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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의 문화사
아노 카렌 지음, 권복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7월
평점 :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전염병의 문화사>는 인류를 끊임없이 위협해온 각종 전염병들을 다룬 것이다. 문명 발달의 역사는 사실 전염병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인류가 환경을 변화시키거나 행동양식이 바뀌는 경우-예컨대 도시에 몰려살기 시작했다든지-어김없이 전염병이 인류를 공격했다. 서로 다른 환경에 살고있던 집단간의 접촉도 서로에게 무서운 전염병을 전파시켰다. 지구가 거의 다 파헤쳐지고, 사람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게 된 지금은 더이상 새로운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는 것일까? 저자는 아니라고 한다. 전염병을 일으키는 미생물들 또한 거기 적응해 변종을 만들어낼 것이고, 그것들이 인류를 공격할 것이란다.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사스나 조류독감 파동은 저자의 생각이 맞음을 말해준다. 저자는 전염병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자 이 책을 썼겠지만, 안타깝게도 너무 지루해서 별로 경각심이 생길 것 같진 않다. 난 한번 들어본 가락이라, 그리고 내가 원래 본전을 유난히 생각하는 놈인지라 끝까지 읽었지, 웬만한 인내심이 없이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못갈 것 같다.
다른 얘기는 재미가 없으니, 책을 읽다가 종교와 의료에 대해 느낀 점을 말해 보겠다.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를 탄압했듯이, 종교는 대개 과학발전의 걸림돌이었다. 의학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인 듯 하다.
[마을 사람들은...주술사들과 무당을 고용했다....사람들은 계속 죽어갔고, 제물로 바친 음식은 무당의 뱃속으로, 돈은 무당의 주머니로 들어갈 뿐이었다(74쪽)]--> 제물로 바칠 음식을 환자에게 먹였다면 그 중 몇 명은 살지 않았을까?
[전도사들은 사람들이 죄와 이기주의와 이단 때문에 가족과 친지들이 날마다 죽어가는 모습을 보아야 한다고 설파하였다]-->전염병의 발생을 빌미로 신도를 늘리려는 순발력...
심지어 교회가 병을 더 부추기기도 했다. [머릿니, 사면발이, 몸니는...안락과 청결함을 경멸하는 초기 기독교도들이 도움을 주었다. 즉 한 종의 금욕주의가 다른 종의 낙원을 창조했던 것이다(173쪽)]
[(흑사병이 돌 때) 거리마다 수만명의 고행자들이 자신을 채찍으로 갈기며 속죄함으로써 신의 분노를 달래려 애썼다. 교황은 그들의 행진, 집회, 그리고 '내 큰 탓이오'라는 외침 소리를 축복했다...물론 흑사병은 계속되었다(139쪽)]-->아픈 것도 억울한데 그게 니들 탓이라고 우기다니...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흑사병에 대한 교회의 부적절한 대응은 사람들의 신앙과 믿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교회의 권위는 실추되고, 정치 지도자들의 지위가 높아진다.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하지, 왜 신의 처벌인 것처럼 우겼을까.
시대가 변해서 전염병이 신의 처벌이 아니라는 걸 충분히 알게 된 지금도, 기도원을 찾는 사람은 많기만 하다. 말기 환자야 어쩔 수 없지만, 병원에 간다면 충분히 고칠 수 있는 환자들이 기도원을 찾는 건 참으로 안타깝다. "누가 암인데 기도원서 나았다더라"는 루머가 숱하게 돌고, 그게 지푸라기라도 잡고싶은 환자 가족들을 충동질한다. 영험한 손을 가졌다며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목사들도 이 땅에서 활보한다. 종교가 인간의 영혼을 달래주는 좋은 기능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육체를 고치는 건 의사에게 맡기면 안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