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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 제3판 개역본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강정인.김경희 옮김 / 까치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군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왜 유명한지 물었다. 아마도 이 분은 책의 내용이 그다지 놀랍거나 새로워 보이지 않았나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의 말이 틀리진 않다. 군주로서 어떻게 하면 국가를 잘 다스릴 수 있는지 논했고, 지금에 와서 보면 대부분의 국가 총수들이 취하고 있는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을 그가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세기 그가 살았던 시대상을 고려해봤을 때 그의 주장은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에도 한번쯤 생각해볼만하다.
일단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서 도덕성을 배제시킨다. 그리고 훌륭한 군주의 덕은 현실정치를 잘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도덕과 정치를 분리시켰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덕이란 자신의 맡은 바 역할을 잘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군인에게 필요한 덕성은 용기이고 생산자는 절제, 왕은 지혜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도덕과는 차이가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왕에게 절제는 덕목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도 이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군주에게 필요한 것은 신의나 인자함, 관후함이 아니라 국력을 굳건히 하기 위한 군모술수와 지략이라고 보았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신의나 관후함을 내보일 수는 있지만 이는 그야말로 술수이지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이를 현실정치에 적용시킨다면?
혹자는 권모술수적인 방법론이 오늘날의 국가 총수에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국가 발전을 위해서라면 국민을 속이는 것도 더 나아가서는 독재를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한다. 단 조건은 결과가 좋다면 이다.
여기서 생각해보아야할 것은 마키아벨리가 제안한 방법론의 목적이다. '군주론'에서 말하는 군주의 덕의 목적은 '어떻게 하면 내교를 잘 하여 국가를 질서잡고, 외교를 잘해 국력을 굳건히 하며 이로서 왕의 권력이 오래토록 유지될 수 있을까'이다. 그래서 타국가의 통치자와 동맹을 맺을 때는 신의를 주는 척 해야 하고, 자신을 견제하는 세력은 일찍이 싹을 잘라야 하고, 국민에게는 미움을 사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잘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신민이 아니라 시민이다. 국가 총수의 목적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안전과 자유,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이다. 그래서 독재를 하는 것이 혹은 국민을 속이면서 국가 발전을 하는 것이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국가 총수의 도덕성을 문제 삼는다면?
그런데 과연 국가 총수의 훌륭함은 통치를 잘하는 것이지 그의 개인적인 윤리는 별개의 문제일까?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은 섹스스캔들로 탄핵을 받은 적이 있다. 과연 대통령의 바람이 탄핵의 정당한 사안이 될 수 있을까?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 부부는 스캔들을 달고 다니지만 이것 때문에 탄핵을 받지 않는다. 잠깐 다른 얘기를 하자면, 이는 미국과 프랑스 국민들의 인간에 대한 시각차이 때문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인들은 선과 악은 그 사람이 타고난 기질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 범죄를 저지른다면 그것은 상황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악하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본다. (한국인들은 그 사람의 성장배경이나 최근에 겪은 일등 주변 환경으로 범죄의 원인을 찾는 경향이 있다.) 이와 달리 프랑스인들은 누구나 선할 수도 있고 악해질 수도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거짓말의 경우, 미국인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반면 프랑스인들은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들인다고 한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시각차가 클린턴은 탄핵을 받고 사르코지는 그렇지 않은 이유가 아닐까.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과연 국가 총수의 개인적 윤리는 필수인가. 어쩌면 개인의 윤리와 주어진 역할을 잘 해내는 훌륭함은 별개일지 모른다. 회사에서 자신의 직무에만 충실하면 되지 사람들에게 공손하고 친절해야할 필요가 있을까. '윤리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말하길 윤리학을 전공한 다른 교수들도 개인적 윤리의 측면에서 봤을 때 인자하다거나 배려심이 많다거나, 군자적이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윤리적이었을 때 상황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만약 회사원이 일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좋아서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그들로부터 신의를 얻는다면 그는 분명 승진에 이로울 것이다. 국가 총수가 인자하거나 관용적이라서 소수자들을 배려하고 나아가서 가족 내에서 좋은 아버지라면 아마 더 많은 지지를 받을 것이다. 이는 실용적인 측면에서 윤리적이었을 때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얼마나 더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오느냐를 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윤리적이어야 하느냐고, 윤리적이어야 한다면 왜 그러해야하는지 다시 물어볼 수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윤리적인 것이 더 이롭다고 말한다면 이는 마키아벨리와 다를 것이 없다. 자신의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람들에게 신의를 얻는 것이 유리하므로 그는 ‘척’을 행한다. 그러나 착한 ‘척’을 하기 위해 착한 행동을 한다면 그것이 진정 ‘착함’과 무엇이 다른가. 똑똑한 ‘척’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결과를 낸다면 그것이 진정 ‘똑똑함’과 무엇이 다른가. 목적의 차이인가. 만약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도덕적이어야 한다면 국가 총수의 개인적 윤리는 목적 달성을 위한 하나의 방법론일 뿐이다.
칸트식의 목적의 왕국을 생각해보자. 인간이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율적인 법칙을 부과하고, 서로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한다면, 여기서 진정‘착함’과 착한 ‘척’은 구분되고 전자가 우위에 선다. 그리고 국가 총수의 개인적 윤리성은 총수의 윤리성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훌륭한, 좋은 ‘사람’이기 위해 좇아가야할 지점이다.
오늘날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다시 조명되어야 한다면 그가 제시한 실용적이고 권모술수적인 방법론이 우리가 따라가야 할 이상적인 방법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 모습이 15세기 신민과 군주의 국가로 되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설립 목적 자체가 다른 시대를 모방해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유와 존엄성이 없는 시대의 결말이 무엇이었는지 재고해 보아야한다. 이것이 ‘군주론’을 읽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