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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노화란 조금 더 더디게 진행될 필요가 있다. 요즘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남녀 불문하고 대략 80세 정도 된다고 했을 때, 정확히 반 가까이 살아온 나의 경우에 비춰보면 지금까지 지내온 세월만큼을 더 살기엔 몸의 노화가 너무 빨리 진행된다는 느낌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너무 긴 세월이 '여생'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죽음은 한순간에 이뤄지는 듯하지만 내 안의 많은 것들은 이미 사망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7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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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가? 그 교수랑? 어머, 어떻게 그래? 타인이 아닌 자신의 도덕성에 상처 입은 얼굴로 놀란 듯 즐거워하고 있었다. 나도 잘 아는 즐거움이었다. -153p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가진 도덕이, 가져본 도덕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래. - 199p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울 땐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던지게 돼 있거든. -2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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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에 잠깐 교보에 들러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나온 격월간지 악스트(Axt)를 샀다. 문학지치고 잘 팔린단 말에 궁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3000원도 안되는 책값이 마음에 들었다. 어떤 글이 담겼길래 커피 한 잔값도 안된다 말인가 하는 생각. 


목록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정유정 인터뷰와 황현산의 글이었다. 특히 황현산의 '폐쇄 서사-영화 '곡성'을 말하기 위해'는 제목만 보고도 구미가 당겼다. 


정유정 인터뷰는 '종의 기원'에 관한 것인줄 알았는데 읽고나서 보니 정유정이란 작가에 대한 인터뷰에 좀 더 가까운 것 같다. 주로 무엇을 어떻게 쓰나, 무슨 생각을 하나에 초점이 맞춰진 것 같다. 


기억에 남는 몇가지를 꼽자면 '소설이 재미가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니 정유정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관념에 지배돼 이야기 전체를 보지 못할 때, 작가가 이야기를 장악하지 못했을 때, 이야기가 막히는 이유는 그 사람이 거기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같은 맥락에서 '어떻게 하면 필력이 좋아지나'는 질문에 "작가는 이야기의 형식을 장악해야 한다. 이 이야기를 어떤 틀 안에서 구현해내겠다고 결정했다면 그 형식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장래희망이 '꾼'이었다는 정유정은 어릴 적 이야기하는 법을 배운 얘기를 하며 이렇게 말한다. "만담꾼 두 사람이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천막 극장이었다... 가장 재미있었던 건 '흥부전'이다. 이 만담꾼들은 절대로 흥부가 가난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한 시간 내내 가난한 자만이 벌일 수 있는 온갖 궁상맞은 해프닝을 늘어놓는다."


작가의 의무에 대해선 "작가나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다만 변화이 징후를 반보 앞서 읽어내고 읽어낸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게 작가의 임무라고 여긴다."


기억에 남는 표현으로는, '꽃삽 하나 쥐고 알래스카 설원에 선 것 같다. 이 알량한 밑천으로 이 황량한 땅에 도시를 건설해야 한다는 막막함이 몰려든다"인데 정유정은 새 소설을 시작할 때 마다 이런 기분이 든다고 한다. 


일꾼의 기원: 일을 잘 한다는 것은, 업무의 전체를 볼 수 있고 그 전체를 이해하고 장악해야 하는 것이고, 일이 막힌다는 것은 그것을 잘 모르기 때문일테지. 나도 내일, 꽃삽 하나 쥐고 황량한 땅에 도시를 건설하러 출근해야 한다. 벌써 막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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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문제 

 중학생 때 였다. 비디오 가게 아저씨가 "학생, 이건 혼자봐야해."라며 빨간 띠를 두른 비디오를 검은 봉지에 둘둘말아 주었다. 영화는 빨간 띠를 두를만큼 야하지 않았다. 동성애라는 소재를 빼면 초등학생이 봐도 될 정도로 '건전'했다. 파란 폭포가 피아졸라의 탱고에 맞춰 바람에 흩날렸고 동성애는 폭포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평범한 연애처럼 보였다. 주인공들의 사랑에는 '출생의 비밀'이나 '동성애 비난', '둘을 갈라놓는 제3자'가 없어서 나는 뭘 보는지도 모른 채 영화를 봤다. 


어느 날 보영이 헤어진 연인 아휘를 찾아간다. 두 손에 피를 철철 흘리는 보영을 아휘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보영이 손을 쓰지 못하니 아휘는 하나부터 열까지 보영을 돌봐준다. 나름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보영의 손이 나을수록 아휘는 불안하다. 어디든 갈 수 있다면 보영은 아휘를 떠날테니까.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보영이 담배가 없다며 밖에 나가려고 하자 아휘는 담배를 잔뜩 사와 말한다. "담배는 여기 있으니 나갈필요 없다고." 그리고 보영의 여권을 숨긴다. 일을 끝내고 집에 온 아휘는 보영이 집에 없는 것을 보고 불안이 현실이 됐음을 직감한다. "보영이 집에 있는 몇 달이 가장 행복했다."며.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소유의 욕망을 동반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 누구도 아닌 내게만 속해 있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거나 심지어 다른 사람과 마주하는 것도 싫다. '사랑'은 '소유의 욕망'이다. 문제는 우리가 타인을 온전히 소유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육체를 빠져나갈 수 있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의식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것이다. 육체는 소유할 수 있어도 이 의식은 강제로 소유할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이 물건과 다른 지점이 '의식'에 있어 의식없는 소유는 진정한 소유일 수 없다. 



보영이 아파서 집에 머무는 동안 아휘는 보영의 몸을 소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영의 의식은 끊임없이 밖을 향한다. 아휘는 보영의 의식을 붙잡을 수가 없다. 단지 아픈 동안 만큼은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란 확신에 안도할뿐이다. 그런데 만약 보영도 아휘를 사랑한다면? 보영이 자신의 자유를 내던지고 아휘에게 복종한다면 둘은 행복할까. 아니다. 아휘가 사랑한 보영은 자유로운 의식을 가진 사람이지, 영혼을 잃어버린 자유를 포기한 노예가 아니다. 그래서 사랑은 어떤식으로든 이뤄질 수가 없다. 


그래서 연인들은 애무를 한다. 적어도 애무를 하는 동안 의식은 몸에 갇힌다. 살갖이 닿는 상황에 의식이 머물기 때문이다.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시간은 이 때뿐이다. (딴 생각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탐크루즈와 니콜키드먼이 주연한 '아이즈 와이드 셧'. 남편인 하포드가 아름다운 부인 엘릿스에게 자신은 질투를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결혼했기 때문에 다른 여자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단다. 엘리스는 바닥에 앉아 천천히 얘기를 시작한다. 둘이 예전에 함께 갔던 호텔 식당에서 옆 테이블에 앉았던 장교를 기억하냐며. 장교가 호텔에 들어오던 날 그를 보고서 심장이 뛰었다고. 엘리베이터에서 그를 봤을 때 사랑했다고. 그가 호텔을 떠난 것을 알고서 안도(relieved)했다며. 하포드는 아내의 얘기에 충격을 받는다. 


겉으로는 함께 있고 사랑하더라도 인간의 내면이 결코 스스로를 완전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복종과 지배의 문제 

그래서 완전한 복종이란 없다. 사람은 누구도 자발적으로 복종을 하지 않는데, 누군가 복종을 한다면 그것은 강제된 것이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복종을 해도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한다. 그럼 왜 복종을 하는가. 

불공정 거래를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회사가 밀어내기를 하면 대리점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밀어내기를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거절할 것이냐. 받아들이면 불공정한 거래를 '선택'해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는 것이고 거절하면 스스로 '자유'를 선택해 주인으로 남는다. 그런데 밀어내기를 거절해 자유를 선택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게 아니다. 거절하는 것은 결국 대리점에게 폐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유를 누릴 주체가 없으면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그래서 대리점주의 선택권은 '복종'과 '자유'가 아니라 '복종'과 '죽음'이다. 살기 위해서는 복종할 수밖에 없고 이 복종은 엄격한  의미에서 선택된 것이 아니다. 

근대에 계약은 '평등'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대중소기업이 맺는 계약서는 겉으로만 '평등'이지 실은 평등이 아니다. 한쪽에만 불리한 계약서를 동의하에 작성한다는 것은 실은 강제된 복종이다. 약자는 죽지 않으려고 불공정한 계약서에 동의을 할뿐이다. 


겉으로는 갑에게 복종하지만 실은 자유를 갈망하는 을의 의식은 이중적이다. 하지만 갑도 행복하지만은 않다. 갑은 자신이 갑이라는 인정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을의 인정은 진정한 인정이 아니라 '거짓'이다. 복종하는 사람의 말은 강제된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인에게서 나온 인정만이 진짜 인정이다. 


적어도 갑이 자유를 가진 주체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갑을의 관계를 상생으로 바꿔 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원래 노-사는 상대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회사는 노동자가 필요하고 노동자는 회사가 필요하다. 지금은 힘이 한쪽으로 기울어 "당신 아니라도 우리는 괜찮다."며 회사가 노동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꼴이다. 균형이 무너져서 곳곳에서 말도 안되는 지배-복종이 일어나고 있다. 일단 남의 생명을 위협하며 복종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며 이런 불공정 거래를 근절해야 한다. 균형의 추를 다시 돌려놓아야 을도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 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갑이 깨달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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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들" P.51

 

이라고 되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2년  전 썼던 노트를 재활용하려고 꺼냈더니 이런 글이 있다.

글솜씨는 타고나는 거다. 엉덩이의 힘도 받쳐줘야 하겠지만.

 

" 그것은 '마법적인 머리카락' 자체의 힘. 또는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머리카락이 인간의 신체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이루어지는 놀랄만한 변성 작용의 힘이다. 머리카락에 가해지는 모든 조작- 자르기, 면도하기, 멋내기 등-은 과거의 사람으로부터 새로운 사람을 불러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많은 문화권에서 머리 모양을 바꾸는 것은 사회적으로 배정된 하나의 정체성에서 다른 정체성으로 넘어가는 통과의례에서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잘려나간 머리카락은 모든 쓰레기와 마찬가지로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을, 나쁜 것에서 좋은 것을, 열등한 것에서 우월한 것을 추출해내는 경이로운 행위의 도구가 된다.

 

창조 행위는 쓰레기의 분리와 처리 행위에서 절정, 완성, 진정한 성취에 이르게 된다.

 

일단 잘려나가자마자 '쓰레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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