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 위기의 시대를 돌파해온 한국인의 역동적 생활철학
탁석산 지음 / 창비 / 200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가난이를 등에 업고 산다. 끼니를 굶거나 길바닥에서 잠을 청해야하는 정도는 아니다. 아담한 방이지만 몸을 뉘일 공간이 있고, 가끔이지만 책을 한 권씩 구입할 여유도 있다. 내 자신을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건, 돈을 아끼기 위해 몇 킬로나 떨어진 마트에 가서 샴프를 사오거나 먹고 싶은 걸 참아야할 때이다. 그리고 생리대를 아껴 써야 할 때 약간은 연민을 느낀다. 사실 가난하게 사는 게 몸에 익은 터라 난 가난을 잘 모른다. 며칠 전 “넌 가난이랑 잘 어울려.”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서야 골똘히 생각을 해보았다. 부유하게 사는 내 모습, 왠지 어색하다.

 

가난을 가난으로 여기지 않는 건(=괴로워하지 않는 건) 어쩌면 내가 가난을 택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원한다면 부유하게도 될 수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돈을 원했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윤택한 생활을 했을 테다. 내게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젊음과 건강이 아직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박하게 사는 건, 단지 소박한 게 좋아서다. 욕심을 내는 일이 나는 피곤하다. 욕망을 채웠을 때 얻는 쾌감보다 욕망을 채우거나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과 책임감의 부담이 더 크다. 그래서 나는 하루 평균 2시간 일하며 소박하게 살더라도 편안한 마음으로 모닝응가를 할 수 있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창비, 2008)의 저자 탁석산에 따르면 이런 나의 생활태도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모습 중 하나다. 탁석산은 현대 한국문화의 특징으로 현세주의, 인생주의, 허무주의 셋을 꼽는다. 한국인들은 초월적, 내세적 세상을 믿지 않는다. 불교, 기독교도 해탈하거나 천국에 가는 게 목적이 아니라 현생에서 복 받는 수단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걸 믿다보니 추상적, 관념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고 측정하기 쉽고 눈에 잘 보이는 아파트 평수, 학벌, 외모를 중시한다. 또 사후세계란 없고 이 세계가 유일하니, 이왕이면 즐길 것 다 즐기자는 인생주의를 띈다. 마음껏 마시고 즐기는 음주가무가 발달한 배경이다. 좋은 점도 있다. 현생에서 최대의 행복을 추구하다보니 그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 경제개발에 도움을 주었다. 인생을 허무한 것으로 보는 경향은 실패하거나 좌절했을 때 마음 속 깊이 평안을 유지해 스스로를 방어하는 기능을 한다. “인생 뭐 별거 있어?”하면서 술과 함께 털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뿐인 세상에, 한번뿐인 인생, 인생은 허무한 것이기에 인생을 즐기자.’ 이것이 한국인의 마인드란다. 이 마인드를 현실에서 실현시키는 방법론이 실용주의다. 한국의 실용주의는 ‘유용성은 좋은 것이다.’로 표현할 수 있다. 인생의 즐거움을 최고의 가치로 보는 현재는 “인생에 유용한 것이 좋다.”가 일반적이지만 시간이 지나 사람들의 가치관이 변하면 ‘인생’대신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식 실용주의에 따르면 목숨을 걸고 지켜야할 가치란 없다. 뭐든지 도구나 방편일 뿐이다. 탁선산은 그 예로 박정희 집권 시절 국민들이 독재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고 본다. 먹고 살기 위해 발전하기 위해 독재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80년대 민주주의로 대변되는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게 된 건 개발로 얻은 사유재산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통일도 당위적인 것이 아니라 인생의 즐거움 추구에 유용하냐 아니냐에 따라 추구되는 상황적 목표일뿐이다.

 

내 생활이 탁석산이 말한 한국문화의 프레임에 걸려드는 건, 사회적인 성공이 내 즐거움 추구에 유용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고, 가난하더라도 적게 일하고 베짱이처럼 노는 걸 한번뿐이 삶을 후회 없이 사는 방도라고 나 자신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 있어 그의 의견에 동의를 하고, 한국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그가 뽑은 4가지 키워드가 적절하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다소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겠다. 일단은 산업화, 민주화의 과정을 한국의 실용주의로 설명할 수 있냐는 건데, 국민들이 경제개발을 위해 독재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는 점은 논외로 치고서라도 산업화 이후의 민주화 요구를 한국만의 특성으로 보는 건 무리가 있다. 유럽은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유사한 시기에 겪었는데, 영국이나 프랑스의 경우 시민혁명이 일어난 데는 자본주의의 발달로 성장한 부르주아나 젠트리 계급의 역할이 컸다. 조선후기 상민들이 부를 축적하면서 양반직을 사거나 그들만의 문화를 생산하고 누리는 주체가 된 것처럼 경제력 획득이 정치적인 요구로 나아간 사례는 많다. 굳이 한국인들의 특성으로 볼 근거가 부족하다.

 

한국인의 특징으로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융합 사상을 얘기했는데, 그러면서 외국인과의 결혼이 늘고, 외국인 며느리를 가족처럼 받아들이고, 외국인들과 잘 지낸다는 근거를 들었다. 제노포비아가 신문을 장식하는 일이 흔한 요즘이라 그런지 억지스러운 감이 컸다. 아마도 저자는 외국인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는 게 우리에게 ‘유용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제노포비아’가 한국만의 특수한 현상이라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사실 ‘단일민족’의 한국인이 누구보다도 ‘집단주의’, ‘배타성’이 강하고, 외국인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정반대의 얘기를 들어서인지 이 부분만큼은 공감하기 힘들었다.

 

한국인의 음주가무, 학벌, 서열, 종교, 역사, 과시, 체면, 성형, 빨리빨리, 경쟁, 화병, 국민정서법, 밤 문화, 다양한 음식, 시끄러움, 빠른 변화, 역동성, 아파트 등 다방면에서 근거를 끌어오다보니 핵심 키워드는 퇴색하고 사이비 철학관 냄새를 풍기는 점도 아쉽다. 나뿐만 아니라 이 중 한두 가지 해당사항 없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다 걸려든다! 사실 내 생활 태도는 전혀 전형적이지 않으며 수많은 어르신들로부터 지탄받는 것인데, 그리고 내 또래 친구들의 것과 상극인 경우도 많은데 어쨌거나 같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이 4가지 키워드로 묶인다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현세주의, 허무주의, 인생주의를 발현하는 실용주의의 방식이 같다는 거지, 각자의 생활은 개인 특유의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 거라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게 문제다. 다른 점들은 내 특유의 성격 문제고, 맞는 건 문화적인 현상이라고 얘기한다면 비판의 여지가 없다. 딱 철학관이다.

 

문화비평의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읽을 만하다. 4가지 키워드는 분명 한국문화를 꿰는 구슬들이다. 덧붙여서 ‘한국문화는 조선 문화가 아니다.’는 단절된 문화 진화론에 대해서도 생각해볼만하고 ‘문화재는 문화가 아니다.’는 편견?을 깨는 지식도 유용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세트 - 전3권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생애 첫 기억이라던가, 첫 사랑이라던가, 첫 애완동물은 오래 생각지 않아도 떠오른다. ‘처음’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첫 거짓말을 어떤가. 태어나서 처음 해본 거짓말은 무엇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가장 최근에 했던 거짓말도 생각나지 않는 걸 보니, ‘거짓말’자체를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가 보다. 뜬금없이 ‘거짓말’을 꺼내든 건 ‘첫 거짓말’이 의미하는 상징 때문이다. 거짓말을 한다는 건, 뭔가 알리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비밀이 있다는 뜻이다. 이는 부끄러움이나 죄책감이 될 수도 있고, 미움이나 증오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감정일 수도 있다.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아이에게 아빠가 “괜찮아?”고 물을 때, 아이는 “응,”이라고 대답함으로써 자신만의 세계, 비밀을 만든다. 첫 거짓말은 내면의 세계와 바깥세계를 경계 짓는 첫 걸음마라는 측면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 이후의 인간 삶은 내면과 바깥, 나와 타인 사이의 투쟁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1993년, 까치글방)은 우연한 사고로 가족과 떨어져 홀로 남게 된 아이가 가족을 그리워하며 타인을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갈망하며 평생을 보내는데, 사랑은 이뤄지지 않고 50년 만에 찾은 가족들에게 문전박대 당해 결국 혼자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다. (이건 순전히 자의적인 해석이다. 사실 훨씬 흥미로운 이야기다.) ‘나’는 온전한 개체이지만 한편으로 타인과의 사랑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불완전한 개체이고, 그럼에도 혼자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런 비합리적인 인간의 운명이 저자가 말하는 존재의 거짓말이 아닐까 한다.

 

“나는 너무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인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무의미하고 착오이고 무한한 고통이며 그것을 만들어낸 신의 악의가 상식을 초월한 발명품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외롭고, 고독한 삶에 지친 주인공 루카스 독백이다. 루카스뿐 아니라 그 주변의 인물들, 그의 가족들도 같은 운명을 견디며 산다. 전쟁과 혁명이라는 시대적 배경은 이런 비상식적인 인간의 운명을 더 극적으로 부각시킨다.

 

1부 ‘비밀의 노트’에서 할머니와 함께 사는 루카스는 자신이 늘 클라우스와 함께 있다고 상상하며 생활한다. 클라우스는 어릴 때 헤어진 쌍둥이 형제다. 루카스의 비밀노트가 ‘나’가 아닌 ‘우리’의 관점에서 쓰인 것도 이 때문이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즉 혼자이지만 결코 혼자이고 싶지 않은 인간의 모습이 존재의 첫 번째 거짓말이다. 루카스가 했던 ‘욕설’,‘폭력’,‘굶주림’, ‘사랑’,‘동정’으로부터 덤덤해지려는 단련은 인간이 태생적으로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지 잘 보여준다.

   

2부 ‘타인의 증거’에서 루카스는 야스민이라는 여인네가 낳은 기형 아이를 돌본다. 걸음마와 책 읽는 법을 가르치고 아이를 위해 산에서 내려와 소도시로 이사를 간다. 아이가 친구를 사귈 수 있게 서점에 또래 친구들도 불러 모은다. 하지만 아무리 아이에게 잘 해주어도 아이는 루카스가 곧 자신을 버릴 것이라 생각한다. 못생기고 기형인 자신보다 금발의 멋진 가족이 루카스에게 더 잘 어울려 보여서다. 아이와 루카스는 서로 사랑하지만 끊임없는 불신에 아이는 괴로워하고 결국 루카스의 곁에 남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 루카스가 사랑했던 여인 클라라는 자신의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느라 루카스는커녕 자기 자신도 돌보지 않는다. 서로 사랑을 해도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전쟁과 혁명의 시절이라는 시대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타인이 ‘내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갖는 불신과 걱정, 염려는 둘을 반드시 떼어놓고야 만다. 결코 타인과 하나가 될 수 없는 인간, 이것이 바로 존재의 두 번째 거짓말이다.

 

 

존재의 세 번째 거짓말은 무엇일까. 이것을 찾는 것보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1,2,3부에 등장하는 ‘비정상적’인 사랑들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인간이 처한 존재의 아이러니한 상황은 인위적인 ‘사회’에 의해 더욱 돋보이는데 바로 이 비정상적인 사랑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나 누구와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없는지 결정된 윤리가 있다. 신부님과 가난한 여자아이, 아버지와 딸, 가정이 있는 남자와 처녀, 이복형제, 남성과 남성, 동물과 인간사이의 사랑은 윤리에 어긋난 금기된 사랑이다. 이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사회질서를 해친다는 이유로, 본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끊임없이 누군가를 갈구하는 사랑이 인간 존재의 본성이고 운명이라면 누구와 사랑하든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일 텐데 사회는 이런 자유를 인간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근친상간이 기형아를 낳고, 여성만이 출산을 할 수 있다는 생물학적인 사실이 친족간의 사랑과 동성간의 사랑이 비정상적임을 뜻하는 걸까. 자연스런 감정임에도 사회 유지의 근간인 ‘약속’을 깨뜨린다는 이유로 불륜과 종교인의 사랑을 금기하는 건 합당한 일일까. 이유가 무엇이든 아무나 사랑할 수 없다는 비극적인 사실이 존재의 세 번째 거짓말이 아닐까 싶다.

 

사회적 통념, 관습을 넘어서는 인간 본래 존재에 대한 고찰답게 등장인물에 ‘선’과 ‘악’이라는 낙인이 없다. ‘선’, '악‘이라는 개념도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적 통념이라 여기에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불륜으로 한 가정을 파탄 냈지만 그의 자식을 데려다 정성들여 키우는 안토니아, 바람난 남편을 죽이고 자식을 돌보지 않는 엄마, 근친상간으로 이모를 배신한 야스민, 사랑하는 누나를 죽인 빅토르등 사랑 때문에 벌어진 일들은 분명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지만 한편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바로 이 장면 때문이다. 이복동생을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안토니아의 말에 클라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도 내 아버지를 사랑해서는 안됐어.’ 그래. 누가 감히 ‘사랑’에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비록 우린 사회적 룰에 따라 ‘선’과 ‘악’의 이분법 안에서 살아가지만, 전쟁 같은 상황 사회적 룰이 망가진 상황, 즉 인간 본연의 존재론적인 상황 말고는 아무것도 없을 때를 가정해보면 우리에겐 타인과 자신에 대한 ‘사랑’밖에 없다는 사실,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라는 사실만 남는다. 

 

이렇게 말해놓고보니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간만에 물만난 고기마냥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해줬던 책을 너무 곡해해서 보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지나치게 관념적, 추상적으로만 인간을 본 것도 같다. 그러나 인간이 같은 아이러니를 공유하고 있다는 이 관념적 사실은 타인을 느슨하게 대하라는 설득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요즘 우린 가십에 목 말라하고 자신보다 남의 일에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같은 지평 위에 서 있는 사람끼리 돌 던져봤자 그 돌은 다시 내게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남을 낙인찍기 전에 남을 보는  '선','악'의 스펙트럼을 넓혀보는 게 좋겠다. 그게 내가 비난의 돌을 피하는 방법이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일 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헬프 (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테이트 테일러 감독, 비올라 데이비스 외 출연 / 월트디즈니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1

요즘 애들은 살색을 살구색이라 부른다. 인종마다 살의 색이 다른데, 우리의 피부색만을 ‘살색’이라는 고유어로 부르는 게 자문화중심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차별이나 멸시의 의도가 담긴 이러한 단어들이 하나씩 순화되어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환경미화원’이나 ‘도우미’같은 이름이 그렇다. 실질적인 처우는 별반 달라진 게 없다하더라도 단지 호칭을 바꾸는 것만으로 사람들 의식 속에 형성된 이미지를 변화시켜 결국 실질적인 대우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호칭 혹은 언어의 힘은 그만큼 대단하다.

 

그런 의미에서 난 ‘인종’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먹은 것이 꽉 막힌 것 같은 체한 느낌이 든다. ‘인종’의 뜻을 풀어보면 그저 ‘인간 종’일 뿐 어디에도 폄하하는 의도는 없다. 어쩌면 가장먼저 연상되는 단어가 ‘인종차별’이고, 억압받는 흑인의 이미지가 퍼뜩 떠올라서일지도 모른다. 수도 없이 보고 들었는데도 말이다. 아니면 ‘인간의 종’을 구분하는 이 단어 자체에 불쾌감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원래 차별은 차이를 자각하는 일에서 시작한다. 물론 차이를 자각하는 모든 경우가 차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차이의 자각 없는 차별이란 없다. 차별의 근원, 배후자가 바로 ‘인종’이라는 단어가 아닐까 의심하는 근거이다.

 

 

‘헬프’는 내가 그리도 불쾌해하는 단어, ‘인종’에 관한 영화다. 1963년 흑인분리정책으로 화장실마저 따로 써야했던 시절의 미국이야기다. 미국이 한창 경제성장 가도를 달릴 때 교외에 사는 중산층 백인여성들은 흔히 흑인 가정부를 뒀다. 가정부는 음식, 청소부터 아이양육까지 도맡았다. 일생동안 17명의 백인아이를 돌봤지만 정작 자신의 아들은 사고로 잃은 ‘에이빌린’과 주인집의 화장실을 몰래 썼다는 이유로 쫓겨난 ‘미니’가 흑인 가정부의 손에서 자란 백인 아가씨 ‘스키터’와 함께 사회에서 금기하는 얘기를 책으로 펴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물론 그 이야기는 백인과 흑인의 이야기 즉 ‘인종’이야기다.

 

사실, 단어에서 오는 거부감을 넘어 나는 ‘인종 이야기’에도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되도록 인종에 관한 책이나, 영화를 접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정도다. 지인들과 함께하는 자리라 어쩔 수 없이 뮤지컬 ‘헤어스프레이’나 ‘멤피스’를 봐야했을 때도 그리 달갑지 않았다. 아마도 그놈의 ‘해피엔딩’때문일 것이다. 서사가 있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렇듯이 이야기가 위기, 절정에 다다르면 갈등의 수위가 최고조에 이른다. 갈등이 해결되면서 긴장도 풀리고 그 속에서 카타르시스도 느낀다. 사랑하는 남녀가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사랑을 되찾으면 극장을 나오는 나도 충만한 기분이 든다. 그런데 그 해피엔딩이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라 ‘인종갈등’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어떻게 저렇게 ‘쉽게’ 해소된단 말인가. 춤으로, 노래 몇 곡조로, 흑인 여성과 백인 남성간의 사랑으로 ‘인종갈등’은 해결되지 않는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카타르시스만 남겨주는 작품들. 현실은 그게 아닌데. 유희로 웃고 넘길 문제가 아닌데. 아직 끝난 문제가 아닌데.

 

지난달 슈퍼에서 과자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던 흑인 소년이 자경단의 총에 맞아 죽은 사건이 있었다. 어둑한 밤길, 소년은 후드티의 모자를 뒤집어쓰고 길을 걸었고 이를 수상하게 여긴 자경단이 뒤를 좇았고, 겁먹은 소년이 뛰자 자경단이 총을 쏘았다. 그는 정당방위 판결을 받아 기소되지 않았다. 며칠 전 오바마 대통령이 이에 대해 언급했다가 ‘인종’문제로 확대될 뻔하기도 했다. 지난해는 자기 집 문을 열지 못해 문 앞에서 서성이던 흑인 교수가 이웃의 신고로 달려온 경찰관에게 무단가택침입 혐의로 체포당할 뻔했다. 이런 문제가 심심찮게 일어나지만 그때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인종’이슈를 피해가는 모양새다. 그만큼 미국사회에서 아직은 인종문제가 뜨거운 감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영화 ‘헬프’의 시대인 1963년과 지금은 질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찝찝한 문제를, 양쪽 모두 불편해할 문제를 굳이 꺼내기가 두렵다. 내가 ‘인종’이라는 단어를 꺼려하고 이것에 관한 작품을 보기 싫어하듯 말이다.

 

그렇담, 난 왜 먼 나라 이웃나라인 미국사회 문제에 이리도 예민하게 반응을 할까.

 

#2

요즘 '다문화'가 다시 화두인 모양이다. 이자스민씨가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고 그 와중에 조선족이 잔인한 살인을 저질렀다. 이자스민씨는 지역구 의원이 아니라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어서인지, 아니면 공약이 친(퍼주기식) 다문화 가정적이라 그런지 그녀를 욕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 조선족이야 당연히 욕먹을 만한 일이지만. 문제는 범인이 욕먹는 게 아니라 조선족 나아가 외국인에 대한  혐오감이 확산된다는 거다. 정부는 지난 몇 년간 '다문화 다문화'노래를 부르며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제는 과연 다문화가 가능하기는 한가, 의문을 갖는 사람도 꽤나 있는 모양이다.

 

사실, 나와 다르게 생긴 사람에게 낯선 감정 혹은 두려움을 느끼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생전 처음 가 본 장소에서 신경을 곤두세우듯이, 생전 처음 보는 문화를 접했을 때 호기심과 동시에 거리낌을 느끼듯이 다른 생김새, 다른 문화, 다른 언어는 긴장감과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긴장을 풀고 적대감을 거두려면 시간과 노력, 잦은 접촉이 필요하다. 이건 일종의 본능이라서 단번에 해결되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직면한 더 큰 문제는, 다르기 때문에 외국인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게 아니라 외국인을 그의 국적에 따라 차별한다는 점일 것이다. "좌변에 상대국 GDP를 놓고 우변에 우리나라 GDP를 놓은 후 부등호에 따라 상대방의 나에 대한 우열을 판단하는.." 진중권씨가 독일 유학시절 타국에서 온 유학생들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판단하던 모습이었다고 한다. 한국인이 백인에게 호의적이고, 아시아인에게 박하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경제적 수준을 잣대로 상대의 가치를 결정하는 행위는 한국인에게 익숙하다. 차의 크기나, 아파트 평수로 상대의 태도가 달라진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우리에겐 다문화나, 인종차별의 문제도 결국 경제문제로 귀결된다. 역사나, 이념보다 돈이 최고다.  

 

요즘 세상에 경제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어쩌면 경제력이야말로 '다문화'로 가는 유일한 열쇠일지도 모른다. 흑인이 백인의 노예로 아메리카 땅에 끌려와 언어, 식습관 및 기타 문화가 같아질 정도로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오랫동안 함께 살았지만 미국사회에서 흑백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잦은 접촉이 있고 같은 문화를 가졌는데도 말이다!! 그건 자본주의사회에서 다수의 흑인이 미국사회의 하층민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나마 예전보다 대우가 좋아졌다고 평가를 한다면 흑인우대정책으로 흑인의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흑인 중 영향력 있는 인사가 많아져 즉 흑인의 경제력이 나아진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흑인이 할렘의 주인이고 범죄의 온상으로 지목받는다. 흑인이 백인만큼 주류사회에 진출한다면, 흑인의 영향력이 백인만큼 커진다면 후드티를 입고 밤길을 걷는 흑인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총에 맞아 죽거나, 그것이 정당방위로 판결이 나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자스민의 국회진출은 반길만한 일이다. 외국인 140만에, 저출산, 고령화로 외국인들의 유입이 더 많아질 것이 뻔한 현실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그들을 하층민으로 만들어 또 다른 할렘을 만들고, 외국인 혐오증에 떨면서, 그들을 범죄 집단으로 몰아가고, 또 외국인 흉악 범죄를 겪으면서 사는 것보다 사회 곳곳에 섞여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게 모두에게 유익한 길이다.  

 

그런데 경제력만 뒷받침되면 '다문화'는 가능할까. 난 아니라고 본다. 다시 처음에 했던 얘기로 돌아가 외모의 차이는 선천적인 것이며 시각적인 것으로 감출 수 없고 구별하기 쉽다. 이 말은 편을 나누기가 쉽다는 말이다. 그래서 민족은 정치 동원에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억지 같은 이야기 같지만 두 우두머리가 공존할 수 없다는 것도 다문화를 방해하는 요소다. 외국인이 우리보다 더 잘 산다면 외국인이 우리를 무시하고 우리가 더 잘산다면 우리가 그들을 무시할 것이다. '동등'한 상태로 균형을 유지하는 것보다 한쪽으로 기우는 것이 훨씬 더 평화적이기 때문에라도 사회는 한쪽으로 치우친 권력집중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평화로운 '다문화'사회가 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경제력도 필요하고, 접촉도 필요하고, 차별하지 않으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불가능한 건 아니다. 불가능할 만큼 어려운 일이다. 필요한 꼭 한 가지 자세를 뽑는다면 난 "예의"를 꼽겠다. 이건 '다문화'에 해당하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외국인에게든, 아이에게든, 어른에게든, 빈자든, 부자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설문조사원이든, 웨이터에게든, 의사에게든,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예의"를 갖춘 말, 행동을 한다면 '남'과 함께 살아가는 게 좀 더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상대를 ‘누구’라고 칭하기 전에 ‘인간’이기에 적어도 ‘인간’으로 대우를 해주는 거다. 하. 어려운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겨울 “나 뉴욕 갔다 왔어.”라고 말했을 때, 사실 이런 반응을 기대했다. “우와~ 부럽다.”, “어땠어?”, “뭐 봤어?” 그런데 친구는 이랬다. “무슨 돈으로? 얼마 들었어?”

'남자친구 있냐.'는 질문에 자신 있게 “네.”라고 대답했던 연애초기에는 사람들이 남자친구의 어떤 점이 좋은지 물어 주기를 은근 기대했고, 속으로 몇 몇 자랑거리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그러나 대게 사람들은 “남자친구는 뭐해?”라던가 “연봉이 얼마지?”라는 걸 더 궁금해 했다.

 

사람들의 욕망이 수렴하는 곳은 돈

사람들마다 욕망은 다르지만 욕망을 충족시킬 수단으로 돈만한 것이 없는 시대다. 한 물건은 많아봤자 두세가지 용도로 쓰이는 반면 돈의 용도는 가히 무한하다. 이 무한한 ‘가능성’ 때문에 돈은 교환수단의 지위를 뛰어넘어 사람들이 일생을 바쳐 추구하는 목적이 되었다. 여행이 어땠는지 보다 그 여행에 필요한 돈이 얼마인지, 남자친구의 성격보다 그의 능력에 관심을 보이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만약 모든 인간이 돈을 원한다면, 얼만큼의 돈을 가졌는지 돈을 얼마나 버는 사람을 만나는지가 그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이자 나의 위치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건 당연하다.

 

게오르그 짐멜은 이런 화폐경제가 인간의 정신세계뿐만 아니라 관계도 바꾸어 놓았다고 한다. 화폐경제 이전의 인간과 인간은 인격적관계에 놓여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외상이다. 외상은 손님이 언젠가 돈을 갚으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하다. 여기서 주인과 손님의 관계는 돈이 아닌 신뢰로 연결돼 있다. 그러나 오늘날 외상은 있을 수 없다. 아무리 단골이라해도 편의점에서 물건을 외상으로 구입하지 못한다. 이는 주인과 손님의 관계가 돈으로 엮인 구매자, 판매자로 단순화되며 비인격적이라는 의미다. 인간을 인간과 연결하는 건 바로 돈이다. 이런 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누구와도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비인격적인 관계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화려하고 변화무쌍한 도시에서는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과 인격적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건 무척 피곤한 일이다. 편의점에 들러서 담배 한 갑을 살 때, 주인이 담배가 몸에 나쁘니 피지 말라고 한다면 손님은 기분 나빠 다른 편의점으로 가거나 다시는 그 편의점에 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얼마나 많은 슈퍼가 있는데 슈퍼주인과 일일이 다 친분을 맺으려면 도시생활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람과 소음, 변화에 둘러싸여 사는 도시인들은 피곤함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비인격적인 관계를 원한다.

 

짐멜에 따르면 이것이 개인주의의 기원이다. 백화점, 영화관, 카페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지만 어느 누구도 말을 걸지 않으며 남에게 간섭하지 않는다. 이런 거리두기로 도시인들은 자유를 느낀다. 하지만 동시에 고독도 느낀다. 군중은 배경일뿐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고독을 치유하기 위해 도시인들은 가족을 찾는다. ‘도시인에게 가족은 도시의 삶 속에 관념으로 존재하는 시골 같은 공간이다.’ 하지만 가족도 고독을 완전히 없애주진 못한다. 대학, 취업, 결혼 등의 문제로 가족과 갈등한다. 간섭에 지친 이는 자기 방에 들어가 자유를 되찾는다. 물론 고독도 함께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 내 존재‘라고 했다. 초중고 교과과정을 통해 배웠던 그 긴 역사의 끝에 우리는 내던져진 사람들이다. 선대인들이 만들어 놓은 관습과 체제를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몸담고 살아야하는 것이다. 이런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자세야말로 상처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체제에 순응하고, 사회가 당연시 여기는 것들 즉 돈을 숭배하고 유행을 좇고 도시 생활을 하는 것에 익숙해져 왔다. 좋은 점수를 내지 못해 경쟁에서 탈락하거나 돈이 없어 유행을 좇아가지 못했을 때 상처받는 것조차 당연한 일로 치부되는 것 같다. 보통과 다른 가치를 추구할 때도 ’상처‘를 감수해야 한다. 왜 그래야하는지 물어볼 수 있는 일이다. 대학에 못 간 것이 상처 받을 이유가 되는 게 정상일까. 인간의 존엄성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려면 자유권이나 사회권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상처받지 않을 권리‘도 하나의 권리로 생각해봄직하다. 헌법에서 보장하는 게 아니라도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는 것만으로 괜찮다. 그전에 강신주의「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읽어보자. 우리가 왜 상처받는지 알아야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외칠 수 있다.

 

강신주의「상처받지 않을 권리」는 머리말의 제목인 ‘자본주의적 삶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에 관한 책이다. 돈, 도시, 유행, 도박과 매춘, 불안, 허영, 쇼퍼홀릭과 워커홀릭, 교환이라는 자본주의와 뗄 수 없는 개념들을 중심으로 자본주의가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어떤 곳인지 그리고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찰한다. 마지막으로 이 사회에서 우리가 상처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도 모색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컨슈머 키드 - 소비에 탐닉하는 아이들
애그니스 네언. 에드 메이오 지음, 노승영 옮김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6학년 음악 시간에 ‘섬집 아기’로 가창시험을 봤다. 노래를 부르면서 말도 안 되는 가사에 의아해했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아기를 혼자 집에 남겨두고 엄마가 섬그늘에 굴을 따러 갈 수 있는지. 그만큼 엄마가 바빴던 걸까. 대신 아기를 봐 줄 사람이 없었던 걸까. 아마도 그만큼 범죄가 없고 안전했다는 뜻일 게다. 혼자 집 보던 아기는 걸음마를 떼면 곧 친구들과 어울려 산으로 들로 놀이를 나간다. 엄마는 이제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조바심치며 모랫길을 달려오지 않아도 된다.

 

요즘 엄마들도 직장일 하느라 밖에서 하루를 보내지만 아이는 혼자서 집을 지키지 않는다. 여러 학원을 거쳐 집에 오면 할머니나 도우미 아주머니가 아이를 반긴다. 물론 엄마들도 아이의 안전에 주의를 기울인다. 엄마들은 아이 손에 휴대전화를 안겨주고 수시로 통화를 하고 위치 추적시스템으로 아이의 안녕을 파악한다. 나타나야할 장소에 나타나지 않으면 큰일이다. 위험한 세상, 어떤 함정이 아이를 노리를 있는지 알 수 없다. 한시라도 마음을 놓아선 안 된다.

 

밖에서의 놀이가 금지된 아이들에게 놀이가 허용된 공간은 집 안이다.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게 미안한 부모들은 업그레이드 된 휴대 전화나 게임기, 개인용 PC, 브랜드 옷을 사주어 아이가 삶에 만족하도록 만든다. 여중생 98%, 남중생 90%가 휴대 전화를 갖고 있다고 한다. 아이들 네 명 가운데 한 명은 6세가 되면 개인용 컴퓨터가 생기고 평균 3시간 이상 인터넷을 한다. 그들은 각종 스크린을 통해 친구를 사귀고, 친구와 게임하고, 정보를 얻고, 물건을 구입한다. 더 이상 테니스 체로 테니스를 치지 않고, 승마에는 말이 필요 없다. 집 안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

 

집 안에 갇힌 아니 스크린에 갇힌 아이들은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집 밖에서의 범죄는 줄어들었지만 집 안에서 새로운 형태의 범죄가 등장했다. 얼마 전 게임 레벨을 높이기 위해 집요하게 문자를 보내 친구를 자살에 이르게 한 대구중학생자살사건처럼 통신을 이용해 친구를 괴롭히는 일이 많아졌다. 페이스북 같은 소셜 네트워크에서는 특정인의 허점을 비방하고 놀림감으로 삼아 집단적으로 괴롭히는 사이버불링(Cyber bulllying)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스크린 안에서 청소년을 노리는 건 비단 친구들만이 아니다. 「컨슈머 키드」에서 말하는 오늘 날 아이들이 처한 가장 큰 문제는 아이들의 감성을 자극해 상품을 파는 마케팅 및 광고다. 영국에서 어린이 시장의 전체 규모는 991억 2000만 파운드나 된다고 한다. 어린이 시장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기업들은 아이들이 상당 시간을 보내는 TV, 인터넷을 통해 소비를 자극하고 있다. 문제는 어른을 설득해 아이에게 물건을 사도록 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을 자극해 부모에게 떼를 쓰는 방법으로 소비를 조장한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어른에 비해 쉽게 미디어의 영향을 받는다. 아이들은 이성적 사고 과정이 어른보다 훨씬 덜 발달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업들은 아이들에게 제품의 장점을 알리는 게 아니라 브랜드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쪽으로 광고를 만든다. 한 마디로 이성이 아니라 정서에 호소한다는 것이다.

 

실험이 이를 증명한다.

A집단에게 펩시콜라를 마시는 2분짜리 영상을 보여주고 B집단에게 다른 영상을 보여준 후 아이들을 불러 펩시콜라와 코카콜라 가운데 하나를 골라 마시게 했더니 62%가 펩시를 선택했다고 한다. 영국에서 펩시 판매량은 25%다. 코카콜라가 75%.

 

인터넷과 쇼핑에 중독된 아이들은 물질만능주의에 빠지기 쉽다. 이것이 저자가 갖는 궁극적인 문제의식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이 쏟아져 나오는 현실에서 물질로 만족을 얻기는 어렵다. 이는 실망과 좌절을 불러오고 곧 우울증과 폭력성, 반사회적 공격성을 키워 아이들을 행복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아이들에게 자유를 되찾아주기 위해 저자는 ‘기업가 정신’, ‘공감력’, ‘적응력’을 제시한다. 한 마디로 자기 자신에게 자부심을 갖고 돈이 아니라 꿈을 좇고 그 꿈은 ‘나’가 아니라 ‘우리’를 향해야 한다는 말이다.

 

불량 식품을 불매운동하고 공정무역을 장려해 지구촌의 타자를 배려하고, 돈이 아니라 호기심과 아이디어로 창업을 하고, 어린이 대표로 선출된 지역 구청장이 주어진 예산을 어린이를 위해 쓰는 사례들은 어린이들이 시장의 주객을 전도하는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저자가 이미 말했듯 스크린에 장시간 노출되고, 물질적인 것에서 만족을 얻고, 부가 인생의 목표이며, 더 많이 갖기를 원하며, 더 비만이 되기 쉬운 아이들은 저소득층의 아이들인 경우가 많다. 값이 싸고 달콤하면 건강에는 해롭더라도 손이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의 현실이다. 미국에서 저질 가공육을 만드는 한 기업의 간부는 “소비자가 유기농을 원하면 자신들은 유기농을 생산하는 쪽으로 갈 수 밖에 없으니, 바꾸고 싶다면 소비자가 바꿔라.”고 말했다. 변화는 필요하지만 변화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쪽은 저소득층이며 이는 그들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저자가 제시한 방법들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변화는 계층을 더욱 확고히 할 위험이 있다는 의미다. 그럼 어떻게 해야 아이들이 자유로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