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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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서랍 속에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어릴 적 신문에서 우연히 보고는 오려서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었다. 내 손과 시선에 닿지 않는 한 사진 속의 일은 없는 것처럼 여길 수 있었다. 그 사진을 다시 만난 건 최근 퓰리처상 사진전에서다. 극심한 기근을 겪고 있던 수단의 어느 마을, 어린 소녀가 사막 같은 곳에 혼자 엎드려 울고 있다. 작고 깡마른 소녀 뒤로 독수리 한 마리가 앉아 그녀를 노려본다. 마치 소녀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이 잔인하고 충격적인 사진은 1993년 사진기자 케빈 카터가 동아프리카의 기근을 취재하던 중 찍은 것이다. ‘안아주지 못해 너무나 너무나 미안해’라는 제목으로 전시되었다. 카터는 퓰리처상까지 받았지만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왜 소녀를 구하지 않았냐.’는 협박편지와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그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죽음을 끊었다. 

사진을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소녀에게 연민을 내보인다. 심지어 이 사진으로 죽음에 이른 작가에게도 연민을 보인다. 하지만 이는 사진관에 머물 때까지다. 누구도 우울함과 칙칙함을 느끼며 생활하고 싶지 않기에 사진관을 나오는 순간 연민은 잊혀진다. 작가이자 예술 평론가인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이후 오퍼스 10)에서 이렇게 고통 받는 타인 앞에서 보이는 연민을 버리라고 당부한다. 연민을 보인다는 것은 자신이 그 고통과는 거리가 먼, 무고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책임을 느끼지 않으면 사람들은 아무리 끔찍한 타인의 고통이라도 금방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아프리카 난민이나 팔레스타인의 전쟁 피해자들의 모습을 매일 아침 텔레비전을 통해 접하면서 전원을 끄는 동시에 출근 걱정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충격을 받더라도 곧 냉담해지는 것은 그런 장면들에 너무나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사진뿐만 아니라 인터넷, 신문, 텔레비전, 영화, 게임 등 다양한 매체에서 폭력을 담은 이미지가 범람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짜릿함과 섬뜩함을 느끼기 위해 일부러 잔인한 영화를 찾기도 한다. 폭력에 익숙해지면 웬만큼 잔인한 장면으로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면 제작자들은 점점 더 냉담해지는 사람들을 자극하기 위해 더 잔인한 콘텐츠를 생산해 낸다. 이러한 악순환은 계속 되풀이 된다. 이렇게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찾고 즐기는 이유는 일종의 관음증 때문이다. 교통사교 현장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타인의 고통을 보고 희열을 느끼는 관음증이 있다. 인간의 이 욕망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고통이라는 콘텐츠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이 오늘 날 우리의 모습이다.

그런데 어떻게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면서 희열을 느낄 수 있을까. 이는 분명 양심에 어긋나지 행위다. 인간은 모든 사람들의 고통에 희열을 느끼지는 않는다. 가까운 친구나 가족의 죽음 앞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자신과 상관없는 존재, 나와 멀리 떨어진 존재의 고통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는 아시아, 중동에서 일어난 전쟁을 기념하는 사진관은 많지만 흑인 노예사 박물관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노예사 박물관은 미국에서 악행이 행해졌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으로 대중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일제시대에 희생당했던 피해자들을 기리는 추모회나 진상규명위원회는 있어도 베트남 전쟁 희생자들을 위한 모임은 찾아보기 힘들다. 죄인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타인의 고통을 재현하는 사진을 전시하거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쟁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서? 분노를 일깨우려고?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해서? 비난한다면 누구를 비난할 수 있을까. 사실 누구에게도 비난할 권리가 없다. 이라크 전쟁으로 죽은 어린아이들은 9.11테러에서 죽은 희생자들만큼이나 무고하다. 베트남전쟁에서 한국 군인들에게 희생된 여성들도 일본인 군인에게 희생당한 한국인 여성들만큼이나 무고하다. 우리 모두는 희생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누구도 비난할 자격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멀리서 바라보며 연민을 내보이는 행위를 멈춰야 한다. 그리고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아야 한다.

전쟁과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 그것을 보는 인간에 대한 손택의 통찰력은 예리하다. 그런데 단지 그 고통과 자신이 가진 관계를 숙고해보는 것만으로 냉담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며칠 전 파키스탄 영토의 1/5이 홍수로 물에 잠겼다. 1600명 이상이 죽고 20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는 지난 1월에 발생한 아이티 지진 때 보다 더 큰 피해규모다. 그러나 구호지원은 아이티의 1% 정도다. 언론은 파키스탄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낮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어쩌면 언론에서 사람들을 자극하고 이재민들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마련해주는 것이 지금 현실에서 더 필요한 방안일지 모른다. 사람들은 연민을 느끼더라도 이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곧 무관심해진다. 설사 그 고통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단지 숙고해보는 것은 결국 무관심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뭔가가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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