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레미 말랭그레 그림, 드니 로베르 외 인터뷰 정리 / 시대의창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Naive’하다는 말만큼 상대방을 우습게 보는 말이 또 있을까. 어쩌면 좋은 의도로 하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우리 사회에서 순진하다는 말을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순진하다는 것은 세상물정을 잘 모른다는 것이고 이는 속기 쉬운, 바보라는 의미이다. 본 의미 그대로의 순진함은 더 이상 ‘Pure'를 뜻하지도, 칭찬받을 만한 일도 아니다. 눈물이 최고의 폭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순진함 또한 일종의 폭력이요, 미성숙의 징표일 뿐이다.

촘스키가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시민들에게 요구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미성년의 상태에서 벗어나 이성으로 생각하는 성년이 되는 것.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수동성에서 벗어나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고 그것을 얻기 위해 행동하고, 사실에 대해 의문을 던져보는 것이 바로 촘스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민의 모습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기에 그는 끊임없이 비판에 비판을 거듭하다.

세상은 누가 지배하는가. 촘스키에 의하면 이제는 다국적 기업이 권력의 중심에 있다. 정치인들도 권력자들이긴 하지만 자본이 권력의 원천이고 이 자본을 다국적 기업이 소유하고 있으니 결국 정치인들도 기업의 입맛에 맞는 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현실도 별다를 것이 없다. FTA추진이나 금리동결은 모두 대기업을 위한 정책이다. 물론 구실은 좋다. 자유무역같은 경우 세계화를 피해갈 수 없는 상황에서 고립된 정책을 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문제는 자유무역을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문제는 자유무역협상 내용에 있다. 협상이 타결되면 분명 자동차나 조선과 같은 부문에서는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쌀이나 과일과 같은 농수산업 분야에서 손해를 볼 것은 불 보듯 뻔 한 일이다. 즉, 대기업은 더 많은 흑자를 내겠지만 농민들이나 영세업자들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정책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자유무역협정도 대기업을 위한 하나의 정책에 불과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대기업을 지원하는 것이 왜 나쁘냐고 묻는다. 분명 삼성은 수많은 사람들의 꿈의 직장(?)이며, 현재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이라는 변방 국가를 세계에 알려, 좋은 국가 이미지 형성에 기여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기업이 파산했을 때 이를 그냥 두고 본다면 국가적인 손실이 크다. 따라서 공공자금을 투입해서라도 대기업을 되살리는 것은 국가 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한 방안으로서 당연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정부가 대기업을 지원하는 정책을 시행하는데 있지 않다. 만약 정부가 국가 경제보호나 부흥책의 일환으로 대기업을 지원하는 방안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문제는 규제완화나 변경 같은 정책들이 대기업의 압력에 의해 즉 그들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면 분명히 문제가 있다. 민주주의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고 정부는 국민의 권리를 위임받아 정치를 한다. 그런데 정부나 국회가 국민의 뜻이 아니라 소수의 대기업의 뜻에 따라 정치를 한다면 과연 이것이 민주주의 국가인가.

촘스키는 언론과 지식인이 이러한 권력의 흐름에 동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온갖 미디어 매체를 통해 언론은 알아야 할 것을 알리고 알 필요 없다고 판단되는 것에는 입을 다문다. 그리고 정보를 전하는데 있어 객관적인 시각보다는 원하는 방향, 혹은 정해진 방향으로 사건을 분석하여 내보낸다. 한쪽으로 편향된 정보를 접하는 사람은 당연히 그쪽으로 치우친 시각을 갖게 마련이다. 물론 정보라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 객관적일 수는 없다. 모든 정보는 이미 전달자의 해석이 가미된 정보이다. 그렇다면 모든 언론에서 흘러나오는 정보는 믿을 수 없는 것일까. 아니다. 촘스키와 연구원들이 했던 것처럼 정보지를 모아서 분석해보면 어떤 정보지가 훨씬 더 객관적인지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구지 객관적인 정보지를 고집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사실 본인의 가치관과 부합하는 정보지를 구독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에 있다.

이것은 표현의 자유와 관련이 있다. 촘스키는 반유태주의도 하나의 의견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주장하는 이의 의견을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표현의 자유이다. 국내에서는 아직 친북적인 발언이나 친일적인 발언이 용납되지 못한다.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라 할지라도 이러한 발언은 매국놈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가 없다. 정당한 근거가 갖춰진 생각이라면 그 누구라도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고 이에 부당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된다. 다른 의견도 하나의 의견으로서 받아들여진다면 아무리 언론매체가 한쪽으로 편향된 정보해석을 내놓더라도 국민을 선동하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는 비판의 장도 열려있다. 무조건적인 비난이 아닌 합당한 근거에 의한 비판이야말로 언론에 의한 우민화를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미디어가 사람의 의식에 미치는 악영향은 이러한 비판의식을 해제시키는 것이다. 온갖 오락프로그램과 스포츠, 드라마, 영화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우리의 사고체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 가장 큰 문제가 문제를 깊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가 ‘개그콘서트’에서 사회, 정책적 이슈를 주제로 삼아 풍자하고 이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한 코너이다. 얼핏 보편 통쾌하게 사회적 모순점을 꼬집는 것 같지만 들여다보면 모든 문제를 쉽고, 편리하게만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회에 만연한 편견들을 아무런 여과 없이 내보내고 있다. 촘스키는 미국의 이라크 보호를 위한 침공이 정당한가라는 토론을 지켜보면서 내면에 깔려 있는 ‘미국이 이라크를 보호했다‘라는 전제를 당연시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한 명의 부자를 만들기 위해 오십 명의 가난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한다. 혁명이 일어나 체제가 전복된다고 해도 부와 가난을 짊어진 주체가 바뀔 뿐 이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결국 권력과 부는 소수를 위해 존재하고 언론과 지식인을 이들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나머지 보통의 사람들을 선동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국민에 의해 국민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쟁취한 경험이 있다. 87민주화 항쟁이 단적인 예다. 다수의 국민이 문제를 의식하고 해결방안을 찾기 위해 협력하고 이를 행동에 옮긴다면, 통치의 수단에서 벗어나 주권의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비판의식을 갖고 타인의 주장을 경청하는 것으로, 순진함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이를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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