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말했다. 2008년 겨울, 그는 최전방에서 군복무 중이었다. 당시 대선에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이 철색 선까지 방문해 고생하는 장병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추운 겨울에 아무도 신경써주지 않는 그 구석까지 찾아온 대통령을 보고 그는 감동했다. 그 이후로 그는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자가 되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과연 이 사람에게 이명박 대통령이 군 면제라는 사실을 말해야하나 말아야하나 망설였다.(이명박 대통령은 군 면제가 아니라 입소했으나 질병으로 축출 당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군 복무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면 그는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멈출까. 감동을 받은 이유는 대통령이 최전방에 방문했기 때문이지만 대통령이 군 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는 곧 지지를 철회할지도 모른다. 한국에선 이유 불문하고 군복무를 제대로 했느냐 안했느냐가 그 만큼 중요하다.

66년 전 오늘,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 2세가 2차 세계대전에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해 전사했다. 그는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형이다. 케네디가는 미국의 전통적인 귀족가문이다. 당시 존 F 케네디의 아버지는 리더가 되기 위해 참전이 필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려고 했고, 심지어 면제를 받은 자식을 입대시키려고 정치적인 영향력까지 썼다고 한다. 이는 대표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사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정치인들이 존경받고 지지를 얻으려면 모범을 보여야한다. "대통령과 장관, 국회의원 등 권력자들의 자식이 군대에 있다면 과연 이라크 파병을 보냈겠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권력자들에 대한 신뢰도가 그 만큼 낮다는 얘기다. 그들이 진심으로 국민의 입장을 고려하고 배려한 후에 내리는 결정이라는 인식을 줄 수 있다면 이라크에 파병 보내는 것은 물론 사대강을 파헤쳐도 국민들은 그들을 계속 지지할 것이다. 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식들은 물론 본인들도 떳떳하게 군 생활을 하고, 위장전입으로 세금포탈하지 않는 등 모범 시민이면 충분히 신뢰를 형성할 수 있다. 빌 게이츠처럼 재산의 절반은 내 놓는 것도 아니고, 케네디처럼 군 면제받은 아들 강제로 군대로 내 모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합법적으로 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한국 정치인들은 이것도 어렵다고 하니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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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나오토 일본 총리가 어제 한일병합 100년을 맞아 담화를 발표했다. 총리는 '지금까지 100년 가운데 반성해야 할 것은 반성하고 앞으로 100년을 위해 함께 나간다는 생각에서 담화를 발표했다.'고 말했다. 요지는 '식민지배로 한국에 손해를 입히고 고통을 주어서 반성하고 사죄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조선왕실의궤도 인도할 예정이다. 이에 대해 각계각층의 반응이 엇갈린다.

담화가 있은 후 자민당 등 보수 야당은 물론 민주당 내에서도 부적절한 담화였다고 불만이 쏟아졌다. 애초 사과문은 좀 더 파격적인- 예를 들어 조약이 원천무효라는-내용을 담을 예정이었지만 반대가 심해 정도가 약화됐다. 그럼에도 여야당은 '문화재 반환이 개인보상 문제로 불똥이 튈 수 있다.'며 '이미 끝난 문제로, 상대에게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그러나 한국 언론은 담화가 병합조약의 불법성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그 이전의 담화와 별 차이가 없다고 보도했다. 물론 담화가 아시아 전체가 아닌 한국만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총리담화라는 점, 지배가 강제였음을 인정한 점, 문화재를 반환하기로 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앞으로의 실천에 주목하자고 했다. 군위안부, 독도, 교과서 문제 등은 앞으로 해결해야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학계는 담화에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며 의궤뿐만 아니라 다른 약탈당한 문화재도 협정해야하는데 말이 없었다며 '변하지 않는 일본의 역사 인식과 태도를 확인한 씁쓸한 담화였다'고 말했다. 위안부 할머니 한 분은 '식민지 지배로 피해를 본 한국인에 대해 어떻게 보상할 것인지 아무 말이 없다'고 말했다.

[진중권의 아이콘] ‘촛불은 왼쪽에서도 오른쪽에서도 깜박인다.‘에서 진중권은 입장에 따라 세계가 달라 보이기 마련이라고 한다. 빛이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가 될 수 있듯이 현실에서도 이율배반인 현상이 많다. 그래서 촛불 시위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진보주의자들이 그들의 오른편에 있고, 진보주의자들의 눈에 촛불시위자들이 오히려 그들의 오른쪽에 있을 수 있다. 결국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상황을 가늠 하고 어느 것이 조개인지, 해일인지 판단하기 마련이다.

일본 측의 입장에서 본 총리 담화는 부적절하고 지나치게 앞서 나갔다면 한국 측에서 본 총리 담화는 부족하고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둘 다 맞는 말이다. 사실 개인 보상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하면 일본은 일이 복잡해진다. 그리고 합병이 원천 무효라는 선언은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조상을 부정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선대의 잘못을 후대에서 인정하고 사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과거에 받았던 고통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지 않고서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과와 보상을 요구해야 한다. 누가 잘했고 못했는지 잘잘못을 따지기가 쉽지 않다.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조개와 해일이 달라진다. 여기에 ‘객관적인’, ‘절대적인’ 답도 기준도 없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진리라는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절대적인 것은 없지만 서로의 의견을 조율해 합의에 이를 수 있다. 양자택일이 아니라 그 중간 즈음에서 만나는 것이 현실에서 필요한 자세다. 진중권은 ‘서로 충돌하는 두 입장을- 마치 힘껏 당겨 묶은 활줄처럼- 그 팽팽한 긴장 속에서 함께 유지하는 사유의 새로운 습관’을 가지자고 한다. 이것이 “적어도 ‘A만이 옳다’, 혹은 ‘B만이 옳다’는 독단보다 우리를 현실에 더 가깝게 데려가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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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마광수 지음 / 북리뷰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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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에 표지나, 저자, 제목을 보는 순간 편견이 생긴다. 편견이 아니라 느낌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느낌이 편견에 가깝다고 본다. 편견은 좋기도 나쁘기도 하다. 무엇에 대해 편견이 생겼다는 말은 이미 그 무엇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거나 충분히 경험해 보았다는 말이다. 우리가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도 대충 그 사람의 됨됨이를 짐작하는 것도 이전에 만나왔던 사람들과 나눈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짐작이 틀린 경우도 있지만 대게는 맞기에 편견은 도움이 되기도 한다.  

되도록이면 편견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편견 때문에 실수를 하거나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했다가 낭패를 보기도 한다. 책도 마찬가지다. 사실 표지나 제목, 저자가 취향에 맞지 않더라도 책의 내용은 굉장히 좋을지도 모른다. 드문 경우라고 하더라도 편견 때문에 좋은 책을 읽을 기회를 놓치는 일은 낭패다. 말하자면 마광수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가 바로 그러한 책이다.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지만, 접해보고 싶지도 않았기에 책을 읽으려고 하지도 않았었다. 소문난 잔칫집에 먹을 것 없다고, 언론에서 칭찬과 비난을 한 몸에 받아 논쟁의 중심이 되었던 책 치고 좋았던 책이 없었다. 특히 소설이나 수필 같은 장르의 문학작품이 그러하다. 

마광수의 책이 논란이 되었던 이유는 '에로티시즘'때문이다. 소설은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처럼 주인공들의 정사를 묘사하지 않는다. 책은 주제가 '성'이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저자의 자전적 에세이로 그가 '성'에 대해 가진 생각을 여러 주제와 묶어 풀어낸다. 책이 '야한'이유는 바로 '성'을 보여주는 것(묘사)이 아니라 '성'을 얘기하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도 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소설의 주인공은 성을 탐닉하지만 직접적이라기보다 주변을 맴돌며 관찰하는 방식으로 욕망을 표현한다. 이는 독자들에게 포르노보다 훨씬 더 선정적이고 퇴폐적이고 변태적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그는 관음증에 걸린 게 아니라 단지 성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의 말처럼 '성'이란 지금까지, 특히 한국사회에서 금기시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욕구 중 하나가 '성욕'이다. 그런데 사회는 자연스러운 것을 참고 억눌러야 할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게 한다. 마광수는 여기서 인간의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이 조금 더 행복해기지 위해, 입시와 취업과 결혼과 자식과 성공을 위해 참아야했던 욕망의 고삐를 조금 느슨하게 잡자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타인의 마음이나, 타인이 보는 자신의 모습에 집착하지 말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욕망을 돌보자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마광수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 '성'을 말한다고 볼 수 있겠다.

마광수는 배설의 중요함을 역설한다. 성적 배설만이 아니라 현대인이 겪는 스트레스도 배설의 대상이다. 배설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 발생의 원천이기도 하다. 신체적 나약함은 마광수가 배설해야할 찌꺼기이다. 그는 책의 전반에 걸쳐 그의 몸이 얼마나 나약했는지 얘기한다. 두꺼운 옷으로 몸을 가릴 수 있었던 겨울은 좋지만 갈비씨를 그대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여름은 견디기 힘들다고 한다. 생기발랄하고 힘차게 뛰어노는 대학생들을 보면서 그들이 가진 젊음을 부러워하는 모습도 그가 ‘몸’에 대해 가진 콤플렉스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그가 집착하는 페티시즘도 몸에 대한 ‘환상’과 연관해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에 대한 담론은 그에게 있어 배설출구이다. '성'을 얘기할 수밖에 없었고 '성'을 탐닉하고 관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집필만이 배설물들을 흘려 내보낼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기 때문이다.

이 책이 금서로 지정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발칙한 표현 때문일까 아니면 성을 금기시하는 사회에 ‘성’을 끄집어내서일까. 이것도 아니면 그가 주장하는 인간다운 삶이 사회에서 중요시여기는 충과 효, 정절에 반하기 때문일까. 독재타파, 민주주의 투쟁, 경제발전에 여념이 없던 사회분위기에 허무주의적 생각은 허용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오늘, 내가 보기에 마광수는 야하지 않다. 사물을 보는 관찰력과 글 솜씨는 나무랄 데가 없지만 그의 생각은 특별하지도 독특하지도 않다. 그는 그저 한 남자일 뿐, 그것도 요즘말로 ‘루저’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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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레미 말랭그레 그림, 드니 로베르 외 인터뷰 정리 / 시대의창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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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ive’하다는 말만큼 상대방을 우습게 보는 말이 또 있을까. 어쩌면 좋은 의도로 하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우리 사회에서 순진하다는 말을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순진하다는 것은 세상물정을 잘 모른다는 것이고 이는 속기 쉬운, 바보라는 의미이다. 본 의미 그대로의 순진함은 더 이상 ‘Pure'를 뜻하지도, 칭찬받을 만한 일도 아니다. 눈물이 최고의 폭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순진함 또한 일종의 폭력이요, 미성숙의 징표일 뿐이다.

촘스키가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시민들에게 요구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미성년의 상태에서 벗어나 이성으로 생각하는 성년이 되는 것.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수동성에서 벗어나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고 그것을 얻기 위해 행동하고, 사실에 대해 의문을 던져보는 것이 바로 촘스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민의 모습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기에 그는 끊임없이 비판에 비판을 거듭하다.

세상은 누가 지배하는가. 촘스키에 의하면 이제는 다국적 기업이 권력의 중심에 있다. 정치인들도 권력자들이긴 하지만 자본이 권력의 원천이고 이 자본을 다국적 기업이 소유하고 있으니 결국 정치인들도 기업의 입맛에 맞는 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현실도 별다를 것이 없다. FTA추진이나 금리동결은 모두 대기업을 위한 정책이다. 물론 구실은 좋다. 자유무역같은 경우 세계화를 피해갈 수 없는 상황에서 고립된 정책을 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문제는 자유무역을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문제는 자유무역협상 내용에 있다. 협상이 타결되면 분명 자동차나 조선과 같은 부문에서는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쌀이나 과일과 같은 농수산업 분야에서 손해를 볼 것은 불 보듯 뻔 한 일이다. 즉, 대기업은 더 많은 흑자를 내겠지만 농민들이나 영세업자들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정책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자유무역협정도 대기업을 위한 하나의 정책에 불과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대기업을 지원하는 것이 왜 나쁘냐고 묻는다. 분명 삼성은 수많은 사람들의 꿈의 직장(?)이며, 현재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이라는 변방 국가를 세계에 알려, 좋은 국가 이미지 형성에 기여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기업이 파산했을 때 이를 그냥 두고 본다면 국가적인 손실이 크다. 따라서 공공자금을 투입해서라도 대기업을 되살리는 것은 국가 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한 방안으로서 당연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정부가 대기업을 지원하는 정책을 시행하는데 있지 않다. 만약 정부가 국가 경제보호나 부흥책의 일환으로 대기업을 지원하는 방안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문제는 규제완화나 변경 같은 정책들이 대기업의 압력에 의해 즉 그들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면 분명히 문제가 있다. 민주주의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고 정부는 국민의 권리를 위임받아 정치를 한다. 그런데 정부나 국회가 국민의 뜻이 아니라 소수의 대기업의 뜻에 따라 정치를 한다면 과연 이것이 민주주의 국가인가.

촘스키는 언론과 지식인이 이러한 권력의 흐름에 동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온갖 미디어 매체를 통해 언론은 알아야 할 것을 알리고 알 필요 없다고 판단되는 것에는 입을 다문다. 그리고 정보를 전하는데 있어 객관적인 시각보다는 원하는 방향, 혹은 정해진 방향으로 사건을 분석하여 내보낸다. 한쪽으로 편향된 정보를 접하는 사람은 당연히 그쪽으로 치우친 시각을 갖게 마련이다. 물론 정보라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 객관적일 수는 없다. 모든 정보는 이미 전달자의 해석이 가미된 정보이다. 그렇다면 모든 언론에서 흘러나오는 정보는 믿을 수 없는 것일까. 아니다. 촘스키와 연구원들이 했던 것처럼 정보지를 모아서 분석해보면 어떤 정보지가 훨씬 더 객관적인지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구지 객관적인 정보지를 고집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사실 본인의 가치관과 부합하는 정보지를 구독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에 있다.

이것은 표현의 자유와 관련이 있다. 촘스키는 반유태주의도 하나의 의견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주장하는 이의 의견을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표현의 자유이다. 국내에서는 아직 친북적인 발언이나 친일적인 발언이 용납되지 못한다.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라 할지라도 이러한 발언은 매국놈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가 없다. 정당한 근거가 갖춰진 생각이라면 그 누구라도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고 이에 부당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된다. 다른 의견도 하나의 의견으로서 받아들여진다면 아무리 언론매체가 한쪽으로 편향된 정보해석을 내놓더라도 국민을 선동하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는 비판의 장도 열려있다. 무조건적인 비난이 아닌 합당한 근거에 의한 비판이야말로 언론에 의한 우민화를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미디어가 사람의 의식에 미치는 악영향은 이러한 비판의식을 해제시키는 것이다. 온갖 오락프로그램과 스포츠, 드라마, 영화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우리의 사고체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 가장 큰 문제가 문제를 깊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가 ‘개그콘서트’에서 사회, 정책적 이슈를 주제로 삼아 풍자하고 이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한 코너이다. 얼핏 보편 통쾌하게 사회적 모순점을 꼬집는 것 같지만 들여다보면 모든 문제를 쉽고, 편리하게만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회에 만연한 편견들을 아무런 여과 없이 내보내고 있다. 촘스키는 미국의 이라크 보호를 위한 침공이 정당한가라는 토론을 지켜보면서 내면에 깔려 있는 ‘미국이 이라크를 보호했다‘라는 전제를 당연시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한 명의 부자를 만들기 위해 오십 명의 가난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한다. 혁명이 일어나 체제가 전복된다고 해도 부와 가난을 짊어진 주체가 바뀔 뿐 이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결국 권력과 부는 소수를 위해 존재하고 언론과 지식인을 이들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나머지 보통의 사람들을 선동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국민에 의해 국민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쟁취한 경험이 있다. 87민주화 항쟁이 단적인 예다. 다수의 국민이 문제를 의식하고 해결방안을 찾기 위해 협력하고 이를 행동에 옮긴다면, 통치의 수단에서 벗어나 주권의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비판의식을 갖고 타인의 주장을 경청하는 것으로, 순진함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이를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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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 제3판 개역본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강정인.김경희 옮김 / 까치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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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왜 유명한지 물었다. 아마도 이 분은 책의 내용이 그다지 놀랍거나 새로워 보이지 않았나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의 말이 틀리진 않다. 군주로서 어떻게 하면 국가를 잘 다스릴 수 있는지 논했고, 지금에 와서 보면 대부분의 국가 총수들이 취하고 있는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을 그가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세기 그가 살았던 시대상을 고려해봤을 때 그의 주장은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에도 한번쯤 생각해볼만하다.

일단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서 도덕성을 배제시킨다. 그리고 훌륭한 군주의 덕은 현실정치를 잘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도덕과 정치를 분리시켰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덕이란 자신의 맡은 바 역할을 잘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군인에게 필요한 덕성은 용기이고 생산자는 절제, 왕은 지혜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도덕과는 차이가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왕에게 절제는 덕목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도 이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군주에게 필요한 것은 신의나 인자함, 관후함이 아니라 국력을 굳건히 하기 위한 군모술수와 지략이라고 보았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신의나 관후함을 내보일 수는 있지만 이는 그야말로 술수이지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이를 현실정치에 적용시킨다면?

혹자는 권모술수적인 방법론이 오늘날의 국가 총수에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국가 발전을 위해서라면 국민을 속이는 것도 더 나아가서는 독재를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한다. 단 조건은 결과가 좋다면 이다.

여기서 생각해보아야할 것은 마키아벨리가 제안한 방법론의 목적이다. '군주론'에서 말하는 군주의 덕의 목적은 '어떻게 하면 내교를 잘 하여 국가를 질서잡고, 외교를 잘해 국력을 굳건히 하며 이로서 왕의 권력이 오래토록 유지될 수 있을까'이다. 그래서 타국가의 통치자와 동맹을 맺을 때는 신의를 주는 척 해야 하고, 자신을 견제하는 세력은 일찍이 싹을 잘라야 하고, 국민에게는 미움을 사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잘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신민이 아니라 시민이다. 국가 총수의 목적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안전과 자유,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이다. 그래서 독재를 하는 것이 혹은 국민을 속이면서 국가 발전을 하는 것이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국가 총수의 도덕성을 문제 삼는다면?

그런데 과연 국가 총수의 훌륭함은 통치를 잘하는 것이지 그의 개인적인 윤리는 별개의 문제일까?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은 섹스스캔들로 탄핵을 받은 적이 있다. 과연 대통령의 바람이 탄핵의 정당한 사안이 될 수 있을까?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 부부는 스캔들을 달고 다니지만 이것 때문에 탄핵을 받지 않는다. 잠깐 다른 얘기를 하자면, 이는 미국과 프랑스 국민들의 인간에 대한 시각차이 때문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인들은 선과 악은 그 사람이 타고난 기질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 범죄를 저지른다면 그것은 상황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악하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본다. (한국인들은 그 사람의 성장배경이나 최근에 겪은 일등 주변 환경으로 범죄의 원인을 찾는 경향이 있다.) 이와 달리 프랑스인들은 누구나 선할 수도 있고 악해질 수도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거짓말의 경우, 미국인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반면 프랑스인들은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들인다고 한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시각차가 클린턴은 탄핵을 받고 사르코지는 그렇지 않은 이유가 아닐까.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과연 국가 총수의 개인적 윤리는 필수인가. 어쩌면 개인의 윤리와 주어진 역할을 잘 해내는 훌륭함은 별개일지 모른다. 회사에서 자신의 직무에만 충실하면 되지 사람들에게 공손하고 친절해야할 필요가 있을까. '윤리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말하길 윤리학을 전공한 다른 교수들도 개인적 윤리의 측면에서 봤을 때 인자하다거나 배려심이 많다거나, 군자적이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윤리적이었을 때 상황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만약 회사원이 일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좋아서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그들로부터 신의를 얻는다면 그는 분명 승진에 이로울 것이다. 국가 총수가 인자하거나 관용적이라서 소수자들을 배려하고 나아가서 가족 내에서 좋은 아버지라면 아마 더 많은 지지를 받을 것이다. 이는 실용적인 측면에서 윤리적이었을 때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얼마나 더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오느냐를 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윤리적이어야 하느냐고, 윤리적이어야 한다면 왜 그러해야하는지 다시 물어볼 수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윤리적인 것이 더 이롭다고 말한다면 이는 마키아벨리와 다를 것이 없다. 자신의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람들에게 신의를 얻는 것이 유리하므로 그는 ‘척’을 행한다. 그러나 착한 ‘척’을 하기 위해 착한 행동을 한다면 그것이 진정 ‘착함’과 무엇이 다른가. 똑똑한 ‘척’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결과를 낸다면 그것이 진정 ‘똑똑함’과 무엇이 다른가. 목적의 차이인가. 만약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도덕적이어야 한다면 국가 총수의 개인적 윤리는 목적 달성을 위한 하나의 방법론일 뿐이다.

칸트식의 목적의 왕국을 생각해보자. 인간이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율적인 법칙을 부과하고, 서로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한다면, 여기서 진정‘착함’과 착한 ‘척’은 구분되고 전자가 우위에 선다. 그리고 국가 총수의 개인적 윤리성은 총수의 윤리성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훌륭한, 좋은 ‘사람’이기 위해 좇아가야할 지점이다.

오늘날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다시 조명되어야 한다면 그가 제시한 실용적이고 권모술수적인 방법론이 우리가 따라가야 할 이상적인 방법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 모습이 15세기 신민과 군주의 국가로 되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설립 목적 자체가 다른 시대를 모방해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유와 존엄성이 없는 시대의 결말이 무엇이었는지 재고해 보아야한다. 이것이 ‘군주론’을 읽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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