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오현종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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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제임스 본드걸 : 우슐라 엔드레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난 007 시리즈물을 단 한편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 네이버가 22개의 시리즈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것을 훑고서야 제목이 익은 게 몇 개 보이는 정도다. 가끔씩 TV에서 방영되던 더빙물이 내가 아는 007의 전부다. 원래 선악을 뚜렷이 구분한 후 선의 해피엔딩이라는, 결말이 뻔한 영화를 지루해 하는 편이다. 게다가 반공의 색채가 그득한 체제홍보용 선전물이라면 더더욱 내 관심 밖이다. 그러나 난 제1대 본드 역을 맡았던 이가 <더 록>에서 텁수룩한 수염의 쿨한 탈옥수, 숀 코너리라는 사실을 안다. 기름을 잔뜩 묻혀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모습이 인상적이던 피어스 브로스넌도 꽤 오랫동안 제임스 본드였다는 사실도. 그런데 이럴 수가. 단 한 명의 본드걸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이 왜 거기, 그러니까 제임스 본드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그들의 임무가 무엇이었는지. 황톳빛 태양에 그을린 해변에서 007과 진한 장면을 연출하던 그녀들의 실루엣만 얼핏 기억 날 뿐이다. 서둘러 007 메인 홈피에 들러 확인한 결과, 그녀들의 숫자는 22개의 시리즈물을 통틀어, 놀라지 마시라, 자그마치 75명이다. 한 명당 약 3편 정도를 맡았던 제임스 본드역의 남자배우에 비해 007본드걸은 한 편당 4명꼴이다. Holly shit!!

 “본드걸은 원래 일회용이야. 한번 사랑받고 퇴출당하는 운명이라고.”(p.46)


데니스 리차드, 소피마르소

  이 쯤 되면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의 스토리가 왜 내게 특별히 다가왔는지 대강의 설명이 될 수 있을게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그토록 수많은 본드걸이 있었고, 그녀들도 ‘무엇’인가를 했을 텐데, 왜 단 한번도 ‘주목’받지 못했는가? 전(前)편의 본드걸은 왜 매번 후속편에선 ‘퇴출’당하는 것일까? 어느 누구도 그녀들의 뒷이야기를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들의 후일담을 담고자 했던 이 소설에 강한 흥미를 느꼈다.

   설핏 페미니즘 소설로 볼 수도, 아니면 조금 특별한 소재를 빌려온 통속적인 연애소설로 치부할 수도 있는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비교적 단순하고 명확해 보인다. 왜 본드걸은 매번 ‘퇴출당하는 운명’인 것이냐고. 왜 본드걸은 본드의 욕망을 채워주는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냐고, 이 소설은 강하게 반문하는 것이다.

  “007 제임스 본드의 연인 본드걸. 스파이에게 여자는 필수지.”(p.16)

   007이 본드걸을 통해 보여주는 건 “섹스, 어드벤처, 판타지뿐.”(p.42) 그래서 본드걸, ‘그 자체’를 보여주겠다는 것이 이 소설의 고갱이다. 본드에게 배신당한 본드걸 미미양이 제임스 본드를 ‘알고자’ 스파이가 되길 작정하지만 끝에 가서는 자신에 대해 ‘알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모험’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본드걸 미미는 스파이가 돼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러나 종국에는 스파이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당당히 본드 앞에서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난 본드걸 미미, 013, 스파이야. 당신은 날 몰라.”(p.208) 남근주의 마초남들의 단골 경구가 아니던가. ‘당신은 날 몰라.’


에바 그린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소설은 ‘통속적인’ 수준의 ‘연애소설’ 정도로 치부될 수도 있다. 소설의 종반부에 와서야 남성주의의 전복이 시도되나, 그 태도는 ‘예상할 수 있는 수준’ 을 벗어나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 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비극적인 관계를 회복할 길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그저 서로의 다른 지점을 확인할 수 있을 뿐. “당신은 날 몰라.”

   그저 007이 지니고 있는 플롯(마초이즘, 선악의 이분법, 반공주의 등)이 ‘큰’ 탓에 오현종의 스토리텔링이 ‘작게’ 느껴졌을 뿐, 쉬엄쉬엄 읽을거리로는 준수한 편이다. 본드걸의 후일담이라니, 소재만으로도 ‘신선미’가 느껴지는 소설이 아닌가. 그래서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소설은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과도 같아서 그 소설이 나오고 난 뒤에야 '아니 여태까지 이런 소설이 없었단 말이야?'라는 반응을 낳는다. 이를테면 이 소설이 그렇다.”(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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