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글을 쓰기 위해 이용하는 종이가 적어도 그것을 만들어냈던 나무와 같은 가치를 가지기를 바랄 뿐이다. - 아리오 리고니 슈테른   

단지, 많이 쓴다고 좋은 글은 아니다. 목소리가 크다고 해서 옳은 것이 아닌 것 처럼. 그렇지만 많이 쓰지 않고서 좋은 글을 쓸 수는 없다. 습작은 과정이다. 과정 없는 결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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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범죄 드라마를 즐겨 본다. 한 번은 어떤 남자가 경찰에게 찾아와 자신이 완벽한 거짓말 탐지기를 만들었다며 기기를 팔려고 했다. 한 경찰이 실험해보자며 그 남자를 취조실에 보냈다. 그리고 섹시하게 차려입은 여경찰이 들어가 그 남자를 심문했다. 거짓말 탐지기는 남자가 어떤 대답을 하느냐와 상관없이 계속 삑삑 울려댔다. 거짓말 탐지기는 그 사람의 혈압과 호흡 등 생리적 활동을 종합해 측정하는데, 이는 아릿따운 여성 앞에서 나타나는 증상과 같다. 결국 남자는 거짓말 탐지기를 들고 경찰서에서 쫓겨났다.

상대방이 하는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알고 싶은 욕구는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은 욕구만큼이나 강하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고 싶지 않아서다. 누구나 속고 싶지 않기에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인지 알고 싶어한다.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믿을 만하다는 판단이 서고 그래야 경계를 푼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 진실인지 알고 싶은 욕구도 마찬가지다. 믿음이 관계를 떠받치는 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완벽한 거짓말 탐지기는 없다. 거짓말을 평소에 능숙하게 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할 때 호흡이 빨라지거나 혈압이 올라가지 않는다. 변화를 보이는 사람은 거짓말에 미숙한 사람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수 없이 '감'에 의존해 믿고 살 수밖에 없다.

진실과 거짓을 판가름하기 더 어려운 경우가 있다. 자신이 하는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믿는 경우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현실이기를 간절히 바라다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너무나 아이를 갖고 싶은 나머지 입덧을 하고 배가 불러오는 상상임신이 그러하다. 그런데 여기서 이 여성이 거짓말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현실은 분명 임신이 아니다. 하지만 본인은 임심을 했다고 믿고 있으므로 임신했다고 말을 한다. 이것이 거짓말일까? 백과 사전식 정의에 의하면 거짓말이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상대방에게 이것을 믿게 하려고 사실인 것처럼 꾸며서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여성은 잘 못 알고 있는 것이지 거짓말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요즘 뉴스를 보면 진실공방이 뜨겁다. 산악인 오은선씨나 오서 코치와 김연아 선수, 그리고 타블로의 학력까지 서로가 서로를 '거짓말쟁이'라며 비난하고 진실을 밝히라고 아우성이다. 세 경우는 모두 진실이냐 거짓이냐가 공방의 논점이다. 하지만 더 따지고 들어가면 각기 다른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오은선씨의 경우, 분명 진실은 하나다. 오은선씨가 정상에 올랐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만이 진실이다. 단, 오은선씨가 정상에 오르지 못했으나 본인은 그곳이 정상이라고 생각했을 수는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잘 못 알았던 것이지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최악의 경우는 그녀가 산악인과 국민과, 스스로를 속였을 경우다. 물론 올랐는데 증거가 불확실해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수도 있다. 이때 가이드 세르파는 매수되었다고 봐야한다.

타블로는 다르다. 만약 타블로의 학력이 거짓으로 드러나면 이는 분명 거짓말이다. 어느 누가 자신이 대학을 다녔다는 사실을 헷갈려하겠는가. 너무나 3년 6개월 만에 학사와 석사를 끝내고 싶은 나머지 상상 학교를 다닌 것이라면 그는 어서 병원에 가봐야 한다.

김연아와 오서 코치는 또 다르다. 이런 경우가 가장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기가 힘들다. 그야말로 거짓과 진실이 서로 뒤엉켜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연아가 거짓말을 했거나 오서 코치가 거짓말을 했다기보다 오해가 오해를 낳고 그것이 불신이 되어 원망과 서운함으로 변해 생긴 문제라고 보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말은 ‘아’다르고 ‘어’다르지만 감정은 ‘아’가 ‘어’아니라 ‘님’도 되고 ‘남’도 된다.

진실과 거짓, 두부 자르듯 쉽게 자를 수 없다. 인간이 복잡한 만큼 인간이 하는 말과 행동도 복잡하다. 중요한 것은 논란 이후에 남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이다. 만약 오은선씨가 재등반에 나선다면, 김연아와 오서 코치가 화해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결말이 있을까. 비난을 거두고 조금만 더 뒤로 물러서서 이들이 믿을 만한 사람들인지, 응원할 만한 사람들인지 한번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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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 후'라는 주제로 글을 한 편 썼다. 눈 앞에 보이는 성과에 급급해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태도를 꼬집고자 했다. 2014년 수능 개편안이나 대학교 과 통폐합을 예로 들었다. 수능 개편안에 따르면 사탐과목 11과목을 6과목으로 줄이고 그 중 1과목만 택해 수능을 본다. 과목 수를 줄여서 학생들의 부담을 덜기 위함이다. 그러나 사탐을 1과목만 본다면 사탐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아무래도 수능 과목 위주로 공부하는 학생은 치러야 할 과목만 공부할 가망성이 높다. 그러면 사탐과목에 흥미를 느끼기가 더 어려워진다. 대학에서 사탐과 연계되는 과에 진학할 확률도 낮아진다. 대학에서 비인기과를 통폐합하는 것도 문제다. 비인기과목은 인문학이나 기초과학 정도가 될 것이다. 일부 대학은 당장 취업률이 높은 과의 인워수를 늘리고, 아예 대학에서 취업준비를 시키겠다고 나선 모양이다. 대학이 취업자 양성소는 아니다. 취업 문제는 정부에서 정책으로 해결할 문제이지 대학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방안들이 너무나 근시안적이라는 점이다. 인문학과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 인문학과 기초과학이 탄탄해야 실용학문도 발전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만들지 않았다면 핵폭탄은 없었을 것이다. 인문학으로 세상과 나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상상력, 창작력이 발전하지 못하고 더 나은 사회나 개인을 만들기 위한 시도도 없을 것이다. 중국이나 미국은 기초과학에 앞 다투며 투자하려고 한다는데 한국은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다.    

정부가 4대강 사업을 졸속으로 추진한다고 비난받고 있다. 임기 내에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려면 졸속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다. 청년취업률을 높이려면 쓸데없는 인문학보다 실용학문에 더 투자해야 한다. 당장 학생들이 힘들다는데 과목 수도 팍팍 줄여줘야 한다. 어디 10년 후를 내다보는 정책을 추진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내일이 불투명한데 10년 후를 공약해서 누구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가짐은 아닌지. 7,4,7 정책처럼 공약은 화끈하게 수치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인문학이 없는 '공정한 사회'가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다.  

라고, 썼다. 그리고 집에 와서 남의 서재를 들락달락하며 시간을 보냈다. 길고, 어려워 보이는 글, 왠지 읽어두면 좋을 것 같은 남의 글을 읽었다. 한 문단,, 두 문단,, 그리고 제일 밑으로 내려가 추천 횟수를 확인한다. 댓글을 읽어본다. 스크롤바를 내리고 다음 글을 읽는다. 제목 확인, 책과 저자 확인,, 한 문단,, 두 문단 ,, 제일 밑으로 내려가 추천 횟수를 확인하고 댓글을 읽는다. 글쓴이는 참 겸손한 사람이구나 생각한다.   

 추천 수가 많다고 잘 쓴 글은 아니겠지만 나도 모르게 추천 횟수가 높으면 눈이 간다. 남이 공들여 썼을 글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대충 훑어 내리고 댓글로 글쓴이의 됨됨이를 평가한다. 아, 이 얼마나 성과주의적이며, 근시안적인가. 내가 바로 4대강 가서 삽질할 사람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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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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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 속에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어릴 적 신문에서 우연히 보고는 오려서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었다. 내 손과 시선에 닿지 않는 한 사진 속의 일은 없는 것처럼 여길 수 있었다. 그 사진을 다시 만난 건 최근 퓰리처상 사진전에서다. 극심한 기근을 겪고 있던 수단의 어느 마을, 어린 소녀가 사막 같은 곳에 혼자 엎드려 울고 있다. 작고 깡마른 소녀 뒤로 독수리 한 마리가 앉아 그녀를 노려본다. 마치 소녀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이 잔인하고 충격적인 사진은 1993년 사진기자 케빈 카터가 동아프리카의 기근을 취재하던 중 찍은 것이다. ‘안아주지 못해 너무나 너무나 미안해’라는 제목으로 전시되었다. 카터는 퓰리처상까지 받았지만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왜 소녀를 구하지 않았냐.’는 협박편지와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그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죽음을 끊었다. 

사진을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소녀에게 연민을 내보인다. 심지어 이 사진으로 죽음에 이른 작가에게도 연민을 보인다. 하지만 이는 사진관에 머물 때까지다. 누구도 우울함과 칙칙함을 느끼며 생활하고 싶지 않기에 사진관을 나오는 순간 연민은 잊혀진다. 작가이자 예술 평론가인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이후 오퍼스 10)에서 이렇게 고통 받는 타인 앞에서 보이는 연민을 버리라고 당부한다. 연민을 보인다는 것은 자신이 그 고통과는 거리가 먼, 무고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책임을 느끼지 않으면 사람들은 아무리 끔찍한 타인의 고통이라도 금방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아프리카 난민이나 팔레스타인의 전쟁 피해자들의 모습을 매일 아침 텔레비전을 통해 접하면서 전원을 끄는 동시에 출근 걱정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충격을 받더라도 곧 냉담해지는 것은 그런 장면들에 너무나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사진뿐만 아니라 인터넷, 신문, 텔레비전, 영화, 게임 등 다양한 매체에서 폭력을 담은 이미지가 범람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짜릿함과 섬뜩함을 느끼기 위해 일부러 잔인한 영화를 찾기도 한다. 폭력에 익숙해지면 웬만큼 잔인한 장면으로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면 제작자들은 점점 더 냉담해지는 사람들을 자극하기 위해 더 잔인한 콘텐츠를 생산해 낸다. 이러한 악순환은 계속 되풀이 된다. 이렇게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찾고 즐기는 이유는 일종의 관음증 때문이다. 교통사교 현장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타인의 고통을 보고 희열을 느끼는 관음증이 있다. 인간의 이 욕망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고통이라는 콘텐츠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이 오늘 날 우리의 모습이다.

그런데 어떻게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면서 희열을 느낄 수 있을까. 이는 분명 양심에 어긋나지 행위다. 인간은 모든 사람들의 고통에 희열을 느끼지는 않는다. 가까운 친구나 가족의 죽음 앞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자신과 상관없는 존재, 나와 멀리 떨어진 존재의 고통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는 아시아, 중동에서 일어난 전쟁을 기념하는 사진관은 많지만 흑인 노예사 박물관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노예사 박물관은 미국에서 악행이 행해졌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으로 대중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일제시대에 희생당했던 피해자들을 기리는 추모회나 진상규명위원회는 있어도 베트남 전쟁 희생자들을 위한 모임은 찾아보기 힘들다. 죄인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타인의 고통을 재현하는 사진을 전시하거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쟁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서? 분노를 일깨우려고?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해서? 비난한다면 누구를 비난할 수 있을까. 사실 누구에게도 비난할 권리가 없다. 이라크 전쟁으로 죽은 어린아이들은 9.11테러에서 죽은 희생자들만큼이나 무고하다. 베트남전쟁에서 한국 군인들에게 희생된 여성들도 일본인 군인에게 희생당한 한국인 여성들만큼이나 무고하다. 우리 모두는 희생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누구도 비난할 자격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멀리서 바라보며 연민을 내보이는 행위를 멈춰야 한다. 그리고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아야 한다.

전쟁과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 그것을 보는 인간에 대한 손택의 통찰력은 예리하다. 그런데 단지 그 고통과 자신이 가진 관계를 숙고해보는 것만으로 냉담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며칠 전 파키스탄 영토의 1/5이 홍수로 물에 잠겼다. 1600명 이상이 죽고 20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는 지난 1월에 발생한 아이티 지진 때 보다 더 큰 피해규모다. 그러나 구호지원은 아이티의 1% 정도다. 언론은 파키스탄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낮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어쩌면 언론에서 사람들을 자극하고 이재민들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마련해주는 것이 지금 현실에서 더 필요한 방안일지 모른다. 사람들은 연민을 느끼더라도 이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곧 무관심해진다. 설사 그 고통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단지 숙고해보는 것은 결국 무관심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뭔가가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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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c2
데이비드 보더니스 지음, 김민희 옮김, 한창우 감수 / 생각의나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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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이 두렵다. 전공자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에 동의할 것이다. 공식을 만든 과학자나 물리학도들은 세계의 복잡, 다양한 현상을 간단하고 명료하게 몇 개의 기호로 표현한 공식을 보고 감탄을 한다. 그러나 비전공자들에게 공식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학창시절 근의 공식, 삼각함수 공식 등의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간단한 몇 개의 기호는 하늘의 별들처럼 수 없이 늘어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과학자들은 공식을 두고 대단한 발견이라 칭송하지만 그 기호를 현실에 적용해 이해하기가 힘든 우리들에게 공식은 꼬불꼬불한 아랍어와 같다.

데이비드 보니더스가 ‘E=mc2’를 집필한 동기가 바로 이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공식에 포비아를 갖고 있음을 보고 공식이 가진 의미를 쉽게 풀어 설명할 수 있는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E=mc2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다. 사람들은 이 이론이 대단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왜 대단한지는 모른다. 호기심을 갖고 공식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어려운 전공서적 앞에서 늘 포기하고 만다. 보니더스는 위대한 아인슈타인의 발견이 의미하는 바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책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의 업적에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랐다.

따라서 ‘E=mc2’는 이 공식에 대한 책이다. 저자는 공식을 만든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이 공식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공식이 의미하는 바를 밝히고 있다. 'E'와 '=', 'm', 'c', '2'이 각각 어떤 경위에서 발견되었으며 이것이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 아인슈타인이 이 기호들을 이용해 만든 공식의 탄생과 이 공식의 쓰임새까지 일일이 설명한다. 그의 말대로 책은 그야말로 이 공식의 전기이다. 다른 공식들이 등장하거나 어려운 개념으로 이어지지 않고 철저하게 한 공식에 집중했기에 책은 방대하지 않고 기본적인 과학지식이 없는 사람도 쉽게 읽을 수 있다. 거기다 천재였던 과학자들의 기질과 에피소드들은 재미를 더한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때에 미국과 독일이 이 공식을 이용해 핵폭탄 개발에 뛰어든 사건은 긴장감이 느껴져 극적이기까지하다.

그런데 쉽고 재미있게 쓰다 보니 내용이 부실하다. 전반적인 책의 내용이 공식과 연관이 있긴 하지만 과학자들 하나하나의 특성과 그들의 관계, 사적인 이야기들에 너무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공식에 대한 이야기보다 과학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다. 미국이 독일의 핵폭탄 개발을 막기 위해 보낸 첩자들의 이야기에 절반에 가까운 지면을 할애하는 것은 과하다 싶을 정도다. 쉽게 쓴다는 말은 어려운 공식을 쉽게 풀어 쓴다는 의미이지 어려운 부분을 뺀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런데 저자는 공식의 전기라고 하면서도 공식에 대해 충실히 설명하지 않고 겉핥기식 서술로 일관한다. 특히 공식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핵에 대한 설명이 그러한데, 저자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적어도 원자의 구성에 대해 언급을 해야 했다. 원자에서 핵이 차지하는 부분, 핵 안에 있는 중성자와 양성자, 핵력, 핵을 제외한 부분의 드넓은 빈 공간, 그곳에 있는 전자에 대한 밑그림 없이 어떻게 핵분열을 설명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독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이유는 누구도 이 유명한 공식을 이리도 쉽고 재미있게 풀어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의 과학은 전공자만이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전문화되어 이해하기가 어렵다. 시중에 나오는 과학 서적도 전공자를 겨냥한 책이 대부분이다. 이런 현실에서 보면 ‘E=mc2‘는 일반 독자층의 호기심과 지식욕을 채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책이다. 저자는 시카고 대학에서 순수수학을 전공했지만 학문적으로 따지면 전문가는 아니다.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전문가와 독자를 이어주는 중간층인 전문작가로서 그의 책 ’E=mc2‘는 중간자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보니더스처럼 전문작가가 한국에 비해 많은 편이다. 워낙 책 시장이 커서인지 과학이나 경제같이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전문화되어 버린 분야에 관해 쉽게 풀어쓰는 전문작가들이 많다. '원더풀 사이언스'도 그런 책 중 하나다. 저자는 화학, 생물, 물리, 지구과학 등 전혀 동떨어져 있다고 느꼈던 학문들이 어떻게 엮여 있는지 이 분과의 학문들이 무엇을 연구하는지 너무나도 쉽고 흥미롭게 풀어 썼다. 그녀는 이 책을 쓰기 위해 각 유명 대학의 교수들을 찾아가 면담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

아마 한국에서 이런 책을 꼽으라면 정재승 교수의 '과학 콘서트' 정도일 것이다. 물론 그는 카이스트 대학 교수이고 그 분야에 있어 전문가여서 전문작가라고 하기는 좀 그렇다. 하지만 대학 교수 중에 그처럼 일반 대중을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한 공대 친구는 '과학 콘서트'를 비웃었다. 책 표지도, 내용도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런 책을 쓰는 이유도 아마 그의 연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쉬운 책을 쓰는 사람에 대한 비웃음이 섞여 있다. 공대 학생이 이렇게 말할 정도이면 교수와 연구진들 사이에서 글쟁이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나쁠지 짐작이 간다.

아인슈타인이 한 친구에게 상대성이론에 대해 거듭 설명을 해 주었다고 한다. 친구도 이해하고 싶어서 귀 기울여 들었지만 몇 년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훗날 '내가 이해했던 것은 아인슈타인이 그 이론에 대해서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교수들이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책을 쓰지 않는 것은 어쩌면 그들이 그걸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능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전문작가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보더니스는 '돌발적인 현실과 이론을 쉽게 접목하여 사람들이 어려운 과학 주제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다.'고 한다. 너무 전문화되어 일반 대중과 점점 멀어지는 학문들을 다시 사회에 불러들이는 역할을 하는 전문작가가 한국에도 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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