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공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에리카 종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에리카 종의 이 소설 <비행공포>는 성적인 표현이 적나라하고 거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불편하거나 야하다는 생각보다 솔직하고 대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타인의 시선으로 인해서 감추어두었던 욕망들을 솔직하게 표현되어지는 것 같았다. 에리카 종의 거침없는 펜끝을 통해서 ‘이드’속에 감추어진 욕망의 자아가 문학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는것 같아서 유쾌하기 까지했다. ‘지퍼터지는 섹스’, ‘나의 oo'(이 표현은 너무 직설적이여서 읽어보신 분들은 웃으실 것이고 읽어보지 못하신 분들은 머리에 떠오르는 야한 단어로 인해 피식 웃어버릴 것이다.), ’핥아주다‘ 이런 표현들은 감히 내볕었다가는 점잖치 못한 비사회적 언어를 사용하는 무례한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언어여서 꽁꽁 무의식속에 구겨넣어지는 말들이 아닌가. 아마도 내가 느끼는 것처럼 이러한 에리카 종의 거침없는 표현들이 불편하거나 저질스러운 소설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 것은 무의식속에 감추어진 본능적인 언어들을 분출하는 것이 자신의 욕망을 대신 표현해주는 것이여서 그런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페미니즘 소설이여서 남자들이 불편할 것이라는 소개글이나 평가들은 어쩌면 솔직한 성적인 언어의 표현이 이 사회가 통념상 가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들로 인해 재단되어 졌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내가 느꼈던 솔직하거나 대범하거나 통쾌하다는 느낌은 어쩌면 문학이라는 하나의 예술장르를 통해서 표현할 수 있는 예술적 프리즘을 통과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이라는 장르를 통한 욕망의 거침없는 분출은 그것을 보는 독자들에게 들이키 않고 꽁꽁 숨겨놓은 성적욕구를 문학이라는 합법적 장치를 통해서 분출되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비행공포>의 주인공 이사도라는, 곧 저자인 에리카 종이며 이사도라의 생각과 행동은 곧 에리카 종의 것이다. 그 주변의 남자들, 특히 남편은 그의 실제 남편과 거의 동일하고 그의 주변의 정신분석학자들도 그의 주변 실제 남자들과 거의 동일하다. 이 소설은 에리카 종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속 남편 베넷과 이사도라가 늘 상상속에서 함께 섹스를 꿈꾸는 남자 에이드리언을 중심으로 비행기 안에서 여러명의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심리적, 정신적 자유가 드러나며 이사도라의 언니와 동생과의 유쾌하지만 과격하고 또한 상당히 지적인 대화를 통해서 이사도라는 적어도 자기에게서 매우 정직하고 당당한 여자임을 드러낸다. 나는 <비행공포>를 보면서 그녀가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받는 것은 그녀가 정신적인 결함이나 이상이 있다기보다는 자신에게 너무나도 정직하여 그것이 비정상적으로 비춰진다는 것이였다. 아이를 가지는 것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쳐야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곧 글을 쓰는 삶을 포기하는 것이기 당당하게 그것을 한시적으로 거부하며 만약 아이를 가지므로 평생 글쓰는 자기의 삶을 포기해야 한다면 차라리 아기를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분명히 이러한 주장은 지독히도 이기적인 주장처럼 들리지만 이 말은 이기적이고 자아중심적인 사고방식이라 할지라도 바로 그러한 사고방식이 사회적 통념에 들지 않는 에리카 종의 것이기에 정상과 비정상사이에서의 갈등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저자 에리카 종의 생각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진실을 말하는 건 위험하면서도 필요한 일이다. 내게 <비행공포>가 그랬다. 이 책을 쓰는 내내 나는 무척 두려웠고, 책이 출판된 직후에는 열렬한 찬사와 날선 비난을 동시에 감당해야 했다. 솔직함이 항상 인정받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그로 인해 감옥에 갈 수도 있기에. 그러나 진실을 말하지 않는 작가는 오래갈 수 없다. -에리카 종-

 

<비행공포>는 도발적이며, 욕망을 건드리지만 대리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들며 상당한 지적인 즐거움을 준다. 이 책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대리적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은 김두식 교수가 쓴 <욕망해도 괜찮아>에서 말하는 ‘지랄 총량의 법칙’이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지랄총량의 법칙’이란 인간안에 내재되어 있는 일정량의 도발적인 욕망을 분출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옆으로 터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계를 넘지 않는 선에서 욕망을 분출하는 것은 오히려 건강에 좋다는 법칙이다. 아마도 대리적 카타르시스는 사회적 자아인 슈퍼에고에 의해 욕망을 따르는 자아인 이고로 구겨넣어져 버린 감추어진 욕망이 간접적으로 해소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행공포>가 왜 출간 당시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많이 읽히고 회자되는지 알 것 같았다. 편견없이 본다면 자아가 강한 한 여자의 욕망에 정직한 자아에 대한 여정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 읽힌다면 페미니즘이나 여성주의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페미니즘이나 여성주의 소설로 읽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문학이라는 순화장치를 통해 한번 걸러졌기 때문이지 현실적으로 재현된다면 강한 페미니즘이라고 분명 거부할 것이다. 모순이라면 어쩔 수 없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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