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마광수 지음 / 북리뷰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책을 읽기 전에 표지나, 저자, 제목을 보는 순간 편견이 생긴다. 편견이 아니라 느낌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느낌이 편견에 가깝다고 본다. 편견은 좋기도 나쁘기도 하다. 무엇에 대해 편견이 생겼다는 말은 이미 그 무엇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거나 충분히 경험해 보았다는 말이다. 우리가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도 대충 그 사람의 됨됨이를 짐작하는 것도 이전에 만나왔던 사람들과 나눈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짐작이 틀린 경우도 있지만 대게는 맞기에 편견은 도움이 되기도 한다.  

되도록이면 편견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편견 때문에 실수를 하거나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했다가 낭패를 보기도 한다. 책도 마찬가지다. 사실 표지나 제목, 저자가 취향에 맞지 않더라도 책의 내용은 굉장히 좋을지도 모른다. 드문 경우라고 하더라도 편견 때문에 좋은 책을 읽을 기회를 놓치는 일은 낭패다. 말하자면 마광수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가 바로 그러한 책이다.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지만, 접해보고 싶지도 않았기에 책을 읽으려고 하지도 않았었다. 소문난 잔칫집에 먹을 것 없다고, 언론에서 칭찬과 비난을 한 몸에 받아 논쟁의 중심이 되었던 책 치고 좋았던 책이 없었다. 특히 소설이나 수필 같은 장르의 문학작품이 그러하다. 

마광수의 책이 논란이 되었던 이유는 '에로티시즘'때문이다. 소설은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처럼 주인공들의 정사를 묘사하지 않는다. 책은 주제가 '성'이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저자의 자전적 에세이로 그가 '성'에 대해 가진 생각을 여러 주제와 묶어 풀어낸다. 책이 '야한'이유는 바로 '성'을 보여주는 것(묘사)이 아니라 '성'을 얘기하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도 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소설의 주인공은 성을 탐닉하지만 직접적이라기보다 주변을 맴돌며 관찰하는 방식으로 욕망을 표현한다. 이는 독자들에게 포르노보다 훨씬 더 선정적이고 퇴폐적이고 변태적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그는 관음증에 걸린 게 아니라 단지 성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의 말처럼 '성'이란 지금까지, 특히 한국사회에서 금기시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욕구 중 하나가 '성욕'이다. 그런데 사회는 자연스러운 것을 참고 억눌러야 할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게 한다. 마광수는 여기서 인간의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이 조금 더 행복해기지 위해, 입시와 취업과 결혼과 자식과 성공을 위해 참아야했던 욕망의 고삐를 조금 느슨하게 잡자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타인의 마음이나, 타인이 보는 자신의 모습에 집착하지 말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욕망을 돌보자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마광수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 '성'을 말한다고 볼 수 있겠다.

마광수는 배설의 중요함을 역설한다. 성적 배설만이 아니라 현대인이 겪는 스트레스도 배설의 대상이다. 배설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 발생의 원천이기도 하다. 신체적 나약함은 마광수가 배설해야할 찌꺼기이다. 그는 책의 전반에 걸쳐 그의 몸이 얼마나 나약했는지 얘기한다. 두꺼운 옷으로 몸을 가릴 수 있었던 겨울은 좋지만 갈비씨를 그대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여름은 견디기 힘들다고 한다. 생기발랄하고 힘차게 뛰어노는 대학생들을 보면서 그들이 가진 젊음을 부러워하는 모습도 그가 ‘몸’에 대해 가진 콤플렉스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그가 집착하는 페티시즘도 몸에 대한 ‘환상’과 연관해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에 대한 담론은 그에게 있어 배설출구이다. '성'을 얘기할 수밖에 없었고 '성'을 탐닉하고 관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집필만이 배설물들을 흘려 내보낼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기 때문이다.

이 책이 금서로 지정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발칙한 표현 때문일까 아니면 성을 금기시하는 사회에 ‘성’을 끄집어내서일까. 이것도 아니면 그가 주장하는 인간다운 삶이 사회에서 중요시여기는 충과 효, 정절에 반하기 때문일까. 독재타파, 민주주의 투쟁, 경제발전에 여념이 없던 사회분위기에 허무주의적 생각은 허용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오늘, 내가 보기에 마광수는 야하지 않다. 사물을 보는 관찰력과 글 솜씨는 나무랄 데가 없지만 그의 생각은 특별하지도 독특하지도 않다. 그는 그저 한 남자일 뿐, 그것도 요즘말로 ‘루저’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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