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문제
중학생 때 였다. 비디오 가게 아저씨가 "학생, 이건 혼자봐야해."라며 빨간 띠를 두른 비디오를 검은 봉지에 둘둘말아 주었다. 영화는 빨간 띠를 두를만큼 야하지 않았다. 동성애라는 소재를 빼면 초등학생이 봐도 될 정도로 '건전'했다. 파란 폭포가 피아졸라의 탱고에 맞춰 바람에 흩날렸고 동성애는 폭포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평범한 연애처럼 보였다. 주인공들의 사랑에는 '출생의 비밀'이나 '동성애 비난', '둘을 갈라놓는 제3자'가 없어서 나는 뭘 보는지도 모른 채 영화를 봤다.
어느 날 보영이 헤어진 연인 아휘를 찾아간다. 두 손에 피를 철철 흘리는 보영을 아휘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보영이 손을 쓰지 못하니 아휘는 하나부터 열까지 보영을 돌봐준다. 나름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보영의 손이 나을수록 아휘는 불안하다. 어디든 갈 수 있다면 보영은 아휘를 떠날테니까.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보영이 담배가 없다며 밖에 나가려고 하자 아휘는 담배를 잔뜩 사와 말한다. "담배는 여기 있으니 나갈필요 없다고." 그리고 보영의 여권을 숨긴다. 일을 끝내고 집에 온 아휘는 보영이 집에 없는 것을 보고 불안이 현실이 됐음을 직감한다. "보영이 집에 있는 몇 달이 가장 행복했다."며.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소유의 욕망을 동반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 누구도 아닌 내게만 속해 있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거나 심지어 다른 사람과 마주하는 것도 싫다. '사랑'은 '소유의 욕망'이다. 문제는 우리가 타인을 온전히 소유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육체를 빠져나갈 수 있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의식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것이다. 육체는 소유할 수 있어도 이 의식은 강제로 소유할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이 물건과 다른 지점이 '의식'에 있어 의식없는 소유는 진정한 소유일 수 없다.
보영이 아파서 집에 머무는 동안 아휘는 보영의 몸을 소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영의 의식은 끊임없이 밖을 향한다. 아휘는 보영의 의식을 붙잡을 수가 없다. 단지 아픈 동안 만큼은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란 확신에 안도할뿐이다. 그런데 만약 보영도 아휘를 사랑한다면? 보영이 자신의 자유를 내던지고 아휘에게 복종한다면 둘은 행복할까. 아니다. 아휘가 사랑한 보영은 자유로운 의식을 가진 사람이지, 영혼을 잃어버린 자유를 포기한 노예가 아니다. 그래서 사랑은 어떤식으로든 이뤄질 수가 없다.
그래서 연인들은 애무를 한다. 적어도 애무를 하는 동안 의식은 몸에 갇힌다. 살갖이 닿는 상황에 의식이 머물기 때문이다.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시간은 이 때뿐이다. (딴 생각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탐크루즈와 니콜키드먼이 주연한 '아이즈 와이드 셧'. 남편인 하포드가 아름다운 부인 엘릿스에게 자신은 질투를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결혼했기 때문에 다른 여자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단다. 엘리스는 바닥에 앉아 천천히 얘기를 시작한다. 둘이 예전에 함께 갔던 호텔 식당에서 옆 테이블에 앉았던 장교를 기억하냐며. 장교가 호텔에 들어오던 날 그를 보고서 심장이 뛰었다고. 엘리베이터에서 그를 봤을 때 사랑했다고. 그가 호텔을 떠난 것을 알고서 안도(relieved)했다며. 하포드는 아내의 얘기에 충격을 받는다.
겉으로는 함께 있고 사랑하더라도 인간의 내면이 결코 스스로를 완전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복종과 지배의 문제
그래서 완전한 복종이란 없다. 사람은 누구도 자발적으로 복종을 하지 않는데, 누군가 복종을 한다면 그것은 강제된 것이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복종을 해도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한다. 그럼 왜 복종을 하는가.
불공정 거래를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회사가 밀어내기를 하면 대리점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밀어내기를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거절할 것이냐. 받아들이면 불공정한 거래를 '선택'해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는 것이고 거절하면 스스로 '자유'를 선택해 주인으로 남는다. 그런데 밀어내기를 거절해 자유를 선택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게 아니다. 거절하는 것은 결국 대리점에게 폐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유를 누릴 주체가 없으면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그래서 대리점주의 선택권은 '복종'과 '자유'가 아니라 '복종'과 '죽음'이다. 살기 위해서는 복종할 수밖에 없고 이 복종은 엄격한 의미에서 선택된 것이 아니다.
근대에 계약은 '평등'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대중소기업이 맺는 계약서는 겉으로만 '평등'이지 실은 평등이 아니다. 한쪽에만 불리한 계약서를 동의하에 작성한다는 것은 실은 강제된 복종이다. 약자는 죽지 않으려고 불공정한 계약서에 동의을 할뿐이다.
겉으로는 갑에게 복종하지만 실은 자유를 갈망하는 을의 의식은 이중적이다. 하지만 갑도 행복하지만은 않다. 갑은 자신이 갑이라는 인정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을의 인정은 진정한 인정이 아니라 '거짓'이다. 복종하는 사람의 말은 강제된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인에게서 나온 인정만이 진짜 인정이다.
적어도 갑이 자유를 가진 주체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갑을의 관계를 상생으로 바꿔 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원래 노-사는 상대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회사는 노동자가 필요하고 노동자는 회사가 필요하다. 지금은 힘이 한쪽으로 기울어 "당신 아니라도 우리는 괜찮다."며 회사가 노동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꼴이다. 균형이 무너져서 곳곳에서 말도 안되는 지배-복종이 일어나고 있다. 일단 남의 생명을 위협하며 복종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며 이런 불공정 거래를 근절해야 한다. 균형의 추를 다시 돌려놓아야 을도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 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갑이 깨달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