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프 (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테이트 테일러 감독, 비올라 데이비스 외 출연 / 월트디즈니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1

요즘 애들은 살색을 살구색이라 부른다. 인종마다 살의 색이 다른데, 우리의 피부색만을 ‘살색’이라는 고유어로 부르는 게 자문화중심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차별이나 멸시의 의도가 담긴 이러한 단어들이 하나씩 순화되어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환경미화원’이나 ‘도우미’같은 이름이 그렇다. 실질적인 처우는 별반 달라진 게 없다하더라도 단지 호칭을 바꾸는 것만으로 사람들 의식 속에 형성된 이미지를 변화시켜 결국 실질적인 대우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호칭 혹은 언어의 힘은 그만큼 대단하다.

 

그런 의미에서 난 ‘인종’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먹은 것이 꽉 막힌 것 같은 체한 느낌이 든다. ‘인종’의 뜻을 풀어보면 그저 ‘인간 종’일 뿐 어디에도 폄하하는 의도는 없다. 어쩌면 가장먼저 연상되는 단어가 ‘인종차별’이고, 억압받는 흑인의 이미지가 퍼뜩 떠올라서일지도 모른다. 수도 없이 보고 들었는데도 말이다. 아니면 ‘인간의 종’을 구분하는 이 단어 자체에 불쾌감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원래 차별은 차이를 자각하는 일에서 시작한다. 물론 차이를 자각하는 모든 경우가 차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차이의 자각 없는 차별이란 없다. 차별의 근원, 배후자가 바로 ‘인종’이라는 단어가 아닐까 의심하는 근거이다.

 

 

‘헬프’는 내가 그리도 불쾌해하는 단어, ‘인종’에 관한 영화다. 1963년 흑인분리정책으로 화장실마저 따로 써야했던 시절의 미국이야기다. 미국이 한창 경제성장 가도를 달릴 때 교외에 사는 중산층 백인여성들은 흔히 흑인 가정부를 뒀다. 가정부는 음식, 청소부터 아이양육까지 도맡았다. 일생동안 17명의 백인아이를 돌봤지만 정작 자신의 아들은 사고로 잃은 ‘에이빌린’과 주인집의 화장실을 몰래 썼다는 이유로 쫓겨난 ‘미니’가 흑인 가정부의 손에서 자란 백인 아가씨 ‘스키터’와 함께 사회에서 금기하는 얘기를 책으로 펴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물론 그 이야기는 백인과 흑인의 이야기 즉 ‘인종’이야기다.

 

사실, 단어에서 오는 거부감을 넘어 나는 ‘인종 이야기’에도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되도록 인종에 관한 책이나, 영화를 접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정도다. 지인들과 함께하는 자리라 어쩔 수 없이 뮤지컬 ‘헤어스프레이’나 ‘멤피스’를 봐야했을 때도 그리 달갑지 않았다. 아마도 그놈의 ‘해피엔딩’때문일 것이다. 서사가 있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렇듯이 이야기가 위기, 절정에 다다르면 갈등의 수위가 최고조에 이른다. 갈등이 해결되면서 긴장도 풀리고 그 속에서 카타르시스도 느낀다. 사랑하는 남녀가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사랑을 되찾으면 극장을 나오는 나도 충만한 기분이 든다. 그런데 그 해피엔딩이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라 ‘인종갈등’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어떻게 저렇게 ‘쉽게’ 해소된단 말인가. 춤으로, 노래 몇 곡조로, 흑인 여성과 백인 남성간의 사랑으로 ‘인종갈등’은 해결되지 않는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카타르시스만 남겨주는 작품들. 현실은 그게 아닌데. 유희로 웃고 넘길 문제가 아닌데. 아직 끝난 문제가 아닌데.

 

지난달 슈퍼에서 과자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던 흑인 소년이 자경단의 총에 맞아 죽은 사건이 있었다. 어둑한 밤길, 소년은 후드티의 모자를 뒤집어쓰고 길을 걸었고 이를 수상하게 여긴 자경단이 뒤를 좇았고, 겁먹은 소년이 뛰자 자경단이 총을 쏘았다. 그는 정당방위 판결을 받아 기소되지 않았다. 며칠 전 오바마 대통령이 이에 대해 언급했다가 ‘인종’문제로 확대될 뻔하기도 했다. 지난해는 자기 집 문을 열지 못해 문 앞에서 서성이던 흑인 교수가 이웃의 신고로 달려온 경찰관에게 무단가택침입 혐의로 체포당할 뻔했다. 이런 문제가 심심찮게 일어나지만 그때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인종’이슈를 피해가는 모양새다. 그만큼 미국사회에서 아직은 인종문제가 뜨거운 감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영화 ‘헬프’의 시대인 1963년과 지금은 질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찝찝한 문제를, 양쪽 모두 불편해할 문제를 굳이 꺼내기가 두렵다. 내가 ‘인종’이라는 단어를 꺼려하고 이것에 관한 작품을 보기 싫어하듯 말이다.

 

그렇담, 난 왜 먼 나라 이웃나라인 미국사회 문제에 이리도 예민하게 반응을 할까.

 

#2

요즘 '다문화'가 다시 화두인 모양이다. 이자스민씨가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고 그 와중에 조선족이 잔인한 살인을 저질렀다. 이자스민씨는 지역구 의원이 아니라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어서인지, 아니면 공약이 친(퍼주기식) 다문화 가정적이라 그런지 그녀를 욕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 조선족이야 당연히 욕먹을 만한 일이지만. 문제는 범인이 욕먹는 게 아니라 조선족 나아가 외국인에 대한  혐오감이 확산된다는 거다. 정부는 지난 몇 년간 '다문화 다문화'노래를 부르며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제는 과연 다문화가 가능하기는 한가, 의문을 갖는 사람도 꽤나 있는 모양이다.

 

사실, 나와 다르게 생긴 사람에게 낯선 감정 혹은 두려움을 느끼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생전 처음 가 본 장소에서 신경을 곤두세우듯이, 생전 처음 보는 문화를 접했을 때 호기심과 동시에 거리낌을 느끼듯이 다른 생김새, 다른 문화, 다른 언어는 긴장감과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긴장을 풀고 적대감을 거두려면 시간과 노력, 잦은 접촉이 필요하다. 이건 일종의 본능이라서 단번에 해결되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직면한 더 큰 문제는, 다르기 때문에 외국인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게 아니라 외국인을 그의 국적에 따라 차별한다는 점일 것이다. "좌변에 상대국 GDP를 놓고 우변에 우리나라 GDP를 놓은 후 부등호에 따라 상대방의 나에 대한 우열을 판단하는.." 진중권씨가 독일 유학시절 타국에서 온 유학생들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판단하던 모습이었다고 한다. 한국인이 백인에게 호의적이고, 아시아인에게 박하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경제적 수준을 잣대로 상대의 가치를 결정하는 행위는 한국인에게 익숙하다. 차의 크기나, 아파트 평수로 상대의 태도가 달라진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우리에겐 다문화나, 인종차별의 문제도 결국 경제문제로 귀결된다. 역사나, 이념보다 돈이 최고다.  

 

요즘 세상에 경제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어쩌면 경제력이야말로 '다문화'로 가는 유일한 열쇠일지도 모른다. 흑인이 백인의 노예로 아메리카 땅에 끌려와 언어, 식습관 및 기타 문화가 같아질 정도로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오랫동안 함께 살았지만 미국사회에서 흑백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잦은 접촉이 있고 같은 문화를 가졌는데도 말이다!! 그건 자본주의사회에서 다수의 흑인이 미국사회의 하층민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나마 예전보다 대우가 좋아졌다고 평가를 한다면 흑인우대정책으로 흑인의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흑인 중 영향력 있는 인사가 많아져 즉 흑인의 경제력이 나아진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흑인이 할렘의 주인이고 범죄의 온상으로 지목받는다. 흑인이 백인만큼 주류사회에 진출한다면, 흑인의 영향력이 백인만큼 커진다면 후드티를 입고 밤길을 걷는 흑인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총에 맞아 죽거나, 그것이 정당방위로 판결이 나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자스민의 국회진출은 반길만한 일이다. 외국인 140만에, 저출산, 고령화로 외국인들의 유입이 더 많아질 것이 뻔한 현실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그들을 하층민으로 만들어 또 다른 할렘을 만들고, 외국인 혐오증에 떨면서, 그들을 범죄 집단으로 몰아가고, 또 외국인 흉악 범죄를 겪으면서 사는 것보다 사회 곳곳에 섞여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게 모두에게 유익한 길이다.  

 

그런데 경제력만 뒷받침되면 '다문화'는 가능할까. 난 아니라고 본다. 다시 처음에 했던 얘기로 돌아가 외모의 차이는 선천적인 것이며 시각적인 것으로 감출 수 없고 구별하기 쉽다. 이 말은 편을 나누기가 쉽다는 말이다. 그래서 민족은 정치 동원에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억지 같은 이야기 같지만 두 우두머리가 공존할 수 없다는 것도 다문화를 방해하는 요소다. 외국인이 우리보다 더 잘 산다면 외국인이 우리를 무시하고 우리가 더 잘산다면 우리가 그들을 무시할 것이다. '동등'한 상태로 균형을 유지하는 것보다 한쪽으로 기우는 것이 훨씬 더 평화적이기 때문에라도 사회는 한쪽으로 치우친 권력집중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평화로운 '다문화'사회가 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경제력도 필요하고, 접촉도 필요하고, 차별하지 않으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불가능한 건 아니다. 불가능할 만큼 어려운 일이다. 필요한 꼭 한 가지 자세를 뽑는다면 난 "예의"를 꼽겠다. 이건 '다문화'에 해당하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외국인에게든, 아이에게든, 어른에게든, 빈자든, 부자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설문조사원이든, 웨이터에게든, 의사에게든,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예의"를 갖춘 말, 행동을 한다면 '남'과 함께 살아가는 게 좀 더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상대를 ‘누구’라고 칭하기 전에 ‘인간’이기에 적어도 ‘인간’으로 대우를 해주는 거다. 하.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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