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정의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특히 대학시절에는 옳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 숙고로 법학에 관련된 수업을 많이 듣곤하였다. 거기에서 정의에 대한 질문에 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존 롤스의 <정의론>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두께에 질려버려 읽기를 포기하였다. 그러나다 이번에 출간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보자마자 눈에 번쩍 띄더라. 그래서 그것을 천천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도데체 옳다는 것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이 책의 제목이 그대로 보여주는 것처럼 시대가 흐를수록 정의에 대한 논의를 좀더 복잡해지고 단순한 하나의 이론으로 머물지 못하기 때문에 도데체 그러면 '정의란 무엇안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책은 저자 마이클 샌델의 하버드 강의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이다. 사례로부터 시작하여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반론을 제시하면서 여러 가지 철학 이론들을 소개하고 그 이론들에 대한 장점과 단점을 소개하는 형식을 지니고 있다. 이론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현실적 사례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고 현실성을 띄며 그렇다고 깊이 없는 표면적인 논의에만 그치지 않는다. 점점 내용이 진행될수록 좀더 깊은 철학적 사고를 요하도록 우리를 초청한다.
이 첵에서 정의의 문제를 논할 때 그때 세가지 카테고리로 나누에 정의에 대해 생각한다. 첫째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정의요 둘째는 자유주의 관점에서의 정의요 셋째는 도덕주의 관점에서의 정의이다.
첫 번째 공리주의의 관점에서 본 정의는 제러미 벤담이 주장한 이론으로 지금까지도 살아서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책을 보기 전까지는 공리주의에 대해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대표적 화두만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공리주의라는 것은 행복이라는 것을 수치와하여 그 행복이 많은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곧 정의라고 말한다. 즉 될수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느낄는 쪽으로 선택하는 것이 곧 정의라는 것이다. 이것은 쾌락주의와도 연결이 되는데 사람의 마음속에 고통이 아니라 쾌락을 느끼는 것이 곧 행복이며 이것이 정의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공리주의적 정의는 매우 피상적이고 문제가 많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내 마음이 좋은 것을 느끼는 것이 곧 정의라는 것이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고 꿩잡는 게 곧 매라는 식이다. 이것은 정의를 논할 때 심각한 결함이 있다. 느끼는 쾌락이 저급하다할지라고 그것이 곧 행복이요 정의라는 것은 도덕적으로 심각한 오류가 발생한다. 만약 내가 살인을 할때 쾌락을 느낀다면 그것또한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으로 수치화 될수 있다는 말이다. 벤담의 공리주의의 관점을 개량한 존 스튜어트 밀의 개량 공리주의가 나오긴 했지만 공리주의는 인간을 수치화하고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함으로 정의를 말하는데 심각한 오류를 보인다. 특히 공리주의의 주창자인 제러미 벤담은 자신의 사후에 자신의 시신을 보존하여 그것을 전시하도록 엄격하게 지시를 내렸는데 그 내용을 보면 그의 인격에 심각한 결함이 있어보이기 까지했다. 그의 추종자들을 그의 사후에 열린 벤담 학회의 방부처리된 그의 시신을 참석시킴으로 벤담의 자의식에 응하였다. 다소 엽기적은 그의 행동은 그의 이론 공리주의에서도 그래도 반영되는 것 같았다.
두 번째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본 정의는 주로 자본주의 시장논리에 의해 논의된다. 결국 시장은 수요자와 공급자의 합의와 거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행위임으로 이것을 국가가 개입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아무리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은 시장에 의해 당사자들끼리 합의와 거래에 의한 행위였으므로 그 자체가 공정한 행위라고 주장한다. 이것을 철저히 시장논리에 의한 것으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결여되어 있다. 이것을 이 책 처음에 시작하는 멕시코 만에 있었던 폭풍 허리케인 찰리에 의해 플로리다가 큰 피해를 입게되었는데 이 피해로 인해 가격이 폭등하고 생필품 가격이 크게 올라가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시민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가격폭등현상은 피해를 이용한 불공정한 거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시장에 의해 재화와 용역이 분배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재난을 당한 사람에게는 화가나는 일이지만 자유로운 시장의 관점에서 볼때는 그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논하는 정의에 대해서도 심각한 오류가 발생한다. 그것은 결국 돈의 논리, 자본의 논리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의 이익을 위해 시장을 이용하고 어떠한 공정한 조정없이 단시 시장에 의해 모든 재분배가 정의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탐욕을 정당화 시키는 왜곡된 정의가 될수 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도덕주의 관점에서 정의를 논하는 것으로 그것은 칸트에 의해서 깊이 정의된다. 칸트는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는 도덕이란 행복의 극대화를 비롯한 어떤 목적과도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도덕은 인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고 존중하는 것이다. 인간은 행복과 자유의 수단이 될 수 없으며 그 자체가 이미 목적인데 이것은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는 존엄성을 지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칸트는 공리주의와 자유주의를 철저히 비판하면서 공리와 자유를 새롭게 정의한다. 공리란 우연히 생기는 욕구에서 출발하는 데서 도덕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참된 동기에서 나온다고 주장하고, 자유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부여한 삶의 질서를 따를때 그것이 자율이며 진정한 자유가 된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인 논의를 그의 책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에서 참된 도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의무동기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참된 정의와 도덕은 이 의무동기에서부터 나온다고 한다. 의무동기는 어떤 것을 행함에 있어서 그것을 행하는 것 자체가 도덕적이라는 동기에서 나오는 것을 말한다. 내가 사람들을 도와줄때 그것이 나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더라도 단지 그 행위 자체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동기가 바로 의무동기이고 그 의무동기가 도덕의 기초가 되고 정의의 기초가 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정의라는 것이 칸트에게서 정리되고 좀더 올바른 정의 이론이 성립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보면서 현재 정치철학에서 논의되는 정의라는 것이 현실적 논리에 많이 오염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정의라는 것이 자본과 이익, 그리고 탐욕과 쾌락의 논리에 상당부분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 참 씁쓸했다. 정의를 논할 때 조차도 인간의 탐욕과 쾌락이 중요한 이론중의 하나로 등장한다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이긴 하지만 정의를 바른 초석위에 세우기에는 부실한 기초같이 보였다. 이 책 <정의란 무엇인가> 초반부에 고대 정의론은 '미덕'에서 출발하고 현대 정의론은 '자유'에서 출발한다고 하였다. 정의를 논할 때 고대 철학자들의 논의에서 출발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정의에 대해서 논할 수 있는 기초가 될것 같기 때문이다. 현대의 정의는 자본과 시장논리에 의해 이미 많이 오염되어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재밌고 유익하게 읽었다. 정말 하버드에서 수준높은 강의를 듣는 기분이였다. 정의에 대한 현실적인 이론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