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개밥바라기별

 
석영 작가의 사춘기부터 21살까지 청춘의 방황을 그렸는데 누구보다도 심한 홍역을 치룬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나 자신의 이야기 마냥 가슴을 울린다. ! 그래, 그 시절 나도 그랬었지.. 공감하기도 하고 이건 일탈이 좀 심하지 않나! 평범한 청소년기를 보낸 자에겐 소설이니까 가능한 이야기지 하는 부분도 있다. 어쨌든 퇴근 기차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이따금 읽다가 멈추곤 차창 밖의 스치는 풍경을 응시하며 연상의 나래를 펴 곤하며 스스로 즐거워했다.

작가는 글 쓰는 재주와 차치하고라도 청소년기에 평범한 사람은 엄두도 못 낼 다양한 인생경험을 스스로 선택하여 행한다. 당시는 길을 찾기 위한 방황이었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소설에 현실감과 생동감을 불어넣어 살아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내 생애 전부만큼 나는 사랑하지 못하였네

철이 들기도 전부터 너무 남에게 휘둘리고 자랐으니 제 눈으로 보는 기술을 습득하려고..

우리는 어째서 경치 좋은 호숫가나 모래사장이 근사한 해수욕장에 가면 아무생각도 안 나고, 지저분하고 시끌벅적한 부둣가나 뱃사람들의 선술집에 가야  정서가 발동되는지..

나는 나중에 베트남에 가서 산과 바다의 아름다운 경치가 얼마나 밋밋하고 의미가 없는지 알게 되었다. 어디에서나 기억은 거기 있는 사람과 함께 남는다.

인호나 나처럼 온몸을 던지는 일은 곁에서 지켜보기에는 신나는 모험이었지만 그들 자신은 끝내는 신중한 충고를 하며 한걸음 비켜섰다.

이를테면 연애와 결혼, 성공과 실패, 출세와 낙오, 사랑과 야망 따위의 전형들이 결국은 한강을 둘러싼 자본주의 근대화 사회의 풍속도를 그려내고 있음을..

그 길은 내가 어릴 적부터 어렴풋하게, 이건 빌딩가의 대로처럼 너무도 뻔하고 획일적이라고 느껴왔던 삶으로 가게 될 확실한 도정이었다. 그러나 벗어났을 때의 공포는 당시에는 견디기 힘들었다.

막걸리 사발이 몇 잔씩 돌아간 뒤에야 이야기가 활발해졌고 술집 안은 눈발을 머리에 얹고 들어선 젊은이들로 가득 찼다.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내리는가

언제나 충족되지 않는 미열의 나날. 나는 그녀가 해를 떠오르게 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던 말들을 그제서야 실감했지

밤에 어둠이 짙어지면 방 안에 남포등을 켜놓고..

마당이나 별채로 이동하는 낭하에서 부딪치면 밤새 함께 자고 일어났는데도 마주 웃으며 인사한다. 안녕. 어디 가요? 저 뒤 뜰에요. 내가 그리운 것은 이런 애틋함이다.

대단한 건 아니구 그저 이렇게 사는 걸 한번 바꿔보려고 해. 말하자면 기러기라든가 산토끼라든가 다 스스로 알아서 살잖아.

그에게 산다는 게 두렵거나 고생스러운 것도 아니고 저 하늘에 날아가는 멧새처럼 자유롭다. 이른 봄에는 바닷가 간척공사장을 찾아가 일하다가, 오월에 보리가 팰 무렵이면 시골마을로 들어가 보리 베기를 도우며 밥 얻어먹고, 여름이면 해수욕장이나 산간에 들어가 일자리를 찾고, 늦여름부터 동해안에 가서 어선을 탄다. 오징어떼를 따라 남하하다 다시 농촌으로 들어가 가을추수를 거든다. 황금들판에서 들밥에 막걸리 마시고 논두렁에 누워 곤한 낮잠 한숨 때리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단다. 그리고 겨울에는 다시 도시로 돌아온다. 쪽방을 한 칸 얻고 드럼통과 손수레 세내어 군고구마 장수로 나선다.

살아 있음이란, 그 자체로 생생한 기쁨이다. 대위는 늘 말했다.
사람은누구든지 오늘을 사는 거야.

뭘 하러 흐리멍텅하게 살겄냐? 죽지 못해 일하고 입에 간신히 풀칠이나 하며 살 바엔, 고생두 신나게 해야 사는 보람이 있잖어.

어부들은 양은그릇에 찰찰 넘치게 소주를 부어 단숨에 마시곤 했다. 나는 겁이 나서 반그릇쯤 채워서 마셨는데 처음에는 술이 확 올랐다가 작업하면서 대번에 깨버렸고 혼몸에 활기가 돌았다.

대위와 뱃전에 나란히 서서 파랑새담배 한 대씩 물고 멀리 가물거리던 항구의 불빛을 바라보던 때, 나는 내 힘으로 살고 있다는 실감 때문에 담배연기를 길고 거세게 내뿜곤 했다.

소주 두 병을 박스에서 뽑아다 아직도 꿈틀대는 오징어 한 마리를 식칼로 쑹덩쑹덩 서너 토막으로 큼직하게 썰어서는 쟁반 위에 던져놓았다. 우리는 병째로 들고 꿀꺽이며 소주를 넘기고 오징어를 초장에 찍어 우물우물 씹었다. 그제서야 일 끝난 뒤의 나른한 피로가 기분좋게 어깨와 장딴지로 퍼져갔다. 목마르고 굶주린 자의 식사처럼 맛있고 매순간이 소중한 그런 삶은 어디에 있는가.

땅거미 질 무렵의 아름다운 고즈넉함을 더욱 연장하고파.. 섬뜸, 달여울 다락골

나느 이제 스무살이 넘어서야 책을 벗어나 고되게 일하는 삶의 활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도회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벽지에서 우리네 산하의 아름다움과 함께 자신을 다시 발견해 가는 과정이었다. 나는 불과 몇 달 동안에 수많은 낯선 사람들을 내 가슴 깊숙이 끌어안았다.

헤어지며 다음을 약속해도 다시 만났을 때는 각자가 이미 그때의 자기가 아니다. 이제 출발하고 작별하는 자는 누구나 지금까지 왔던 길과는 다른 길로 갈 것이다.

변변한 일자리는 다 끝났다. 독립된 성인이 되는 길은 한정 없이 늘어나버렸다. 젊음이란 불확실성의 안개에 둘러싸여 있는 존재이고 선택에 따라서는 무한한 자유와 엄청난 억압에 짓눌려 있다. 성인이 되는 길은 독립운동처럼 험난하고 외롭다. 대부분 그 무렵의 연애는 첫사랑이라고 불리면서 애처롭게 좌절하게 되어 있다.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하고픈 일을 신나게 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태어난 이유이기도 하다.

저녁 무렵 해가 지자마자 서쪽하늘에 초승달과 더불어 나타나던 정다운 나의 별, 개밥바라기별(새벽에 뜨면 샛별). 땅거미 질 무렵은 세상이 가장 적막하고 고즈넉해지는 순간이다.

젊음의 특성은 외면과 풍속은 변했지만, 내면의 본질은 지금도 별로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개밥바라기별의 이미지가 독자의 가슴 속에 물기 어린 채로 달려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읽으면서 밑줄 친 부분을 적어놓고 보니 이 소설은 청소년이 태어난 이유를 찾아가는 방황의 여정을 아프게 펼쳐 놓았다. 사람살이의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우선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는 것, 또한 우선 가기 편한 길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불태울 수 있는 자신만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러기나 산토끼 조차도 다 스스로 알아서 자연스럽게 산다. 그런데 하물며 인간이 그리 살지 못하겠는가? “살아 있음이란, 그 자체로 생생한 기쁨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오늘을 사는 거야.” 지금 이순간 살아있음을 실감하며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대위의 입을 통하여 작가는 말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인생을 그렇게 살아 갈 수 있을까? 답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자신이 유일한 존재인 만큼 자신에게 맞는 삶의 방식도 제각각 일 터이다.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든 살아있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사는 삶이 좋은 삶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청춘이여 그 길을 찾아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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