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러스 웨이즈의 일 년
세라 윈먼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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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술적 리얼리즘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환상 소설의 성격을 지닌 이 작품은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표적 작품인 <백년 동안의 고독>을 떠올리게 된다. 소설의 문체나 형식은 전혀 닮은 구석이 없어보임에도 불구하고 100년동안 계속되는 가문의 고독을 종식시킬 돼지꼬리 달린 아우렐리아노를 기다리는 부엔디아 가문처럼 이 작품에서는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숙명처럼 기다리는 90세를 목전에 둔 마블러스 웨이즈라는 노인이 등장한다.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는 따뜻함이나 위로 같은 것을 느끼거나 문장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반면, 이 책은 모든 문장이 아름답고 서사적이며 따뜻함과 치유의 힘을 지닌 스토리를 담고 있다. 마음을 쿵 하고 내려앉게 했던 시적인 문장 몇가지만 인용해볼까..

 

그 두마디 말에서 참으로 멋진 맛이 난다고 그는 생각했다

 

푸른 곰팡이 포자가 그녀의 눈 앞에서 뒷소문을 퍼뜨리고 서로 입맞추고 몇배로 불어났다

 

끝없이 이어진 길이 신발 밑창에 새겨졌다

 

낮잠의 안개가 나무의 진액처럼 끈끈하게 붙은 채로..

 

그녀는 잠시 시간을 달라고 했다. 지나간 시간과 현재의 시간 사이의 혼탁한 베일을 걷아낼 수 있도록

 

   가장 어려운 시대였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0년대 후반,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상처입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미 아흔을 바라보면서 세인트 오피어라는 마을에서 꿈이 보여주는 믿음의 대상을 기다리는 마블러스 웨이즈, 정작 본인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전쟁 중 만난 죽어가는 병사가 남긴 편지를 그의 아버지에게 전해주고자 콘월까지 오게되는 프랜시스 드레이크, 드레이크가 사랑했으나 결국 그를 속이면서까지 그의 곁을 떠나는 미시, 오래 전에 떠난 고향, 세인트 오피어에 빵을 굽기 위해 다시 돌아오는 여성 피스.. 이들을 포함해서 상처 투성이 인간들이 서로를 보듬고 위로하는 이야기들이 시종일관 담담하게 서술된다. (사실 가끔은 생각지 못한 유머가 있어 놀라기도 한다)

   무시무시한 단 한 줄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보기 위해 <백년 동안의 고독>을 집어든 전적이 있는 독자라면 마블러스가 90세가 되기까지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집시 카라반과 보트창고를 지켜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기 위해 이 책도 기꺼이 선택하리라고 본다. 드레이크 = 슬픔이 드레이크 = 조금은 더 행복해짐으로 바뀌는 순간을 목도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경이로운 길'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누군가와 일년을 함께 보내는 일은 그 자체로서 환상일 수 밖에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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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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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랫만의 추리물 선택인데, 홍콩 작가의 추리물은 처음이다. 학생 때는 주로 셜록이나 루팡 혹은 미스 마플 등이 나오는 영국 추리소설이 전부인 줄 알았고 한동안은 미야베 미유키나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인간을 이야기하는 추리물에 심취했었다. 물론 여전히 미미 여사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찬호께이는 굉장한 작가라는 이야기만 들었지 실제 책을 잡는데 시간이 좀 걸린 셈이다.

   한마디로 대단한 작가라는 것은 이 책 한권만으로도 입증되었다고 생각한다. 첫장부터 주인공 형사가 암 말기 환자로 혼수상태에 빠져있다니.. 이렇게 대담한 수를 두는 작가 역시 처음이다. 제목인 13.67이 의미하는 바는 2013년과 1967년인데, 이야기는 2013년으로 시작해서 홍콩의 조직 폭력 세력이 판을 치던 2000년 초,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던 1997년, 강력범죄가 들끓던 80년대, 홍콩정부가 부패 경찰들을 타진하기 위해 염정공서를 설립해 그들과 정면으로 충돌하던 70년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1967년 친중국 성향의 좌파들이 일으킨 67폭동까지. 이렇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생의 마지막을 앞둔 관전둬 형사의 족적을 하나하나 밟아간다. 각각의 사건들은 언뜻 보기에 독립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과거의 사건은 나무의 진액처럼 끈끈하게 붙은 채로 다음 시대로 이어진다. 독자는 그걸 되짚어 가기 때문에 마치 영화를 거꾸로 돌려보는 듯한 착각 속에서 혹여 잃어버린 시간은 없는 지, 시대를 뛰어넘을 때마다 잠시 혼란스럽다.

   '관전둬의 일생이 마치 홍콩이라는 도시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진다는 옮긴이의 말처럼 저자는 관전둬의 일생을 통해 홍콩이라는 사회를 그려내는 사회파 추리소설의 모범답안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트릭에 놀라고 각 시대를 지나면서 알게 되는 연결 고리에 감탄하고 관전둬의 날카로운 추리력에 혼을 빼앗기는데, 그 중에서도 최고봉은 책의 맨 마지막 문단이 아닐까. 책의 마지막을 읽자마자 여러분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스스로의 기억이 맞는 지 확인하고 싶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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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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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나 익숙한 런던의 채링크로스 거리. 그 거리 84번지에 위치한 절판 서적 전문 고서점 마크스가 있었다고 한다. 언제 이 서점이 없어졌을까. 내가 처음 채링크로스가에 발을 내딛던 94년에도 이미 서점은 존재하지 않았을까. 이야기는 1949년, 그러니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미국에 사는 가난한 작가 헬렌 한프가 런던의 고서점에 중고 서적을 구하는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편지를 보냈던 헬렌도 편지를 받았던 프랭크와 마크스 서점의 다른 가족들도 이렇게 시작된 한통의 주문 편지가 20년동안 우정을 나누는 편지로 이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영국보다 물자가 풍족했던 미국에 살았던 헬렌은 여전히 배급제로만 식량과 생필품을 구할 수 있었던 런던의 마크스 서점 식구들에게 책을 보내준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식료품을 보낸다. 그녀가 서점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녀의 천성이 유쾌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책들을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 클릭 몇번으로 구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만약 지금 이 세상 어딘가에 마크스 서점과 같은 곳이 있다면 당장 편지를 써서 책을 주문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혹 채링크로스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시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

 

   '영국 문학 속의 영국'을 찾아, 마크스 서점과 친구들을 찾아 런던에 가고자 했으나 결국 프랭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지 못한 헬렌이 런던에 가는 친구에게 했던 부탁이다. 찡하다. 프랭크가 세상을 떠나고 프랭크의 큰 딸 실라가 헬렌에게 보낸 69년 10월이라고 날짜가 적힌 편지를 마지막으로 20여년 동안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막을 내린다. 지금은 서점이 있었던 자리에 기념 동판만 남아있지만 헬렌과 프랭크의 우정을 기억하는 수많은 독자들로 채링크로스가 84번지는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고 한다. 

   헬렌, 프랭크 그리고 마크스 서점 가족들,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 언젠가 채링크로스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지금까지 수많은 독자들이 전달했을 헬렌의 마지막 부탁을 저 역시 기억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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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전, 그 법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다나카 이치로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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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 살(사실은 예순 일곱 살)의 위대한 갈릴레오는 지구의 운동을 발견했다는 죄로 이단 심문소의 눈 밖에 나 옥고를 치렀다. 무지가 권력으로 무장할 때만큼 인간의 본성이 추락하는 경우는 없다"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했다가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형을 받았고 재판장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했다는 일화는 아마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은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라는 설도 떠돌았다. 이 책은 정말 400년 전, 그 법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최대한 증거에 입각해 사실을 전달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계몽주의가 유럽을 휩쓸던 18세기, 나폴레옹은 계몽주의에 경도되어 과학을 부정하고 신앙을 권력의 한 수단으로 이용하던 가톨릭 교회의 타락과 거짓을 대중에게 알리고자 갈릴레오의 재판 기록을 바티칸으로부터 약탈하게 된다. 라틴어와 이탈리아어로 기록된 재판 기록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으나 불행히도 그 작업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폴레옹은 실각하게 되고 갈릴레오의 재판 기록은 많은 부분이 소실된다. 바티칸에서는 약탈당한 갈릴레오의 재판 기록의 반환을 끈질기게 프랑스에 요구하는데, 도대체 바티칸은 왜 그렇게 그 재판의 기록을 회수하려고 했을까.

   저자는 본격적인 재판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갈릴레오가 받은 재판이 종교 재판이었음을 강조한다. 당시의 종교재판은 유죄와 무죄를 결정하는 재판이 아니라, 이미 피의자는 이단으로 고발당하는 즉시 유죄로 인정되며 이단 혐의가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품은 사상을 검증하고 다시는 이단적 사상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장소였다. 즉 피고는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며 교회는 타락한 영혼을 구제하는 것이 종교 재판의 역할이었다는 것이다. 


   비록 많은 문서가 소실되었지만 저자는 남아있는 문서를 참고하여 400년 전, 그 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최대한 되살려낸다. 1632년에 시작된 심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615년에 있었던 갈릴레오가 이단을 신봉하고 있다는 니콜로 로리니의 고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고발에 대해 1616년 추기경이 선고했던 통고문을 정확히 이해해야 1632년에서 33년에 걸쳐 진행된 갈릴레오의 재판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의 의도는 갈릴레오나 가톨릭 중 어느 한쪽을 극단적으로 옹호하거나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비록 가톨릭이 갈릴레오를 이단 심문소 재판정에 세우기는 했지만 그의 지식과 명성을 존중하여 갈릴레오가 죄를 인정하는 선에서 마무리 하려고 하였다는 것을 보면 강렬한 대결구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갈릴레오의 고집으로 심문은 3차까지 끌게 되는데, 심문을 맡았던 추기경 등이 법정 밖에서 갈릴레오를 설득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기서도 가톨릭은 나름 갈릴레오의 가벼운 선고를 위해 노력한 듯 보인다. 더군다나 이단 포기 선서를 한 다음 날 갈릴레오는 바로 석방되어 감옥이 아닌 가택 연금형으로 감형되기까지 한다. 물론 가톨릭이 성서를 핑계로 과학의 발전을 탄압한 것은 사실이지만 갈릴레오의 재판만큼은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들이 약간은 억울한 것이 아닌가라는 것이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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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당나귀 현대지성 클래식 22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지음, 장 드 보쉐르 그림, 송병선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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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 역사상 최초의 장편소설'이라는 어마어마한 타이틀을 가진 이 작품은 기원 2세기 로마시대의 작품으로 최초의 장편소설이라는 영예말고도 후대의 많은 작품들에 영향을 끼친 작품이라고 한다. 액자식 구성이라는 점도 그렇고 16~17세기에 유행한 피카레스크 소설이라는 장르가 바로 이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하니 천년을 뛰어넘어서까지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작품은 '나'로 지칭되는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가 겪은 모험담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저자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여 마치 실제 있었던 일처럼 밀착감이 느껴지며 자신에 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여행 중 만난 다른 이들의 이야기까지 담겨 있어 더 풍성한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피카레스크 장르라고 부를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으로는 세속적이고 마법적인 것을 좋아하던 루키우스가 마법을 잘못 쓰는 바람에 당나귀로 변한 후 겪게 되는 산전수전으로 인해 자신의 세속적인 것을 탐하던 속성을 뉘우치고 이시스 여신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인간이 되어 금욕적인 생활을 통해 입신하게 된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쿠피도와 프시케의 이야기인데, 이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큐피트와 프시케 버전과는 약간 다른 내용이다. 아마 이 작품 속 쿠피도와 프시케의 이야기가 후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을 해본다. 이외에도 선정적이거나 풍자적 이야기들이 다양한 인물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데, 이는 아마도 당시에 구전으로 떠돌던 여러 이야기들을 모아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튼 쉽게 접할 수 없는 고대 문학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고, 이런 귀중한 작품들을 꾸준히 출판하는 현대지성의 안목이 고마울 뿐이다.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는 평생 소장용으로 손색이 없는 작품들이라 다음을 미리 기대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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