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파고스 에프 모던 클래식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 F(에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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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아...커트 보니것은 이런 작가였던가. 이전에 읽었던 그의 단편들은 호불호가 있었다. 사실 어떤 작가의 단편이건 나에겐 호불호가 있기는 했지만 거기에 커트 보니것 식의 블랙 유머와 냉소가 더해지다보니 더욱 그런 성향이 분명했던 것인데, 이번 <갈라파고스>는 완전 내 스타일이다! 어쩜 그렇게도 일관되게 인간이 지니고 있는 '커다란 뇌'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울 수 있다니...이건 뭐 그 어떤 유능한 변호사도 우리의 뇌를 커트 보니것이 주장하는 각종 죄로부터 구원할 수 없으리라.

 

   응?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분들을 위해서 잠깐 설명을 드리자면, '이야기의 전모는 이러하다'. 이 목차에서부터 커트 보니것의 천재성이 드러난다. 소설의 전지적 작가시점을 책임지고 있는 서술자는 백만년 전인 1986년, 당시의 인류가 새로운 진화로의 도약을 앞둔 시기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1986년, '세기의 자연 유람선 여행'을 위해 건조된 바이아데다윈호가 에콰토르 과야킬 항구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정박해 있다. 한때는 갈라파고스를 향한 '세기의 자연 유람선 여행'에 전 세계의 유명 인사들이 예약을 했으나 세상에 닥친 각종 위기와 재앙 중 마지막을 장식한 금융 위기 때문에 취소가 잇따른다. 하지만 과야킬의 엘도라도 호텔에는 다른 이유로 여전히 유람선 여행을 기대하며 여섯 사람이 숙박 중이다. 이 여섯 사람 중 일부는 얼마 후 불임으로 더 이상 후손을 생산할 수 없는 인류가 멸종하면서 뜻하지 않게 바이아데다윈호에 탑승하여 갈라파고스 제도의 산타로살리아섬에 고립되면서 신인류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데, 작가는 이 서술자를 통해 '이야기의 전모는 이러하다'라는 식으로 독자들을 애태우며 이야기를 감질나게 던져준다. 어찌보면 마르케스가 주로 사용하던 주술적 어조의 '마술적 사실주의'와도 비슷하다고나 할까.

 

   만물의 영장이요, 천부인권설을 주장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가 가고 사피엔스의 커다란 뇌는 모든 악행의 근원이요 치명적인 결함으로 여겨진다. 자연은 호모 사피엔스를 버리는 대신 뇌도 더 작고 수명도 짧고 지느러미로 물고기를 잡아먹는 새로운 인류를 선택한다. 이것은 진화인가 퇴화인가. 여기서 커트 보니것의 냉소적 블랙 유머가 빛을 발한다. 거기에 마지막 인류가 개발한 통역기인 만다락스가 뿜어내는 문학 작품 속 인용문은 촌철살인이요, 백만년동안 일어난 모든 일을 알고 있는 전지적 시점의 서술자의 정체는 식스센스급의 반전을 선사한다. 이렇게 독창적이고 뜬금없으면서도 재미있는 SF는 또 처음이다. 갈라파고스 제도는 다윈이 진화의 증거를 발견했다고 여겨지는 장소이고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서만 서식하는 생물들이 존재한다. 그곳이 새로운 인류의 탄생이 이루어지는 제2의 아라라트 산이 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면서도 당연하게 생각된다. 인류의 커다란 뇌가 불러오는 크나큰 재앙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어떤식으로든 인류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우연을 가장한 구원의 행운을 여기저기 뿌려놓는다. 그리하여 백만년이 지나도 인류는 비록 지금과 다른 모습이긴 하지만 자연선택을 거스르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남는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작곡할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다지 아쉬울 것 없는 자연법칙에 의해 선택된 존재로 말이다. 그러니 베토벤 교향곡 9번과 셰익스피어 없이 못사는 인간들이라면 하루 빨리 정신차려야 할 것이다, 지느러미로 물고기만 잡아먹고 살아가는 신인류가 되고 싶지 않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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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엇지 최태성 한국사 강의만화 1 : 전근대편
최태성 지음, 김연규 그림 / 메가스터디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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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성쌤하면 제대로 된 한국사 쌤으로 이미 이름을 날리고 계시는 분이다. 각종 역사 관련 프로그램에서도 활약하고 계시는데, 강의를 듣다보면 우리의 역사가 단순히 과거의 기록으로만 남는 화석이 아니라 실제 살아서 현재 우리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느껴진다. '다음엇지'는 '다음은 어찌될까'라는 뜻으로 '만화'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라고 한다. 처음 들어본 말인데, 외우기도 쉽고 발음도 착 붙어서 앞으로는 일본식 한자인 만화 대신 사용해야겠다.

 

   지금쯤 다들 눈치채셨겠지만 이 책은 최태성선생님의 한국사 명강의와 김연규님의 다음엇지가 만나 탄생한 작품이다. 1권은 구석기 시대부터 시작해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전 1910년 근대까지를 다루고 있다. 역사를 공부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약 2000여년의 역사의 큰 그림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가장 기본이 되는 방법은 나라의 흥망성쇠를 따라가면서 각 나라의 근간을 이루었던 명분, 철학, 정치, 경제, 문화를 알아보는 것이지 않을까.

 

   무엇보다 재미있다. 최태성 선생님의 강의도 훌륭한데 거기에 다음엇지까지 곁들여있으니 어느 연령대라도, 아무리 한국사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도 엄청난 몰입도를 보장한다. 한장한장 끝날 때마다 정리까지 해주니 뒤죽박죽 헷갈릴일도 없다. 이 책을 반복해서 몇번만 읽고나면 좀 더 깊은 역사 속으로 들어갈 준비가 된 셈이다. 2권은 흥선대원군을 시작으로 일제 강점기를 지나 현대사를 다룰 예정인데, 기다려진다.

 

   일제 강점기가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일조했다는 헛소리가 돌아다니는 것 같은데, 이미 우리나라 역시 조선 후기에 근대화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음을 모르는 무지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의 망언에 동조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그리 되는 것이다. 그런 이들한테 강추하고 싶다옹! (책에 등장하는 훌륭한 조연인 야옹이 좀 따라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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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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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 <허삼관 매혈기>를 읽고 대단한 작가를 발견했다고 흥분했었는데, 그 이후로 위화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질 못했는데 이번에 그의 문학작품이 아닌 에세이를 발견했다. 제목만 봐서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음악이 가지고 있는 것이 선율이고 문학이 가지고 있는 것이 서술일 것 같은데, 작가는 반대로 이야기한다. 이 책은 문학과(작가니까 당연하지만) 음악이라는 두 가지 예술 장르에 모두 조예가 깊은 작가가 문학과 예술이 서로 공유하는 영역과 좋은 문학과 음악이 갖추어야 할 자질에 관해, 다른 작가들의 문학작품과 음악작품을 분석하여 도출해 낸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서문에서 텍스트 즉 문학작품과 독서행위를 '만만'이라는 전설 속의 새에 비유한다. 만만은 눈도 하나, 날개도 하나라 혼자서는 날 수 없고 다른 만만과 짝을 이루어야만 날 수 있는 새라고 한다. 그러니까 문학작품은 눈도 하나 날개도 하나인 만만이라 그 자체로는 존재의 의미가 없고 독자의 독서행위라는 것과 짝을 이루어야만 비상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작가로서의 겸허한 마음이 느껴진다. 그래서 책의 전반부는 그가 독자라는 만만의 입장으로 또 다른 만만 즉 문학작품을 만나 비행했던 경험을 기록한 것인데, 윌리엄 포크너/보르헤스/체호프/카프카/마르케스처럼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도 있고 개인적으로 처음 들어본 후안 룰포의 작품에 관한 감상도 들어있다. 후반부에 가서는 자신의 인생에서 음악을 늦게 접했다는 고백과 함께 음악이 어떻게 자신의 글쓰기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그 다음에 문학작품과 음악작품의 비교가 시작되는데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가 바로 여기서부터이다. 와...특히 쇼스타코비치의 '레닌그라드 교향곡'이라고 불리는 '교향곡 7번'과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씨'로 풀어낸 음악과 문학의 클라이맥스에 관한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최고라고 생각된다. 적절한 선율이 없는 음악은 음표에 불과하고 제대로 된 서술이 없는 문학은 어휘의 나열에 불과하다. 작곡가는 음악의 선율은 문학의 서술과 대등하고 음악에서 서술을 발견하고 문학에서 선율과 화성을 발견하는 독자는 짝을 이루어 날 준비가 되어있는 만만이 아닐까.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특히 수록된 문학작품과 음악에 대한 경험이 없이 읽는다는 건 그저 텍스트를 읽는 것에 불과한 것 같다. 나 역시 내가 알고 있는 음악과 문학작품이 나올때는 초집중하여 읽었지만 읽지 않은 작품이나 모르는 음악이야기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당연한 말이다. 작가가 언급한 대부분의 작품들이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으니 읽고 나서 다시 위화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될듯하다. 이 책은 한번으로는 온전히 비상하기 어렵고 두번 세번 읽어야만 짝을 이루어 날 수 있는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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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바람 될 때 -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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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하나 둘 들다 보면 여러가지 변화가 생긴다, 나 자신이건 주변이건. 그 중 하나가 죽음 곁에 직,간접적으로 가까워진다는 것인데 올해만 해도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두번이나 겪었다. 결혼식보다 장례식에 가야하는 횟수가 많아지고 나와 상관 없어도 축하보다는 애도해야 할 소식이 먼저 마음에 와닿는다. 서른 여섯의 젊은 의사가 힘든 7년의 레지던트 기간의 마지막을 앞두고 있다. 뛰어난 신경외과의이자 뇌전문의인 그에게 여러 유망한 대학과 병원에서 러브콜을 보내는 중이다. 갑자가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에서 자신만만한 신경외과의 역할을 담당했던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떠오른다. 부와 명예가 바로 코앞이다.

 

   그런 앞날 창창한 폴 앞에 폐암말기라는 악마가 나타난다. 갑자기 내 앞에 이런 악마가 나타나면 난 뭘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저자가 폐암말기 선고를 받고 변화된 인생을 살면서 남긴 기록이다. 저자는 원래 의사가 될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 형, 삼촌이 모두 의사였지만 자신은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문학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했지만 의학만이 '도덕적 명상'을 '도덕적 행동'으로 바꿀 수 있는 학문임을 깨닫고 느즈막히 의학의 길로 들어선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는 꽤 많은 문학작품이 인용되어 있어 글을 더욱 밀도있게 만든다.

 

   이 책은 저자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다른 이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 사이의 어딘가에서 일생을 보내는 의사와 환자의 이야기는 담담하고 중립적이다. 실제로는 엄청난 고통과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찬 이야기겠지만 한정된 시간 속에서 더 이상 히포크라테스의 선서가 아니라 아들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자신으로서 인생을 마치고자 노력한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인간은 어리석어서 죽음이 눈앞에 보이기 전까지는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가'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물론 죽음이 눈앞에 와있는 것처럼 매순간을 살 필요는 없지만 가끔은 염두에 두어야 하는 진지한 고민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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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버 보이 - 당신의 혀를 매혹시키는 바람난 맛[風味]에 관하여
장준우 지음 / 어바웃어북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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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레이버 보이라는 언어 유희가 재미있다. 수많은 책더미 속에서 아무런 정보 없이 책을 선택하게 만들 수 있는 건 책의 제목과 표지일테니, 새삼 제목이 갖는 중요성을 실감한다. 기자였던 저자가 음식과 요리에 매혹되어 이탈리아 요리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요리사가 된다. 그리고는 사람들의 혀를 춤추게 만드는 플레이버(flavor) - 풍미, 바람난 맛을 찾아 유럽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그 여정을 기록한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전체적으로 짤막짤막한 토막이야기들인데다가 맛깔난 사진들까지 많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내가 맛본 음식이 나올때는 당시 여행의 즐거움이 떠올라 기분좋고 내가 가본 장소가 글과 사진 속에 등장할 때는 어디 달라진데 없나하면서 틀린 그림 찾듯이 꼼꼼히 보게 된다. '맛'이란 무엇일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맛'을 우우리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맛있다는 건 사람마다 다 다른데 우리가 흔히 맛집이라고 하는 곳들은 음식을 어떻게 만드는 것일까? 저자를 한걸음 한걸음 따라가다 보면 위의 질문들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어떤 음식의 맛에는 원형이 있으리라 여긴다....(중략) 어떤 음식의 맛이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와 가깝다. 의자라는 하나의 이데아(관념)은 공유하지만 머릿속에 떠올리는 의자의 형태는 각각 다르다. - 본문 249p

 

   특정 음식의 맛에 원형은 없을지언정 맛의 기본을 이루는 것들은 분명 존재한다. 최고의 맛을 찾기 전에 저자는 맛의 기본을 이루는 것들에 대한 탐험을 시작한다. 그것은 지방이나 소금처럼 어떤 물질일 수도 있고 숙성이나 발표처럼 어떤 과정일 수도 있으며 음식이나 재료를 다루는 이의 철학이나 신념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어떤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기본을 이해하고 저자가 발견한 최고의 맛들로 시선을 돌려보면 평범해 보이는 굴 하나가, 뒷다리 햄 한조각이 뭐가 그렇게 최고인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최고의 맛을 만나고 나면 책의 뒷부분에서는 음식과 관련된 짧은 에피소드와 예로부터 서민들의 삶을 위로했던 음식들에 관한 기록들을 만나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약간 아쉬운데, 너무 잡지 기사처럼 글을 썼다고나 할까. 좀 더 심층적이고 밀도 있는 인문학적 글이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 그래도 저자의 바람난 맛을 찾는 여행이 이걸로 끝은 아닐테니, 본격적인 플레이버를 다루기 전 에피타이저 같은 느낌으로 다가가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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