전쟁의 기억이 국민들로부터 가물가물해져가는 것과 동시에 이들 ‘영웅’ 역시 가물가물 잊혀진다. 이들의 행동은 실제인가, 거짓인가.     
 
 

3. 장 보르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장 보드리야르는 제1차 이라크 전쟁이 한창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를 때 ‘이라크전은 발발하지 않았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했다. CNN 등의 미디어가 소개하는 이라크전은 첨단무기에 힘입은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만 있을 뿐 전쟁의 진짜 모습, 즉 살육전의 아비규환은 볼 수 없다는 것이다. TV를 시청하는 대다수의 시민들에게 이라크전은 첨단 무기가 시연하는 화려한 이미지로 기억된다. 그 이미지는 미국인들에게 ‘미국의 승리’라는 메시지를 ‘마사지’해주었다. 제2차 이라크전쟁의 비극이 제1차로부터 기인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 마사지는 거짓인 셈이다. 여전히 미국은 이라크전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미지’에 의해 실제와 거짓이 모호해진 현대 사회를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이라 불렀다.
 
  보드리야르가 주목한 매체는 사실 ‘TV'나 ’영화‘ 등의 영상매체였다. 이들의 연속성은 사진에 비해 훨씬 ’사실감‘이 높다. 반면 교묘한 조작에 의한 왜곡 역시 용이하다. 섬세하게 조작된 영상 메시지는 보는 이의 오감을 ’마사지‘ 해 준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봤듯, 실체와 거짓을 구분할 수 없는 ’시뮬라시옹‘의 사회는 무릇 영상매체에 의해 주도되는 것만은 아니다. 목도리녀는 인터넷과 휴대폰카메라의 결합이 창조한 ’시뮬라시옹‘이며, 아버지의 깃발은 사진 한장과 국가주의, 영웅주의가 결합했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2005년 대림 미술관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사진전'을 선뵌 적이 있다(고 한다.)
사진전의 제목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였다. 자신의 시뮬라시옹 이론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듯 이 전시회
한켠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었다고 한다.
"사진은 침묵한다. 사진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는다.
현실과 그 이미지 사이에 소통이 불가능한 것이다.
관람객이 이 사진을 보고 그 이미지에 관해 의문을 품고 있는데,
사진이 어떠한 답도 내놓지 않고 아무런 답도 해주지 않을 때 그 이미지는 순수하다. "
 
 
  우리는 무수히 많은 거짓 이미지에 노출돼 있다. 우리가 사실이라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여러 장면이 사실은 여러 이유로 조작되고, 왜곡된다. 속된 말로 감동의 눈물바다였던 ‘지하철 결혼식’ 동영상은 연극과 학생들의 연기였던 것으로 드러났으며, 한 여중생이 성폭행을 당했다며 올린 영상 역시 철저히 의도적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황우석 사건의 여진이 가시기도 전에 이병천 교수의 늑대 복제 논문 역시 조작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다 심각한 것은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러한 조작이 더욱 용이해졌다는 점이다.  실제 인터넷을 떠도는 ‘몰카’영상을 보라. 포토샵에 의해 섬세히 ‘뽀샵’처리된 사진들을 보라. ‘명품’보다 더욱 성능이 우수한 ‘짝퉁’을 보라. 이들은 대부분 실제를 가장한 ‘가짜’다. 과연 현대는 실제와 거짓의 구분이 불가능한 ‘시뮬라시옹’으로 가득한 사회가 아닌가.
 

서울대 이병천 교수팀에 의해 복제된 늑대 '스널피'와 '스누피.'
이 기사가 나간 후 국내의 보수언론들은 '생명복제 시대 다시 열어야 한다' 식의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러나 이 실험 역시 '황우석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수치가 조작되고, 연구 성과가 부풀려졌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마르크스가 그랬던가. '역사는 두번 반복된다고.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번은 희극으로.'
사실 황우석 사건은 '비극'적 측면이 많았다. 과학계의 입장에서도 그렇거니와, 아무것도 모르고 공짜 홍보에 열을 올렸던 '언론계'의 입장에서도. 국가도, 국민도 모두 일인의 사기 행각에 허무하게 당한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또 다시 똑같은 내용의 논란이 반복됐다. 이건 '코미디'에 가깝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아버지의 깃발>은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이긴 하나, 전쟁영화라 보긴 힘들다. 전쟁영화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스펙타클’한 영상은 원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 그는 다른 작품을 통해 ‘휴머니즘’에 대해 얘기한 적이 많은데 전쟁영화에서 나오는 전우들간의 우정이야 모든 전쟁영화의 공통 화두라 특별할 만한 게 없다.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개인들의 방황 역시 다른 영화에서 여러 번 다루었던 스토리다. 이 영화가 내게 새로이 다가왔던 부분은 ‘미디어에 의한 현실 왜곡’이었다. 굳이 미디어로 한정할 수 없는 현재의 영상공간에 무방비로 노출된 현대사회에 꽤나 신선한 문제 거리를 던져준 셈이 아니겠는가? 이 영화에서의 왜곡이 ‘국가’에 의해 주도됐다면 현재의 이미지 왜곡은 콘텐츠의 생산자에 의해 직접 가능해졌다는 사실이 다를 뿐. 더욱이 현재의 콘텐츠는 생산자과 소비자의 구분 없이 ‘유비쿼터스’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미지에 의한 현실 왜곡이 더욱 빈번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UCC가 상징하는 민주성을 마냥 긍정할 수 없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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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로 산다는 것
시사저널 전.현직 기자 23명 지음 / 호미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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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다음과 같은 것들이 문제다. 위의 그림은 3월 27일자 경향신문의 1면 톱기사와 그 밑에 배치됐던 광고물을 스크랩한 것이다. 1면의 기사에서는 '목매는 협상'에 끌려다니는 한미FTA와 최근 협상타결에 실패한 한-말레이시아 FTA를 비교해 놓았다. 같은 면 한국무역협회 등에 의해 실린 광고물은 한미FTA에 의한 '개방'이 우리나라에 긍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는 예상을 담고 있다. 한미FTA가 세간의 집중을 받은 이후 경향신문은 꾸준히 그 위험성을 지적해 왔다. 가령 오늘자(4월 2일) 신문에서는 1면 톱을 비롯, 총 9면을 할애하여 FTA의 부정적(?) 영향에 대해 보도했다. 내가 지금 문제 삼고자 하는 바는 FTA 찬반논쟁이 아니다.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가 실려있음이 분명한 1면 톱과 회사를 운영하기 위한 '중요 밥줄'일 수밖에 없는 하단 광고물 사이의 이물감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게다. 이 이물스런 편집은 시사저널 사태로 촉발된 자본-언론간 엇나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또 다른 예이다.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엄연히 '사기업'으로 자리매김한 언론사가 자본의 간섭으로부터 독립적이기란 쉽지 않다. 군부독재 시절의 언론탄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과거의 언론사들처럼 말이다. 당시 한 일간지에서 전두환을 옹호하는 기사를 썼으며, 오랫동안 '김국'라는 애칭으로 시사저널 편집국장을 맡았고, 지금은 당대의 문장가로 평가받는 '김훈'의 말을 들어보자. "내가 젊은 기자 시절에 나와 내 선배들은 인간의 사회가 민주적이고 시민적인 가치에 의하여 꾸준히 발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의 언론 전체는 패배하고 좌절했습니다."(p.223) 그는 시사저널 사태를 온몸으로 감내하고 있는 자신의 후배들을 보며 비참한 심정으로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오늘 시사저널의 사태는 저 개인의 삶과 관련된 것입니다. 30년 전 내가 젊은 기자였던 시절에 우리 나라 언론들이 바로 이 자리에서 무너졌습니다. 그 때는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정권 시절이었고 대부분의 언론이 이 자리에서 무너졌던 것입니다. 저도 그 때 무너진 기자 중 하나입니다. 오늘 이 사태에 대해 아무런 할 말이 없어야 마땅한 사람이죠. 그러나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내 후배들이 다시 같은 자리에서 무너진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30년의 세월을 무효화하는 것이고 인간의 진화와 발전을 부정하는 사태이기 때문에, 나는 내 후배들이 여기서 무너지지 않고 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끝없이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p.223)



2006년 6월 19일 시사저널 금창태 사장이 삼성 이학수 부회장의 인사 전횡 의혹을 다룬 기사를 인쇄 직전 삭제하면서 발생한 '시사저널 사태'는 생각처럼 쉬이 옳고 그름을 판가름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물론 우리가 쌓아놓은 '민주주의적 가치', '언론윤리의 잣대' 에 따르면 이른바 '편집권'은 기사를 작성한 기자와 편집국에 속해있음이 분명하다. 다만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기사가 상품이 되는 엄연한 자본주의 시장에서 '편집권'이 언론사의 경영권으로부터 자유롭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문제다. 역시 그 자신 기자로 오랫동안 생활해 왔고, '시사모(시사저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고종석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편집권은 전적으로 편집국에 속한다고 무 자르듯 단언하기 어려운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매체의 편집권은 그 언론 기업의 경영권 일반을 구성하는 하위 범주라고 볼 여지도 있기 때문이다(기사라는 상품을 시장에 내다 파는 사람은 경영자다). 편집국장에 대한 인사권이 경영진에 있다는 사실이 그 근거가 될 수 있겠다. 이것은 시사저널만이 아니라 사기업 형태를 띤 다른 언론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나는, 우리가 자본주의의 공기를 숨쉬고 있는 한, 매체의 보도와 논평에서 자본과 경영의 그늘을(다시 말해 '장사'의 그늘을)말끔히 걷어 낼 수는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p.242) 고종석이 말한 '사기업의 형태를 띤' 언론사의 예외로 둘 수 있는 언론사는 KBS 등 공영방송과 국민주주 혹은 사원주주 등 독특한 형태를 띤 언론사인 '한겨레'와 '경향신문'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 주주의 입김으로부터 극히 자유로운 '경향신문'조차 자본의 유혹으로부터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 '이라크전쟁 반대' 등 '평화적 가치'를 내내 지지한다던 한겨레 역시 미국산 전투기를 광고물로 실었다가 문제가 된 적이 있다.



그렇다고 하여 자본의 요구를 무작정 들어주는 것은 '언론의 제역할'을 포기한다는 말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언론은 이른바 '공익'(과연 공익이 무언가, 공익의 범위를 어디까지 놓아야 할 것인가. 언론사의 선택에 의해 달라지는 공익의 내용을 어떻게 볼 것인가 등의 물음은 또 다른 문제다.)을 알리는 데 존재의의가 있으며, 현재 공익에 맞부딪히는 가장 강력한 존재가 '자본'인 사실 또한 엄연하다. 우리가 폭력의 공포 속에서 어렵사리 획득한 '자유'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선 필코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야 하며, 이를 위해 '편집권의 독립'이 핵심 요건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공익', '자유'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는 물질의 유혹 앞에서 쉽사리 무릎꿇기 쉽지만, 그것을 잃고 난 후에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 굴욕감은 물질이 주는 단물보다 훨씬 크다. 그런 점에서 시사저널 사태가 주는 묵직한 경고음을 그저 넘겨들어선 안된다. 고종석의 말을 더 들어보자. "그러나 나는,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의 그 고귀한 자유가 불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거기에 민주주의적 가치가 결합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편집권을 편집국 기자들이 공유하고, 어떤 사안을 기사화할 것인가에 대한 최종 판단이 편집국장에게 맡겨져야 한다는 것은 그런 민주주의적 가치의 일부다."(p.242)



이 책 <기자로 산다는 것>(호미출판사)은 시사저널 기자들의 일상을 담은 글이다. 보다 뚜렷하게는 시사저널 기자들이 '진퉁' 시사저널 재직시 썼던 기사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기도 했고, 시사저널과 함께 보냈던 지난날의 애환을 소소히 그려내고 있는 책이다. 책 중간중간 이대로 주저앉지 않겠다는 결기가 묻어나기도 하고, 기자가 가지고 있어야 할 '마음가짐'을 비장한 각오로 보여주기도 한다. 비단 '시사저널' 기자만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기자들이기필코 수호해야 할 행동 원칙이 아닐까 한다.

 '기자'가 되겠다고 작심한 나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방황하지만, 수백번씩 좌절하지만...그래서 읽어본 책이다. <기자로 산다는 것.> 아직 '왜' 기자가 되려고 하는가, '어떤' 기자가 되겠는가 등의 당위론적 질문들에 마땅한 대답을 구하지 못한 터다. 글쎄, 이 책을 본 이후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기자가 된다면 이들처럼 '꿋꿋'했으면 좋겠다. 어디서든 '당당'하길 바란다.

 '짝퉁' 시사저널이 발간된 이후 이들이 느끼는 소외감이 더욱 큰 것 같다. 외로움의 문장들이 가끔 눈에 띈다. 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꼭 이들을 만나봐야 겠다. 이들이 친 천막 풍경을 한번쯤은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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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7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오현종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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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제임스 본드걸 : 우슐라 엔드레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난 007 시리즈물을 단 한편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 네이버가 22개의 시리즈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것을 훑고서야 제목이 익은 게 몇 개 보이는 정도다. 가끔씩 TV에서 방영되던 더빙물이 내가 아는 007의 전부다. 원래 선악을 뚜렷이 구분한 후 선의 해피엔딩이라는, 결말이 뻔한 영화를 지루해 하는 편이다. 게다가 반공의 색채가 그득한 체제홍보용 선전물이라면 더더욱 내 관심 밖이다. 그러나 난 제1대 본드 역을 맡았던 이가 <더 록>에서 텁수룩한 수염의 쿨한 탈옥수, 숀 코너리라는 사실을 안다. 기름을 잔뜩 묻혀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모습이 인상적이던 피어스 브로스넌도 꽤 오랫동안 제임스 본드였다는 사실도. 그런데 이럴 수가. 단 한 명의 본드걸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이 왜 거기, 그러니까 제임스 본드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그들의 임무가 무엇이었는지. 황톳빛 태양에 그을린 해변에서 007과 진한 장면을 연출하던 그녀들의 실루엣만 얼핏 기억 날 뿐이다. 서둘러 007 메인 홈피에 들러 확인한 결과, 그녀들의 숫자는 22개의 시리즈물을 통틀어, 놀라지 마시라, 자그마치 75명이다. 한 명당 약 3편 정도를 맡았던 제임스 본드역의 남자배우에 비해 007본드걸은 한 편당 4명꼴이다. Holly shit!!

 “본드걸은 원래 일회용이야. 한번 사랑받고 퇴출당하는 운명이라고.”(p.46)


데니스 리차드, 소피마르소

  이 쯤 되면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의 스토리가 왜 내게 특별히 다가왔는지 대강의 설명이 될 수 있을게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그토록 수많은 본드걸이 있었고, 그녀들도 ‘무엇’인가를 했을 텐데, 왜 단 한번도 ‘주목’받지 못했는가? 전(前)편의 본드걸은 왜 매번 후속편에선 ‘퇴출’당하는 것일까? 어느 누구도 그녀들의 뒷이야기를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들의 후일담을 담고자 했던 이 소설에 강한 흥미를 느꼈다.

   설핏 페미니즘 소설로 볼 수도, 아니면 조금 특별한 소재를 빌려온 통속적인 연애소설로 치부할 수도 있는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비교적 단순하고 명확해 보인다. 왜 본드걸은 매번 ‘퇴출당하는 운명’인 것이냐고. 왜 본드걸은 본드의 욕망을 채워주는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냐고, 이 소설은 강하게 반문하는 것이다.

  “007 제임스 본드의 연인 본드걸. 스파이에게 여자는 필수지.”(p.16)

   007이 본드걸을 통해 보여주는 건 “섹스, 어드벤처, 판타지뿐.”(p.42) 그래서 본드걸, ‘그 자체’를 보여주겠다는 것이 이 소설의 고갱이다. 본드에게 배신당한 본드걸 미미양이 제임스 본드를 ‘알고자’ 스파이가 되길 작정하지만 끝에 가서는 자신에 대해 ‘알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모험’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본드걸 미미는 스파이가 돼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러나 종국에는 스파이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당당히 본드 앞에서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난 본드걸 미미, 013, 스파이야. 당신은 날 몰라.”(p.208) 남근주의 마초남들의 단골 경구가 아니던가. ‘당신은 날 몰라.’


에바 그린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소설은 ‘통속적인’ 수준의 ‘연애소설’ 정도로 치부될 수도 있다. 소설의 종반부에 와서야 남성주의의 전복이 시도되나, 그 태도는 ‘예상할 수 있는 수준’ 을 벗어나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 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비극적인 관계를 회복할 길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그저 서로의 다른 지점을 확인할 수 있을 뿐. “당신은 날 몰라.”

   그저 007이 지니고 있는 플롯(마초이즘, 선악의 이분법, 반공주의 등)이 ‘큰’ 탓에 오현종의 스토리텔링이 ‘작게’ 느껴졌을 뿐, 쉬엄쉬엄 읽을거리로는 준수한 편이다. 본드걸의 후일담이라니, 소재만으로도 ‘신선미’가 느껴지는 소설이 아닌가. 그래서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소설은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과도 같아서 그 소설이 나오고 난 뒤에야 '아니 여태까지 이런 소설이 없었단 말이야?'라는 반응을 낳는다. 이를테면 이 소설이 그렇다.”(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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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망각의 책 문학사상 세계문학 13
밀란 쿤데라 지음 / 문학사상사 / 199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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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라하의 봄

   “일반적으로 ‘프라하의 봄’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이런 일들의 마지막 시기를 말한다.
  목가를 지키던 자들은 자신들의 아파트에 설치되었던 도청기를 떼어낼 수밖에 없었으며, 국경은 개방되었다.
  바흐의 위대한 악보로부터 여러 가지 음이 달아났고 자신의 음색을 노래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믿은 수 없을 만큼 활기찼고, 흡사 카니발과도 같았다. 전 지구를 위해 위대한 푸가(fuga)를 쓰고 있던 소련은 음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
  1968년 8월 21일, 소련은 보헤미아에 50만 대군을 파견하였다. 이에 따라 약 120만 명의 체코인이 나라를 떠났으며, 남은 사람들 중에서 약 50만 명이 직장을 버리고, 인간에서 멀리 떨어진 벽촌의 공방, 외딴 구석의 공장, 트럭의 운전석 등, 요컨대 그들의 말소리가 어떤 사람의 귀에도 들리지 않을 장소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꺼림칙한 추억의 그림자가 복고된 목가로부터 국민들의 마음을 이탈시키는 일이 없도록 할 필요가 있었고, ‘프라하의 봄’과 소련군 탱크의 진입이라는 오점이 아름다운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의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8월 21일의 기념일에 대해 언급하는 일이 없고, 자신의 청춘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던 사람들의 이름은 마치 학교 숙제 속의 틀린 부분처럼 꼼꼼히 지워지고 말았던 것이다.“(p.26)

 2. 서울의 봄 

    서울에도 프라하를 닮은 봄이 있었다. “인간들이 자신의 청춘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킨 것”(p.25)으로부터 프라하의 봄이 찾아왔다면, 서울은 제왕에게 버림받은 2인자의 권총으로부터 온 게 다를 뿐.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죽였다. 18년 동안이나 계속됐던 일인독재의 비참한 결말이었다. 긴급조치 등 유신 하에 신음하던 민중들은 ‘민주주의’를 열망했다. 12월 12일, 전두환이라는 또 다른 군부세력이 박정희 사후를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자유를 향한 요구는 쉬이 사그러지지 않았다.   서울의 봄이 온 것이다. 그러나 서글프게도  ‘서울의 봄’이 쏟아내는 요구를 하나의 그릇으로 담아낼 수 있는 정치적 결사체가 우리에겐 없었다.  당시 유력한 지도자로 평가받던 YS, DJ는 각자의 셈법에 빠져 사태파악을 하지 못했다. 민주화 시위가 잠시 주춤한 사이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세력은 5*17 비상계엄확대실시를 단행한다. 그리고 5*18이 터졌다. 

 3. 제5공화국, 서울의 봄을 짓밟다.


  프라하에 탱크로 입성했던 소련군처럼 신군부세력은 서울의 봄을 역사에서 지워낼 필요가 있었다. 두 가지의 방법이 동원됐다. 역사를 조작하는 것과 기억을 없애 버리는 것. 역사의 조작은 그동안 잘 길들여놓은 언론에 의해 주도됐다.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은 5*18을 “고개의 내리막길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고 그 동쪽 너머에 ‘무정부 상태의 광주’가 있다”고 썼다. ‘새 역사 창조의 선도자 전두환 장군’(경향신문), ‘역사의 혼이 키워 낸 신념과 의지의 30년’(중앙일보), ‘우국충정 30년’(한국일보) 등 전두환을 향한 용비어천가가 지면 곳곳에 난무(亂舞)했다. 80년 4월 전두환 중정부장서리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전직 언론인 허문도씨가 군부와 언론계를 누비며 언론인 숙정 계획을 거의 마무리함으로써 가능해진 일이었다.(고종석 외, <기자로 산다는 것>, 호미출판사 참고) 1986년 <말>지가 폭로한 ‘보도지침'에서 알 수 있듯, 그 시절  역사의 왜곡은 주로 ‘언론 길들이기’에 의해 이루어졌다. 

 

 기억을 없애버리기 위해 동원된 수법은 이른바 ‘3S정책’이었다. Screen, Sports, Sex가 대중에게 보급됐다. 미디어는 마사지라고 했던가. 1가정, 1 TV 시대가 열리자마자 스크린엔 프로 스포츠가 중계되고, VTR에서는 포르노 테이프가 돌아갔다. 골치 아픈 투쟁의 기억 대신 즉흥적 자극이 대중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망각’은 ‘웃음’의 코드를 미디어로 주입함으로써 가능했다.

“악마를 ‘악’의 추종자라 생각하고, 천사를 ‘선’의 전사로 여기는 것은 천사들의 선동을 받아들이는 거이 된다. 사실은 분명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법이다.
  천사들은 ‘선’이 아니라 거룩한 창조의 추종자이며, 반대로 악마는 신의 세계에 대해 합리적인 의미를 인정하지 않는 자이다.
  이 세상에 선이 있다고 해서, (어릴 적에 내가 믿고 있었던 것처럼) 천사들이 악마들보다 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양자가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 세상에 트집 잡을 여지가 없는 의미(천사들의 권력)가 남아돌도록 많다면, 인간은 그 무게에 짓눌려서 죽어 버리고 말 것이다. 또 이 세상이 일체의 의미를 잃는다면(악마들의 천하), 인간은 역시 살아 남을 수 없게 된다.
  가정된 의미, 이른바 사물의 주어진 질서에서 벗어난 사물들은 우리에게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므로 웃음은 본래 악마의 영역에 속한다.
  (중략) 그래도 천사들은 하나의 성과를 얻었다. 그들은 의미론적인 기만으로 우리를 속인 것이다. 웃음의 모방과 본래의 웃음(악마의 웃음)을 가리키는 데는 한 가지 말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똑같은 한 가지의 외면적 표현이 정반대인 두 가지의 내면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두 가지 웃음이 있는데도 그것을 구별할 말이 없는 것이다.“(pp.95-96) 

 4. 민주주의의 봄은 언제 오려는가. 

   역사가 조작되고 망각이 강요되던 시기. 이 시기를 끝내 기억하려던 사람들이 있었던 건 축복이었다. 리영희가 있었고, 문익환이 있었고, 함석헌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을 ‘투쟁’으로 승화시켰던 수백만의 노동자, 학생, 농민, 빈민들이 있었다. 국가보안법의 탄압 속에서도 자기주장을 굽힐 줄 몰랐던 그들에 의해 87년 6월이 열렸다. 서울의 봄, 아니 민주주의의 봄을 맞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미렉은 권력에 대한 인간의 투쟁이란 바로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라 말하곤 했다.”(p.10)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민주주의의 봄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4년에 한 번씩 대통령을 뽑지만, 5년에 한 번씩 국회의원들과 악수를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순 없다. 문민정부를, 국민의 정부를, 참여정부를 뽑았지만 오늘의 삶은 어제와 그다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외려 빈부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이에 따라 상대적 박탈감만 가득이다.

   87년 이후 얻은 ‘자유’는 ‘소비의 자유’로 협소해졌다.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소비의 자유’가 자유의 내용 중 최초로 국가에 의해 장려되는 것이라 하였다. 이전의 자유가 투쟁을 통해 획득하는 자유인 반면, 국가는 현재의 소비자 자유를 적극 권장한다. 이러한 자유는 두 가지 방식으로 역사를 지운다. 역사를 기억할 틈을 주지 않는 것과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없게 하는 것.




 얼핏 만인에게 두루 적용되는 것으로 보이는 소비자 자유는 사실은 소비를 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인간을 분류한다. 소비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내 탓’이다. 남들과 똑같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내가 분발해야 한다. 내 이웃의 세련된 옷과 값비싼 차를 좇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벌지만 사실 부와 빈의 격차의 그리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힘겹게 벌어 남들과 똑같은 옷을 구입해 거리에 나왔지만, 막상 그 거리에는 이미 또 다른 패션이 넘쳐난다. 그 패션을 따라잡기 위해 또 힘겹게 돈벌이에 나서야만 하는 악순환. ‘필요’는 자기 의지 밖에서 ‘창출’된다. 창출된 필요, 혹은 욕망을 채우느라 기억에 대한 투쟁 따위 할 겨를이 없다. 역사를 기억할 틈이 없는 셈이다.

   소비자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이는 굳이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없다. 이들의 사치는 곧 권력이다. 예전의 권력이 ‘역사를 조작하는 힘’에서 비롯됐다면, 지금은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이 곧 힘이다. 자본이 만드는 온갖 재화와 서비스는 이미 그것의 ‘사용가치’ 이상의 가치를 획득했다. 바로 이 재화를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힘.’ 명품 핸드백을 옆구리에 걸치고 거리를 누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권력자다. 외제 스포츠카에 섹시한 애인을 태우고 도로를 누비는 그 또한 이미 권력자다. 이들은 역사를 기억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저 현재의 소비자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게 최선의 ‘민주주의’다.


  이제 봄은 국가에 대항한 투쟁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국가는 외려 자유를 적극 권장하는 편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자유’가 ‘현재의 소비’에만 갇혀 있는 한 말이다. ‘소비자 자유’가 망각의 기제다. 이제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은 자유의 외연을 확장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소비자 자유 너머의 자유가 존재한다는 사실, 외려 소비자 자유가 그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우리가 소비의 자유에 탐닉하고 있는 사이, ‘시사저널’의 금창태 사장은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 웰빙 열풍에 힘입어 참살이 식품 소비에 몰두한 사이 아마존은 녹색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기억하라. 우리의 소비가 언론을, 환경을, 그리고 ‘자유 본연’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휴블이 말하였다.
  「민중을 일소하려면, 먼저 그들의 기억을 지워야 해. 그래서 민중의 책*문화*역사를 파괴하는 거야. 그 다음, 다른 사람을 시켜서 새 책들을 쓰게 하고, 새 문화를 만들어 내게 하고, 새 역사를 지어내도록 해야 하지. 그러면 얼마 안 가서 민중은 현재의 자신과 과거의 자신을 잊어버리기 시작할 거야. 그리고 주변의 세계는 그보다 더 빨리 그들을 잊어버리게 되지.」“(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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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 - 20세기 가장 뛰어난 저널리스트의 삶
산토 아리코 지음, 김승욱 옮김 / 아테네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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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아나 팔라치 님께.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난 지 이제 6개월이 돼 가네요. '전설의 여기자'라는 수식어가 달릴 정도로 화려한 활동을 하신 당신을 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명색이 기자를 소망하는 학생인데도 말이지요. 몇 달 전 당신의 삶을 소개하던 현직 기자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때서야 당신의 존재를 알았고, 서둘러 당신의 삶을 기록한 책 <전설의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산토 L. 아리코, 아테네)를 구해 읽었습니다. 아둔하고 미련하다고 욕부터 하시겠군요. 당신은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디킨스처럼 인정받기를 갈망한"(p.363) 분이었으니까요. 피안의 세계에서나마 당신의 불같은 성격이 유순해졌다면 다행이구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당신의 삶보다는 당신의 '방식'을 배우고자 했습니다. '기자'라는 직업이 가져야 할 태도 같은 것들 말이지요. 뭘 봤느냐고 물으신다면...글쎄요. 사실 철저한 학생의 입장에서 시작한 책 읽기가 종반에 가서 많이 무뎌졌습니다. '본보기'로 삼으려 했으나  '반면교사'가 될만한 모습도 보이시더군요. 

당신은 '명석'한 분이시더군요. 현대사회에서 '힘'( hegemony)이 어디로부터 비롯되는 것인지 아는 분이었습니다. "힘을 부여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품위다. 그[가난한 사람]는 자신이 세속적인 힘, 물질적인 힘, 금전적인 힘, 사회적인 힘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는 문화와 힘이라는 개념을 결합시킨다."(p.408) 부르디외가 말했던가요. 구별짓기에 따른 '문화권력'의 창출 메커니즘에 대해 말이죠. 글쓰기에 관한 당신의 천부적인 기질을 어떻게 사용할 지를 잘 아는 분이었습니다. 당신은.

 

안타깝게도 전 당신의 '문학'을 접해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글쓰기 수준을 운운할 수 있는 기본적인 소양 같은 게 결여돼 있음은 물론이구요. 그래서 당신이 도스토예프스키 정도로 인정받을 수 있는 수준인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건 당신은 '기자'이기 보다 '문학인'이길 바랐다는 점이지요. 자신의 글에 대한 자부심 만큼 글쓰기에 대한 철학도 깊어보였습니다. 그 점은 한 수 단단히 배웠습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말들이죠.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난 아주 성실하게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따라서 글을 쓸 때 나는, 그 글이 덩샤오핑에 대한 것이든 호메이니에 대한 것이든, 항상 나 자신을 드러낸다."(p.16) 머리로만 풀어간 무미건조한 글이나 감정만 가득 실은 자기 투정식 글에 비하면 당신이 말하는 글쓰기는 '솔직'해 보였습니다. 당신의 글이 당신 전체를 말해주고 있을테니까요.

자신이 만든 글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려는 태도 또한 가슴에 새길 부분이었습니다. "이야기를 앞으로 끌고 나가는 것은 네가 아니다. 이야기가 우리를 이끌고 스스로 나아가는 것이다. 책을 쓰기 전에 "나 오리아나 팔라치는 이 책을 이런 식으로 쓰고 싶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결코! 그것은 마치 아이를 낳지 않고 계속 임신 상태를 유지하기로 결정하는 것과 같다. 태어날 아들이 파란 눈과 검은 머리를 가져야 한다고 결정하는 것과 같다. 태어날 아들이 파란 눈과 검은 머리를 가져야 한다고 결정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절대 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눈이 파란색이 될지, 머리가 금발이 될지 흑발이 될지 결정하는 것은 아이 자신이다. 네가 결정해줄 수는 없다. 아이는 그 안에서 결정을 내리고 있다. 책도 마찬가지다...나는 숨이 붙어 있는 한 이 말을 되풀이할 것이다. 책은 그 나름의 독자적인 생명을 갖고 있다."(p.372) 성석제라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라는 소설을 쓴. 한 다큐먼테리에서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인터뷰어가 그렇더군요. "그래서 황만근이 어떻게 했을까요?"라고. 돌아온 대답이 걸작입니다. "글쎄요. 황만근씨가 어떻게 했을까요? 잘 모르겠는데..." 우문현답이었습니다. 자기가 만든 캐릭터에 자율성을 부여해 주는. 글을 쓰는 매순간 기억하겠습니다. 당신과 황만근의 이야기를.

그러나 당신의 자부심은 지나쳐 보였습니다.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었고, 때론 과격했습니다. 스스로 '신화'가 되겠다는 의지가 과도한 나머지 당신은 인터뷰이들에게 심한 모멸감을 주었습니다. 당신은 "언론계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인터뷰를 무대로 이용하는 기자"(p.126)였습니다.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인터뷰 내용을 전부 종이에 옮겨 적은 다음, 영화 감독이 영화를 만들 듯이 기사를 작성" 하고 "일부 내용을 없애기도 하고, 잘라서 이어 붙이기도"(p.134) 했지요. 당신 스스로 고백했습니다. "나는 배우이고, 이기주의자이다. 기사에 나 자신을 집어넣으면 좋은 기사가 나온다."(p.134) 그 결과 당신의 기사엔 당신만 존재했습니다.  그 결과 NASA 우주인들을 인터뷰한 내용은 우주인에 대한 당신의 편견만 부각되고, 아라파트를 인터뷰할 때는 빈약한 억측으로 그를 '동성애자'인 양 묘사했습니다. 아라파트에 관한 기사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건 무엇일까요? 이슬람의 평화를 위한 그의 대안 같은 게 아니었을까요? 당신은 '문학'과 '기사'를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담아야 한다는 당신의 문학론을 '신문지면'에 그대로 적용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신문 기사의 주인공은 인터뷰이이지 인터뷰어가 아니며, 독자의 관심 영역이지 당신의 편견이 아닙니다. 당신이 쓴 기사들은 "픽션의 요소들을 이용하고 글쓰기를 예술의 영역으로 승화시킨 논픽션 산문의 전형적인 예"이며 "베트남 전쟁에 대한 글을 소설만큼 창조적인 장르인 '풍부한 상상력으로 쓴 진실(imaginative truth writing)(p.199)"로 끌어올렸다고 이 책의 저자는 평가하고 있습니다. 읽는 재미를 고려해 형식적인 부분에서 '문학'을 도입하는 것과 기사 자체를 논픽션으로 만들어 버리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입니다. 당신의 지나친 '자기중심주의' 때문에 4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당신은 지나치게 똑똑했는지 모릅니다. 무솔리니의 폭정에 저항한 부모님 밑에서 당신은 너무도 일찍 성숙해 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때의 기억 때문에 당신은 '전체주의'에 대한 광적인 혐오감을 갖게 됐고, '개인주의'를 반사이익으로 취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선천적 자산이 풍부했고, 그것을 극대화 하는 지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전설'이 될 자질을 갖고 있었지요. 그래서 더욱 매달렸다고 이해하겠습니다. 스스로 신화가 되겠다는 집착을 말이죠.

당신의 열정'만'은 꼭 따라하겠습니다. 샤론이 당신에게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죠. "난 당신이 했던 인터뷰에 대해 모두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또 누군가를 굴복시켜 머릿가죽을 벗기고 싶어한다는 것도 잘 알아요. 당신은 혹독한 사람입니다. 아주 혹독해요. 하지만 당신과 폭풍우처럼 격렬한 대화를 나눈 모든 순간이 다 마음에 듭니다. 당신이 용기 있고, 성실하고, 유능한 여성이니까요. 당신처럼 사전조사를 철저히 하고 나를 만나러 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당신처럼 오로지 인터뷰를 준비하기 위해서 폭탄이 떨어지는 전쟁터를 다녀온 사람도 없었습니다." '자기를 영웅으로 만들겠다'는 잘못된 방향성을 제외한다면 완벽한 기사를 위한 당신의 열정은 기자가 가추어야 할 필수 미덕인 것 같습니다. 꼭 명심하겠습니다.

팔라치씨! 기자 하기 어려운 세상이 됐습니다. 당신은 '한국'에 대해 아나요? 지금 이 곳에서는 유례없는 취업난 때문에 많은 청년들이 '홍역'을 앓고 있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구요. 번번이 낙방한 나머지 잔뜩 움츠렸지만 당신의 자신감을 조금이라도 배운 지금, 어깨 좀 펴려고 합니다.

근데 이보다 더 염려스러운 것은 막상 들어가고 난 후의 상황을 그려볼 때입니다. '시사저널 사태'에서 드러난 언론계의 '모순'을 생각하면 암울하기만 합니다. 자본 권력이 새로운 장애물로 등장한 지금은 눈에 보이는 폭력에 대처했던 과거보다 더욱 어려운 상황인 듯 보입니다. '공공의 진실'을 콘텐츠로 먹고 사는 '사기업'이라니요. 난마처럼 얽혀 있는 언론의 고민은 쉽사리 풀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당신의 '문학적 저널리즘'이 한가지 해법으로 등장했지만 본질적인 해결책이 되긴 어려울 듯 보입니다. 치열하게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책 한 권 달랑 읽은 조잡한 지식으로 당신에 대해 너무 왈가왈부 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당신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군요. 번역투의 문장을 싫어하는 까닭에 외국 소설을 꺼려하는 편입니다만, 당신의 소설은 꽤 괜찮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더군요. 찾아볼게요. 아참! 당신 역시 번역의 한계를 질책하셨더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 책 <전설의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는 제법 깔끔한 편입니다. 무리없이 읽히는 게 번역자의 노고가 컸던 것 같습니다. 당신이 배로 낳은 '자식' 대신으로 여겼다는 당신의 '책'을 들고 또 다시 찾아올게요.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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