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노화란 조금 더 더디게 진행될 필요가 있다. 요즘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남녀 불문하고 대략 80세 정도 된다고 했을 때, 정확히 반 가까이 살아온 나의 경우에 비춰보면 지금까지 지내온 세월만큼을 더 살기엔 몸의 노화가 너무 빨리 진행된다는 느낌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너무 긴 세월이 '여생'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죽음은 한순간에 이뤄지는 듯하지만 내 안의 많은 것들은 이미 사망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7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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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아였을 때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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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자라서 읽었다. '나를 보내지 마'는 책 소개만 훑고 공상과학 소설인 줄 알았다. 그래서 '우리가 고아였을 때'를 골랐다. 


처음 읽고 나서는 '음, 뭐지?' 싶었다. 짜임이 엉성한 털목도리 같다고 해야 하나. 흐름이 매끄럽지 않았다. 


챕터 대부분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가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예를 들어 '홍콩 술집에서 친구를 봤다. 지난달 런던에서 그 친구가 조만간 홍콩으로 간다고 했다.', '오늘 런던에서 친구와 커피를 마셨다. 홍콩에서 그 친구는 불행했다. ' 이런 식이다. 


그런데도, 이야기 자체는 흥미롭다. 상해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례대로 실종되면서 런던으로 돌아온다. 어른이 된 그는 탐정이 되고 부모를 찾으러 다시 상해로 떠난다.


특히 어린 시절, 아이의 눈으로 부모가 사라지던 날의 풍경, 집안의 분위기를 회상하는데 이는 사건 전말에 대한 힌트가 되기도 하지만, 후에 그 전말과 대비돼 더 극적으로 보인다. 


어린아이들은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보며, 어른인 우리는 그 시절을 얼마나 아름답게만 기억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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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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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은 10여년 전에 본 '달려라, 아비'와는 많이 다르다. 20대였던 작가가 30대가 되면서 마주하는 일상이 달라졌기 때문일까. 고시원에 살면서 편의점을 오가던 주인공이 이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모양이다. 30대가 됐지만 아직 가족을 꾸리지 않은 나로서는 아이의 학교 생활을 걱정하고 집에 집착하는 이런 이야기가 솔직히, 그리 와닿진 않는다. 


아이를 잃거나, 남편을 잃거나, 애완견을 잃거나, 대부분의 이야기가 상실에 맞춰져 있다. 이별한 사람이 어떻게 이후 시간을 받아들이는지 되새기는 식이다. 그런 면에서 소설에는 다음 장이 궁금한, 그런 사건은 없다. '죽음'은 이미 발생했고, 남은 사람이 감정을 추스른다고 할까. 감정만 남은 느낌이다. 그런데 그 감정도 신파 같았다면, 내 취향의 문제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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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가? 그 교수랑? 어머, 어떻게 그래? 타인이 아닌 자신의 도덕성에 상처 입은 얼굴로 놀란 듯 즐거워하고 있었다. 나도 잘 아는 즐거움이었다. -153p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가진 도덕이, 가져본 도덕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래. - 199p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울 땐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던지게 돼 있거든. -2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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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에 잠깐 교보에 들러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나온 격월간지 악스트(Axt)를 샀다. 문학지치고 잘 팔린단 말에 궁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3000원도 안되는 책값이 마음에 들었다. 어떤 글이 담겼길래 커피 한 잔값도 안된다 말인가 하는 생각. 


목록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정유정 인터뷰와 황현산의 글이었다. 특히 황현산의 '폐쇄 서사-영화 '곡성'을 말하기 위해'는 제목만 보고도 구미가 당겼다. 


정유정 인터뷰는 '종의 기원'에 관한 것인줄 알았는데 읽고나서 보니 정유정이란 작가에 대한 인터뷰에 좀 더 가까운 것 같다. 주로 무엇을 어떻게 쓰나, 무슨 생각을 하나에 초점이 맞춰진 것 같다. 


기억에 남는 몇가지를 꼽자면 '소설이 재미가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니 정유정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관념에 지배돼 이야기 전체를 보지 못할 때, 작가가 이야기를 장악하지 못했을 때, 이야기가 막히는 이유는 그 사람이 거기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같은 맥락에서 '어떻게 하면 필력이 좋아지나'는 질문에 "작가는 이야기의 형식을 장악해야 한다. 이 이야기를 어떤 틀 안에서 구현해내겠다고 결정했다면 그 형식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장래희망이 '꾼'이었다는 정유정은 어릴 적 이야기하는 법을 배운 얘기를 하며 이렇게 말한다. "만담꾼 두 사람이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천막 극장이었다... 가장 재미있었던 건 '흥부전'이다. 이 만담꾼들은 절대로 흥부가 가난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한 시간 내내 가난한 자만이 벌일 수 있는 온갖 궁상맞은 해프닝을 늘어놓는다."


작가의 의무에 대해선 "작가나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다만 변화이 징후를 반보 앞서 읽어내고 읽어낸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게 작가의 임무라고 여긴다."


기억에 남는 표현으로는, '꽃삽 하나 쥐고 알래스카 설원에 선 것 같다. 이 알량한 밑천으로 이 황량한 땅에 도시를 건설해야 한다는 막막함이 몰려든다"인데 정유정은 새 소설을 시작할 때 마다 이런 기분이 든다고 한다. 


일꾼의 기원: 일을 잘 한다는 것은, 업무의 전체를 볼 수 있고 그 전체를 이해하고 장악해야 하는 것이고, 일이 막힌다는 것은 그것을 잘 모르기 때문일테지. 나도 내일, 꽃삽 하나 쥐고 황량한 땅에 도시를 건설하러 출근해야 한다. 벌써 막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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