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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세트 - 전3권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생애 첫 기억이라던가, 첫 사랑이라던가, 첫 애완동물은 오래 생각지 않아도 떠오른다. ‘처음’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첫 거짓말을 어떤가. 태어나서 처음 해본 거짓말은 무엇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가장 최근에 했던 거짓말도 생각나지 않는 걸 보니, ‘거짓말’자체를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가 보다. 뜬금없이 ‘거짓말’을 꺼내든 건 ‘첫 거짓말’이 의미하는 상징 때문이다. 거짓말을 한다는 건, 뭔가 알리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비밀이 있다는 뜻이다. 이는 부끄러움이나 죄책감이 될 수도 있고, 미움이나 증오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감정일 수도 있다.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아이에게 아빠가 “괜찮아?”고 물을 때, 아이는 “응,”이라고 대답함으로써 자신만의 세계, 비밀을 만든다. 첫 거짓말은 내면의 세계와 바깥세계를 경계 짓는 첫 걸음마라는 측면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 이후의 인간 삶은 내면과 바깥, 나와 타인 사이의 투쟁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1993년, 까치글방)은 우연한 사고로 가족과 떨어져 홀로 남게 된 아이가 가족을 그리워하며 타인을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갈망하며 평생을 보내는데, 사랑은 이뤄지지 않고 50년 만에 찾은 가족들에게 문전박대 당해 결국 혼자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다. (이건 순전히 자의적인 해석이다. 사실 훨씬 흥미로운 이야기다.) ‘나’는 온전한 개체이지만 한편으로 타인과의 사랑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불완전한 개체이고, 그럼에도 혼자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런 비합리적인 인간의 운명이 저자가 말하는 존재의 거짓말이 아닐까 한다.
“나는 너무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인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무의미하고 착오이고 무한한 고통이며 그것을 만들어낸 신의 악의가 상식을 초월한 발명품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외롭고, 고독한 삶에 지친 주인공 루카스 독백이다. 루카스뿐 아니라 그 주변의 인물들, 그의 가족들도 같은 운명을 견디며 산다. 전쟁과 혁명이라는 시대적 배경은 이런 비상식적인 인간의 운명을 더 극적으로 부각시킨다.
1부 ‘비밀의 노트’에서 할머니와 함께 사는 루카스는 자신이 늘 클라우스와 함께 있다고 상상하며 생활한다. 클라우스는 어릴 때 헤어진 쌍둥이 형제다. 루카스의 비밀노트가 ‘나’가 아닌 ‘우리’의 관점에서 쓰인 것도 이 때문이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즉 혼자이지만 결코 혼자이고 싶지 않은 인간의 모습이 존재의 첫 번째 거짓말이다. 루카스가 했던 ‘욕설’,‘폭력’,‘굶주림’, ‘사랑’,‘동정’으로부터 덤덤해지려는 단련은 인간이 태생적으로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지 잘 보여준다.
2부 ‘타인의 증거’에서 루카스는 야스민이라는 여인네가 낳은 기형 아이를 돌본다. 걸음마와 책 읽는 법을 가르치고 아이를 위해 산에서 내려와 소도시로 이사를 간다. 아이가 친구를 사귈 수 있게 서점에 또래 친구들도 불러 모은다. 하지만 아무리 아이에게 잘 해주어도 아이는 루카스가 곧 자신을 버릴 것이라 생각한다. 못생기고 기형인 자신보다 금발의 멋진 가족이 루카스에게 더 잘 어울려 보여서다. 아이와 루카스는 서로 사랑하지만 끊임없는 불신에 아이는 괴로워하고 결국 루카스의 곁에 남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 루카스가 사랑했던 여인 클라라는 자신의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느라 루카스는커녕 자기 자신도 돌보지 않는다. 서로 사랑을 해도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전쟁과 혁명의 시절이라는 시대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타인이 ‘내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갖는 불신과 걱정, 염려는 둘을 반드시 떼어놓고야 만다. 결코 타인과 하나가 될 수 없는 인간, 이것이 바로 존재의 두 번째 거짓말이다.
존재의 세 번째 거짓말은 무엇일까. 이것을 찾는 것보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1,2,3부에 등장하는 ‘비정상적’인 사랑들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인간이 처한 존재의 아이러니한 상황은 인위적인 ‘사회’에 의해 더욱 돋보이는데 바로 이 비정상적인 사랑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나 누구와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없는지 결정된 윤리가 있다. 신부님과 가난한 여자아이, 아버지와 딸, 가정이 있는 남자와 처녀, 이복형제, 남성과 남성, 동물과 인간사이의 사랑은 윤리에 어긋난 금기된 사랑이다. 이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사회질서를 해친다는 이유로, 본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끊임없이 누군가를 갈구하는 사랑이 인간 존재의 본성이고 운명이라면 누구와 사랑하든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일 텐데 사회는 이런 자유를 인간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근친상간이 기형아를 낳고, 여성만이 출산을 할 수 있다는 생물학적인 사실이 친족간의 사랑과 동성간의 사랑이 비정상적임을 뜻하는 걸까. 자연스런 감정임에도 사회 유지의 근간인 ‘약속’을 깨뜨린다는 이유로 불륜과 종교인의 사랑을 금기하는 건 합당한 일일까. 이유가 무엇이든 아무나 사랑할 수 없다는 비극적인 사실이 존재의 세 번째 거짓말이 아닐까 싶다.
사회적 통념, 관습을 넘어서는 인간 본래 존재에 대한 고찰답게 등장인물에 ‘선’과 ‘악’이라는 낙인이 없다. ‘선’, '악‘이라는 개념도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적 통념이라 여기에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불륜으로 한 가정을 파탄 냈지만 그의 자식을 데려다 정성들여 키우는 안토니아, 바람난 남편을 죽이고 자식을 돌보지 않는 엄마, 근친상간으로 이모를 배신한 야스민, 사랑하는 누나를 죽인 빅토르등 사랑 때문에 벌어진 일들은 분명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지만 한편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바로 이 장면 때문이다. 이복동생을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안토니아의 말에 클라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도 내 아버지를 사랑해서는 안됐어.’ 그래. 누가 감히 ‘사랑’에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비록 우린 사회적 룰에 따라 ‘선’과 ‘악’의 이분법 안에서 살아가지만, 전쟁 같은 상황 사회적 룰이 망가진 상황, 즉 인간 본연의 존재론적인 상황 말고는 아무것도 없을 때를 가정해보면 우리에겐 타인과 자신에 대한 ‘사랑’밖에 없다는 사실,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라는 사실만 남는다.
이렇게 말해놓고보니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간만에 물만난 고기마냥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해줬던 책을 너무 곡해해서 보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지나치게 관념적, 추상적으로만 인간을 본 것도 같다. 그러나 인간이 같은 아이러니를 공유하고 있다는 이 관념적 사실은 타인을 느슨하게 대하라는 설득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요즘 우린 가십에 목 말라하고 자신보다 남의 일에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같은 지평 위에 서 있는 사람끼리 돌 던져봤자 그 돌은 다시 내게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남을 낙인찍기 전에 남을 보는 '선','악'의 스펙트럼을 넓혀보는 게 좋겠다. 그게 내가 비난의 돌을 피하는 방법이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