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범죄 드라마를 즐겨 본다. 한 번은 어떤 남자가 경찰에게 찾아와 자신이 완벽한 거짓말 탐지기를 만들었다며 기기를 팔려고 했다. 한 경찰이 실험해보자며 그 남자를 취조실에 보냈다. 그리고 섹시하게 차려입은 여경찰이 들어가 그 남자를 심문했다. 거짓말 탐지기는 남자가 어떤 대답을 하느냐와 상관없이 계속 삑삑 울려댔다. 거짓말 탐지기는 그 사람의 혈압과 호흡 등 생리적 활동을 종합해 측정하는데, 이는 아릿따운 여성 앞에서 나타나는 증상과 같다. 결국 남자는 거짓말 탐지기를 들고 경찰서에서 쫓겨났다.
상대방이 하는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알고 싶은 욕구는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은 욕구만큼이나 강하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고 싶지 않아서다. 누구나 속고 싶지 않기에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인지 알고 싶어한다.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믿을 만하다는 판단이 서고 그래야 경계를 푼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 진실인지 알고 싶은 욕구도 마찬가지다. 믿음이 관계를 떠받치는 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완벽한 거짓말 탐지기는 없다. 거짓말을 평소에 능숙하게 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할 때 호흡이 빨라지거나 혈압이 올라가지 않는다. 변화를 보이는 사람은 거짓말에 미숙한 사람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수 없이 '감'에 의존해 믿고 살 수밖에 없다.
진실과 거짓을 판가름하기 더 어려운 경우가 있다. 자신이 하는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믿는 경우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현실이기를 간절히 바라다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너무나 아이를 갖고 싶은 나머지 입덧을 하고 배가 불러오는 상상임신이 그러하다. 그런데 여기서 이 여성이 거짓말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현실은 분명 임신이 아니다. 하지만 본인은 임심을 했다고 믿고 있으므로 임신했다고 말을 한다. 이것이 거짓말일까? 백과 사전식 정의에 의하면 거짓말이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상대방에게 이것을 믿게 하려고 사실인 것처럼 꾸며서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여성은 잘 못 알고 있는 것이지 거짓말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요즘 뉴스를 보면 진실공방이 뜨겁다. 산악인 오은선씨나 오서 코치와 김연아 선수, 그리고 타블로의 학력까지 서로가 서로를 '거짓말쟁이'라며 비난하고 진실을 밝히라고 아우성이다. 세 경우는 모두 진실이냐 거짓이냐가 공방의 논점이다. 하지만 더 따지고 들어가면 각기 다른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오은선씨의 경우, 분명 진실은 하나다. 오은선씨가 정상에 올랐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만이 진실이다. 단, 오은선씨가 정상에 오르지 못했으나 본인은 그곳이 정상이라고 생각했을 수는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잘 못 알았던 것이지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최악의 경우는 그녀가 산악인과 국민과, 스스로를 속였을 경우다. 물론 올랐는데 증거가 불확실해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수도 있다. 이때 가이드 세르파는 매수되었다고 봐야한다.
타블로는 다르다. 만약 타블로의 학력이 거짓으로 드러나면 이는 분명 거짓말이다. 어느 누가 자신이 대학을 다녔다는 사실을 헷갈려하겠는가. 너무나 3년 6개월 만에 학사와 석사를 끝내고 싶은 나머지 상상 학교를 다닌 것이라면 그는 어서 병원에 가봐야 한다.
김연아와 오서 코치는 또 다르다. 이런 경우가 가장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기가 힘들다. 그야말로 거짓과 진실이 서로 뒤엉켜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연아가 거짓말을 했거나 오서 코치가 거짓말을 했다기보다 오해가 오해를 낳고 그것이 불신이 되어 원망과 서운함으로 변해 생긴 문제라고 보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말은 ‘아’다르고 ‘어’다르지만 감정은 ‘아’가 ‘어’아니라 ‘님’도 되고 ‘남’도 된다.
진실과 거짓, 두부 자르듯 쉽게 자를 수 없다. 인간이 복잡한 만큼 인간이 하는 말과 행동도 복잡하다. 중요한 것은 논란 이후에 남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이다. 만약 오은선씨가 재등반에 나선다면, 김연아와 오서 코치가 화해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결말이 있을까. 비난을 거두고 조금만 더 뒤로 물러서서 이들이 믿을 만한 사람들인지, 응원할 만한 사람들인지 한번 지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