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봄은 그리 달가운 계절이 아니다.
음~ 봄이구나.
조심스레 감싸주는 따사로운 햇살이 봄이 왔음을 알려 주고, 여전히 겨울의 삭막함이 남아 있는 산과 들에서는 올망졸망 튀어나는 새파란 새싹이 봄을 알려 준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도 봄을 알리고, 제비 또한 예년과 같이 제 역할을 잊지 않는다. 봄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마음 또한 봄이 왔음을 알린다.
내게도 어김없이 봄은 왔다. 뒷머리에 내려앉은 햇살의 따사로움에 봄이 왔음을 알고, 톡톡 튀어 나오는 새파란 싹을 보며 봄이 왔음을 안다. 또 하나. 잡생각이 많아진 것을 보니 봄이 온 것이 틀림없구나.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봄의 전령사를 통해서 봄을 전해 받는다. 하지만 봄이 왔음을 뼈저리게 실감하는 것은 어이없게도 잡생각이 많아졌다는 생각을 통해서다.
잡생각이란 말 그대로 잡다한, 수많은 생각들이다. 두서도 없고 결론도 없는 생각들. 화두랄 것이 없으니 이런 저런 생각들이 난데없이 나타났다가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다.
오래 전에 헤어진 남자 친구 얼굴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시간들. 흔히들 추억이라 부르는 그 시절 일들. 그 사람을 사랑했고, 행복했던 일들도 많았을 텐데...... 힘들었던 시간도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 떠오르는 건 단순한 기억들 뿐. 아무런 느낌이 없다. 무미건조한 일상처럼 추억을 떠올리는 것에 아무런 감흥이 없다. 우리 정말 사랑하긴 했을까?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했던 일, 극도의 외로움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던 고시원에서의 생활, 친구와 함께 했던 하숙 생활.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한 선생님께 호되게 야단맞았던 일까지 문득 문득 떠오른다.
봄날에 떠올리는 이런 잡생각들은 온통 과거의 기억 창고에서만 튀어나온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나 곧바로 들이닥칠 내일을 위한, 좀 더 유익한 생각들은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다.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진다면 추억을 떠올리게 되는 여유로운 봄날이라고 여기겠지만, 아픈 흔적을 남기는 봄날의 잡생각들은 그리 달가운 것이 아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생각들이 바로 이 시기에 나타나는 잡생각들의 공통점이다. 봄날의 잡생각은 슬픈 혹은 실패한 과거를 떠올리게 해서 나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황량한 겨울 뒤에 신선한 희망처럼 다가오는 봄날을 두 팔 벌려 환영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만물이 회생하는 싱그러운 봄날에, 난 이렇게 무기력한 생각에 빠져있다니 한심하다. 봄을 장식하는 수많은 생기발랄한 수식어들이 내 것이 될 수는 없을까? 자문하고 또 자문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