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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망각의 책 ㅣ 문학사상 세계문학 13
밀란 쿤데라 지음 / 문학사상사 / 1992년 11월
평점 :

1. 프라하의 봄
“일반적으로 ‘프라하의 봄’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이런 일들의 마지막 시기를 말한다.
목가를 지키던 자들은 자신들의 아파트에 설치되었던 도청기를 떼어낼 수밖에 없었으며, 국경은 개방되었다.
바흐의 위대한 악보로부터 여러 가지 음이 달아났고 자신의 음색을 노래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믿은 수 없을 만큼 활기찼고, 흡사 카니발과도 같았다. 전 지구를 위해 위대한 푸가(fuga)를 쓰고 있던 소련은 음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
1968년 8월 21일, 소련은 보헤미아에 50만 대군을 파견하였다. 이에 따라 약 120만 명의 체코인이 나라를 떠났으며, 남은 사람들 중에서 약 50만 명이 직장을 버리고, 인간에서 멀리 떨어진 벽촌의 공방, 외딴 구석의 공장, 트럭의 운전석 등, 요컨대 그들의 말소리가 어떤 사람의 귀에도 들리지 않을 장소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꺼림칙한 추억의 그림자가 복고된 목가로부터 국민들의 마음을 이탈시키는 일이 없도록 할 필요가 있었고, ‘프라하의 봄’과 소련군 탱크의 진입이라는 오점이 아름다운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의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8월 21일의 기념일에 대해 언급하는 일이 없고, 자신의 청춘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던 사람들의 이름은 마치 학교 숙제 속의 틀린 부분처럼 꼼꼼히 지워지고 말았던 것이다.“(p.26)
2. 서울의 봄
서울에도 프라하를 닮은 봄이 있었다. “인간들이 자신의 청춘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킨 것”(p.25)으로부터 프라하의 봄이 찾아왔다면, 서울은 제왕에게 버림받은 2인자의 권총으로부터 온 게 다를 뿐.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죽였다. 18년 동안이나 계속됐던 일인독재의 비참한 결말이었다. 긴급조치 등 유신 하에 신음하던 민중들은 ‘민주주의’를 열망했다. 12월 12일, 전두환이라는 또 다른 군부세력이 박정희 사후를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자유를 향한 요구는 쉬이 사그러지지 않았다. 서울의 봄이 온 것이다. 그러나 서글프게도 ‘서울의 봄’이 쏟아내는 요구를 하나의 그릇으로 담아낼 수 있는 정치적 결사체가 우리에겐 없었다. 당시 유력한 지도자로 평가받던 YS, DJ는 각자의 셈법에 빠져 사태파악을 하지 못했다. 민주화 시위가 잠시 주춤한 사이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세력은 5*17 비상계엄확대실시를 단행한다. 그리고 5*18이 터졌다.
3. 제5공화국, 서울의 봄을 짓밟다.
프라하에 탱크로 입성했던 소련군처럼 신군부세력은 서울의 봄을 역사에서 지워낼 필요가 있었다. 두 가지의 방법이 동원됐다. 역사를 조작하는 것과 기억을 없애 버리는 것. 역사의 조작은 그동안 잘 길들여놓은 언론에 의해 주도됐다.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은 5*18을 “고개의 내리막길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고 그 동쪽 너머에 ‘무정부 상태의 광주’가 있다”고 썼다. ‘새 역사 창조의 선도자 전두환 장군’(경향신문), ‘역사의 혼이 키워 낸 신념과 의지의 30년’(중앙일보), ‘우국충정 30년’(한국일보) 등 전두환을 향한 용비어천가가 지면 곳곳에 난무(亂舞)했다. 80년 4월 전두환 중정부장서리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전직 언론인 허문도씨가 군부와 언론계를 누비며 언론인 숙정 계획을 거의 마무리함으로써 가능해진 일이었다.(고종석 외, <기자로 산다는 것>, 호미출판사 참고) 1986년 <말>지가 폭로한 ‘보도지침'에서 알 수 있듯, 그 시절 역사의 왜곡은 주로 ‘언론 길들이기’에 의해 이루어졌다.
기억을 없애버리기 위해 동원된 수법은 이른바 ‘3S정책’이었다. Screen, Sports, Sex가 대중에게 보급됐다. 미디어는 마사지라고 했던가. 1가정, 1 TV 시대가 열리자마자 스크린엔 프로 스포츠가 중계되고, VTR에서는 포르노 테이프가 돌아갔다. 골치 아픈 투쟁의 기억 대신 즉흥적 자극이 대중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망각’은 ‘웃음’의 코드를 미디어로 주입함으로써 가능했다.
“악마를 ‘악’의 추종자라 생각하고, 천사를 ‘선’의 전사로 여기는 것은 천사들의 선동을 받아들이는 거이 된다. 사실은 분명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법이다.
천사들은 ‘선’이 아니라 거룩한 창조의 추종자이며, 반대로 악마는 신의 세계에 대해 합리적인 의미를 인정하지 않는 자이다.
이 세상에 선이 있다고 해서, (어릴 적에 내가 믿고 있었던 것처럼) 천사들이 악마들보다 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양자가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 세상에 트집 잡을 여지가 없는 의미(천사들의 권력)가 남아돌도록 많다면, 인간은 그 무게에 짓눌려서 죽어 버리고 말 것이다. 또 이 세상이 일체의 의미를 잃는다면(악마들의 천하), 인간은 역시 살아 남을 수 없게 된다.
가정된 의미, 이른바 사물의 주어진 질서에서 벗어난 사물들은 우리에게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므로 웃음은 본래 악마의 영역에 속한다.
(중략) 그래도 천사들은 하나의 성과를 얻었다. 그들은 의미론적인 기만으로 우리를 속인 것이다. 웃음의 모방과 본래의 웃음(악마의 웃음)을 가리키는 데는 한 가지 말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똑같은 한 가지의 외면적 표현이 정반대인 두 가지의 내면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두 가지 웃음이 있는데도 그것을 구별할 말이 없는 것이다.“(pp.95-96)
4. 민주주의의 봄은 언제 오려는가.
역사가 조작되고 망각이 강요되던 시기. 이 시기를 끝내 기억하려던 사람들이 있었던 건 축복이었다. 리영희가 있었고, 문익환이 있었고, 함석헌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을 ‘투쟁’으로 승화시켰던 수백만의 노동자, 학생, 농민, 빈민들이 있었다. 국가보안법의 탄압 속에서도 자기주장을 굽힐 줄 몰랐던 그들에 의해 87년 6월이 열렸다. 서울의 봄, 아니 민주주의의 봄을 맞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미렉은 권력에 대한 인간의 투쟁이란 바로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라 말하곤 했다.”(p.10)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민주주의의 봄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4년에 한 번씩 대통령을 뽑지만, 5년에 한 번씩 국회의원들과 악수를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순 없다. 문민정부를, 국민의 정부를, 참여정부를 뽑았지만 오늘의 삶은 어제와 그다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외려 빈부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이에 따라 상대적 박탈감만 가득이다.
87년 이후 얻은 ‘자유’는 ‘소비의 자유’로 협소해졌다.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소비의 자유’가 자유의 내용 중 최초로 국가에 의해 장려되는 것이라 하였다. 이전의 자유가 투쟁을 통해 획득하는 자유인 반면, 국가는 현재의 소비자 자유를 적극 권장한다. 이러한 자유는 두 가지 방식으로 역사를 지운다. 역사를 기억할 틈을 주지 않는 것과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없게 하는 것.

얼핏 만인에게 두루 적용되는 것으로 보이는 소비자 자유는 사실은 소비를 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인간을 분류한다. 소비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내 탓’이다. 남들과 똑같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내가 분발해야 한다. 내 이웃의 세련된 옷과 값비싼 차를 좇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벌지만 사실 부와 빈의 격차의 그리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힘겹게 벌어 남들과 똑같은 옷을 구입해 거리에 나왔지만, 막상 그 거리에는 이미 또 다른 패션이 넘쳐난다. 그 패션을 따라잡기 위해 또 힘겹게 돈벌이에 나서야만 하는 악순환. ‘필요’는 자기 의지 밖에서 ‘창출’된다. 창출된 필요, 혹은 욕망을 채우느라 기억에 대한 투쟁 따위 할 겨를이 없다. 역사를 기억할 틈이 없는 셈이다.
소비자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이는 굳이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없다. 이들의 사치는 곧 권력이다. 예전의 권력이 ‘역사를 조작하는 힘’에서 비롯됐다면, 지금은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이 곧 힘이다. 자본이 만드는 온갖 재화와 서비스는 이미 그것의 ‘사용가치’ 이상의 가치를 획득했다. 바로 이 재화를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힘.’ 명품 핸드백을 옆구리에 걸치고 거리를 누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권력자다. 외제 스포츠카에 섹시한 애인을 태우고 도로를 누비는 그 또한 이미 권력자다. 이들은 역사를 기억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저 현재의 소비자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게 최선의 ‘민주주의’다.

이제 봄은 국가에 대항한 투쟁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국가는 외려 자유를 적극 권장하는 편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자유’가 ‘현재의 소비’에만 갇혀 있는 한 말이다. ‘소비자 자유’가 망각의 기제다. 이제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은 자유의 외연을 확장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소비자 자유 너머의 자유가 존재한다는 사실, 외려 소비자 자유가 그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우리가 소비의 자유에 탐닉하고 있는 사이, ‘시사저널’의 금창태 사장은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 웰빙 열풍에 힘입어 참살이 식품 소비에 몰두한 사이 아마존은 녹색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기억하라. 우리의 소비가 언론을, 환경을, 그리고 ‘자유 본연’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휴블이 말하였다.
「민중을 일소하려면, 먼저 그들의 기억을 지워야 해. 그래서 민중의 책*문화*역사를 파괴하는 거야. 그 다음, 다른 사람을 시켜서 새 책들을 쓰게 하고, 새 문화를 만들어 내게 하고, 새 역사를 지어내도록 해야 하지. 그러면 얼마 안 가서 민중은 현재의 자신과 과거의 자신을 잊어버리기 시작할 거야. 그리고 주변의 세계는 그보다 더 빨리 그들을 잊어버리게 되지.」“(p.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