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장에 갔는데 응원하는 팀이 큰 점수차로 지고 있다면 심드렁해져서,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게 된다. 5월 4일 LG 팬들이 아마 그랬을 거다. 메이져리그 출신인 봉중근이 등판했음에도 어설픈 수비가 겹쳐 무려 4점을 빼앗겼으니까. 그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봉중근이 타석에 들어선 두산 안경현 선수의 머리를 향해 강속구를 뿌린 것. 고의로 그랬을 개연성도 충분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베테랑인 안경현은 잽싸게 몸을 숙이며 공을 피해냈다. 이 경우 타자는 투수를 째려보거나, 투수한테 걸어가다 심판이나 야수에 의해 제지당하는 게 상례였다.
하지만 안경현은 정말 화가 많이 났나보다. 다른 이들이 말릴 새도 없이 안경현은 빛의 속도로 봉중근에게 뛰어갔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안경현이 봉중근의 얼굴을 향해 강펀치를 날리려는 순간 봉중근은 몸을 잽싸게 구부리며 안경현을 뒤로 넘겨 버렸다. 안경현은 공중에 붕 떴다가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덕아웃에 있던 선수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전개됐다. 물론 야구장 싸움이 다 그렇듯 양팀 선수들은 몸으로 미는 등 싸우는 시늉만 하다가 물러갔고, 사건의 주범인 봉중근과 안경현은 동시퇴장을 당하고 만다. 그날 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두 선수는 네이버 검색어 1, 2위를 다투었고, 안경현이 공중에 거꾸러 떠 있는 동영상은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했다. 남들 앞에서 맞는 건 남자에게 있어서 얼굴 팔리는 일, 아마도 안경현으로서는 선수생활 십여년만에 당한 최대의 치욕이 아닐까 싶다. 그 뒤 야구중계를 보다가 안경현이 나오면 그 장면이 떠올라 혼자 웃게 된다. 그런 수모를 당할 거, 그냥 참고 말 것이지.

야구장 싸움 하니까 영원한 라이벌 양키스와 보스톤의 경기가 생각난다. 4년 전 챔피언결정전에서 만난 두 팀은 선발로 나선 페드로 마르티네스와 로저 클레멘스가 서로 빈볼을 교환하면서 경기를 과열시켰고, 결국 보스톤 4번타자에게 던진 빈볼이 계기가 되어 양팀 선수들이 뛰어나와 엉키기 시작했다. 그때 70세를 넘긴 양키스 코치 돈 짐머가 운동장에 있던 페드로 마르티네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투우장의 황소처럼 머리를 앞으로 숙인 채. 짐머 코치가 대머리여서 그 장면이 더 인상적이었는데, 노련한 페드로는 짐머의 공격을 살짝 피하면서 두 손으로 머리를 쥐고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새벽에 그 경기를 지켜보던 나는 물론 수많은 시청자가 그 장면을 목격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짐머 코치는 경기 후 “이런 수모는 평생 처음”이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돈 짐머 씨
그보다 더 오래된 일이다. 홈팀이던 애리조나는 상대팀에게 7회까지 10점 차이 이상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관중들은 상당수 자리를 떴고, 남은 사람들도 연방 하품을 해댔다. 그때 그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할 일이 일어났다. 1루수였던 마크 그레이스가 난데없이 투수로 나온 것. 그는 처음 두 타자를 범타로 처리해 관중들의 함성을 이끌어냈는데, 다음 타자에게 큼지막한 홈런을 맞고 마운드를 내려온다. 그에게 관중들이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음은 물론이다. 그 다음날, 애리조나의 투수가 상대팀 타자에게 홈런을 맞자 덕아웃에 있던 마크 그레이스는 차라리 자신을 내보내 달라는 제스쳐를 써서 관중들을 웃겼다.
아무리 경기가 지루하고, 싸움 구경만큼 재미있는 일이 없다 해도, 야구장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정말이지 볼썽사납다. 진다고 열받아서 싸움을 유도하기보다는 애리조나의 그레이스 선수처럼 즐거운 볼거리를 선사할 수는 없는 걸까. 정치판의 싸움도 지겨운데, 야구장에서까지 싸우는 장면을 보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