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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원은 풀썩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교수님들이랑 다른 조교 및 학생까지 모두 보는 데서 무로 시뮬레이션을 했다는 거예요, 권교수님이?"

말해놓고도 웃겼는지, 이제는 소리내서 웃는 그였다.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그런 데모를?"

희곤도 한숨을 포옥 쉬었다.

"영상이나 그래픽도 있잖아요... 그런데..."

재원은 말없이 웃음을 거두고 희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무로 한 데모가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인상에 남긴 건 괄목할 만하죠. "

재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마녀에요? 무로 데모를 했으면 좀더 귀여운 닉네임도 있었을텐데..."

"그게 제일 멋있는 부분이었는데 말이죠."

희곤은 목이 타는지 다 식어버린 차를 꿀꺽 꿀꺽 모두 마셔버렸다.

"무 시뮬레이션으로 그렇게 웃겨놓고는, 그게 말놀이겸 정말로 역사적으로 근거있는 이야기라는 걸 밝혀내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을 느끼게 했던 거죠, 권교수님이." "어떻게요?"

"무로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사람의 발이 날카로운 칼 위에 올라가 어떻게 뼈와 살을 뚫는지만이 아니었어요."

재원은 희곤의 말에 깊숙이 빨려들어가는 자신을 느꼈다.

" '무'는 '무녀'의 첫 소리. 날카로운 칼, 그러니까 '작두'같은 곳에 오르는 '무녀'가 그 뼈의 주인이고, 물 속에 어쩌다 빠지게 되었는지를 납득시키려 스토리를 가져온 거죠.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중에서..."

그랬다. 현직에 있을 때 진영은 자신의 학생들에게 눈에 보이는 증거들을 수집하고 조립하는 데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증적 분석과 함께 하나의 납득할만한 스토리로 만들어내게 하는 과제로 악명이 높았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연구조차 그리 할 거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상황과 상징을 연출해놓고 그에 대한 완벽한 증거로 교수님의 연구에 푹 빠지게 하는 힘. 마력이라고까지 할 수 있죠."

재원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때는 청순한 듯 보이는 처녀가 달이 없는 밤이 되면, 아니 어떤 일로 분노하게 되면 청순한 모습과는 정 반대의 마녀가 된다는 점이 권교수님의 그 '무녀'사건으로 더 확실히 새겨진 거죠."

재원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나니 놀라운 이야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얘기 다 끝났냐?"

희곤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진영이 짚더미를 한 아름 안고서 눈에 힘을 주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교수님 오셨어요?"

재원도 엉겁결에 같이 일어났다. 

"노루 먹일 짚가리에요."

 진영은 짚더미를 재원에게 내밀었다.

"아... 감사합니다...."

재원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짚더미를 받는 모습에 희곤은 씨익 웃었다.

"웃어?"

진영의 기습 질문에 희곤은 얼른 웃음기를 거뒀다.

"넌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한 차례 퍼부으려다가, 진영은 옆의 재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희곤의 귀를 잡았다.

"아, 아! 아퍼요, 교수님!"

희곤이 오만상을 찌푸리자,

"아프라고 잡은 거야!"

라며 진영은 역정부터 냈다.

"따라와!"

진영은 한 손으로 희곤의 귀를 잡고, 한 손으로는 두 사람이 다마신 머그잔을 집고는 재원에게 눈짓으로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진영보다 체구가 큰 희곤이었음에도, 그는 그녀에게 거의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재원은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가지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다가, 짚더미를 안은 채 돌아섰다. 짚더미에서 풍기는 잘 마른 냄새가 좋았다.

"푸훗....풋... 푸하하하하하하."

그렇게 웃음이 터졌다. 뱃 속 깊숙한 곳에서 솟는 이제 막 솟는 샘물같은 웃음이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런 웃음이었다. 오래 잊고 지냈던 그런 웃음을, 재원은 오래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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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내리닥친 우뢰였다.

 사람들은 갑작스런 상황에 낯이 흑빛으로 변했다.

"허허허허허허허허허!" 

무녀의 웃음소리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콰과과과과광-.

쏴아아아아아-.

또 한번의 우뢰에 소낙비까지 내렸다.

정신없이 쏟아진 비에 사람들은 우왕좌왕 가만있지를 못했다.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닌 그 와중에도 오로지 무녀만은 그 상황을 즐기는 듯 했다.

"해신님은 제물을 원하신다아아아아!"

무녀의 손가락이 신관 사또를 향했다. 사람들의 시선조차 그에게로 향했다.

무녀의 기세와 사람들의 눈에 어린 위험한 빛.

신관사또는 그렇게 그들의 모든 시선을 온 몸으로 받았다.

그러나, 사또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순간 섬뜩한 기운에 몸서리를 쳤다.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그것은 먹잇감을 앞에 두고 낮은 소리로 으르렁대는 범의 표정과 흡사했다.

 "저기,"

사또의 손에 들린 부채가 무녀에게로 향했다.

"저년을 당장 잡아 대령하라!"

포졸들은 다시 무녀를 잡아 그의 앞에 데려왔다.

그의 표정이 더욱더 험악해졌다.

무녀를 잡은 장정들의 손은 더욱더 우악스러웠다.

"그래, 이 곳의 해신은 제물을 원한다고?"

무녀가 그를 보고 만면에 웃음을 띄었다.

"그 제물이 어리디 어린 계집아이들이라고?"

신관사또의 표정은 처음에 보던 그 표정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그래. 그럼 이번에 온 신관사또가 그 해신의 제물을 싫어하니, 안되겠다고 여쭈어라."

무녀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경멸의 빛이 어른 거렸다.

"왜? 못 하겠느냐?"

무녀는 아예 코웃음을 쳤다.

"나는 해신님과 통하는 무녀.  해신님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사또가 무녀에게 한 두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너는 그걸 어찌 알았느냐?"

무녀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저는 그 분을 뵈었습죠."

사또가 놀랍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그 해신을 눈으로 보았다고?"

그는 다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럼, 네가 그를 직접 찾아가서 뵈고 오너라."

마을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봐라! 이 무녀를 당장 작두 위로 올리거라!"

장정들이 그를 붙들었다. 

"어머니-!"

대여섯 살 남짓 보이는 사내 아이가 무녀에게 뛰어오려다 몇 몇 사람들의 손길에 저지됐다.

"오르거라!" 

  작두의 칼날이 바람에 웅웅 우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무녀는 주저했다. 

 그것을 본 사또는 고갯짓으로 아이를 가리켰다.

한 포졸이 노인의 손에 붙잡힌 무녀의 아이를 붙들었다.

"보았느냐?"

사또의 얼굴에 또 그 범의 빛이 돌았다. 

무녀의 얼굴에 그제야 공포가 돌았다. 

"오르거라!"

무녀는 눈앞의 작두를 보고 결심을 굳혔다. 

무녀는 오른 발이 먼저 작두를 밟았다. 

입으로 치성을 드리는 기도를 외우면서, 무녀는 작심을 했다. 

작두는 날카로웠다. 

"아아아아아아악~"

무녀의 오른발이 작두칼날에 박혔다. 

"다른 발도 얹어 보거라. "

사또의 주문은 잔인했다.

무녀는 무심결에 아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들을 잡고 있는 장정의 손길이 더더욱 억세진 듯 했다.

"네가 오르지 않으면,"

사또는 무녀에게 얼굴을 바짝 대더니 나직이 속삭였다.

"네 아들이 대신 오를거야."

무녀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아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마을 사람들 중에 청나라까지 다녀와서 작두 위에 올릴 유리를 구해다 준 보부상 강씨의 얼굴도 보였다.

 자신에게 아들을 낳게 한 장본인만 아니라면 그는 더없이 훌륭한 장사꾼이었다.

무녀는 아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작두에 나머지 발을 얹었다. 

오오오오우우우-. 

사람들은 신음 소리를 냈다.

이제 무녀의 발은 발목 위쪽까지 완전히 칼에 박혀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무녀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 못박힌 듯 서있었다. 

칼에 박힌 무녀의 발과 다리에서 난 피가 작두와 땅을 흥건히 적셨다.

"이제 저 무녀를 바다로 보내 해신님과 조우하게 하라!"

장정들이 그녀의 발에서 작두를 뽑아내고 바다까지 끌고 갔다. 

"사... 사또..."

당당하던 무녀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 공포가 어리어 눈마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엄니이이이-!"

무녀의 아들의 이 외침이 마지막이었다. 

 무녀는 바다에 던져진 즉시 떠오르지 못했다.

"이제는 보거라."

마을 사람들은 사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것이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해신과, 저 무녀의 실체다." 

어느 새, 우뢰와 소낙비가 그쳐 있었고, 파도만이 강하게 바위를 내리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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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만 보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눈 앞의 젊디 젊은 신관 사또의 서슬퍼런 낯빛에 움찔대다가도, 마을을 수호하는 해신을 섬긴다는 무녀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허-. 당장 저 년을 포박하지 못할까?"

우물대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에 사또는 더더욱 사나운 낯빛이 되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

무녀는 그런 사또를 비웃었다.

"사또!"

무녀는 그의 앞에 당당했다.

"이 곳 사람들에게 저는 법입니다."

무녀의 말에 사또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이곳을 찾았던 신관 사또들은 모두 우리 고을의 전통을 보존하게 해주셨습니다.

뭍에서 오신 분들은 우리 섬 사람들의 관습에 익숙치 않으셨을 테니까요. "

무녀는 아예 있던 걸음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아왔다.

"사또께서는 우리 고을 사람들이 지금껏 지내왔던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두시는 것이 우리를 돕는 길일 것입니다."

사또는 무녀의 말에 불을 뿜듯 내뱉었다.

"세상 어느 천지에도, 사람을 푸줏간 짐승 다루듯 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아무리 이곳을 지키던 수호신이라 하나, 사람을 지키는 댓가로 사람을 잡아먹는 신이라면 신이 아닐 터!"

그는 숨을 몰아쉬더니 무녀를 다시금 쏘아보았다.

"신의 노여움을 산 마을 사람들을 위해, 그 신의 노여움을 풀어야할 무녀가 사람을 제물로 바쳐 자신의 발 아래 마을 사람들을 두려 한 너의 죄, 내 좌시하지 않을 터!"

그의 서슬퍼런 말에 순간 무녀가 움찔했다.

 그녀의 움직임은 그 상황을 관망하듯 보던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네 년이 법이었다면, 이제는 나의 말이 곧 네 위에 있을 것이다."

사또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이들이 무녀인 너를 두려워하여 붙들 수 없다면, 내 산하의 군졸들이 너를 포박할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처신을 눈여겨 보려고 한발 뒤로 물러나게 했던 사또의 군졸들이 앞으로 나아왔다.

"여봐라!"

"예-."

 "저 년을 당장 포박하라!"

"예-."

군졸들이 무녀를 양옆에서 붙들었다.

무녀는 저항했다.

"놔라, 이놈들! 나는 해신님을 섬기는 무녀다! "

저항에도 꿈쩍않는 포졸에 무녀는 눈을 치켜떠보였다.

"해신님이 무섭지도 않은 게냐? 그분은 너희들의 피를 원하신다."

그 때,

우르르르르르릉, 꽈과과과과광-.

갑작스런 천둥에 모두가 놀랐다.

오직 무녀만이 그런 그들을 보며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진영은 몇 몇 조교들이 가져온 작두모형과, 긴 방망이 같은 채소를 휘둘러보았다.

"앞에 있는 게 대체 뭡니까?"

뜻밖의 소품에 동요하고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질문했다.

"보이는 대로입니다."

진영은 만면에 웃을 띈 채, 대답에 뜸을 들였다.

"아마, 이 소품들은 여러분이 티비에서나, 심지어 시장에서도 볼 수 있는 물품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조금 더 동요했지만, 진영이 마이크에 '으흠-.' 하는 기침 소리를 내자 장내는 곧 고요해졌다.    

 "발부터 다리까지 길게 금이 난 곳을 여러 종류의 도구와 대조해본 결과, "

진영이 설명하는 등 뒤 스크린에서는, 진영이 뼈의 금과 여러 도구의 패인 모양을 조사하는 장면이 나왔다.

 "본을 떠보면, 이 금은 중간에 어디에 걸린 흔적없이 매끈이 베어 있습니다.

 분명 생긴 것도 여자고, 나이가 적은 사람드로 아닌데 도대체 무슨 일로 이사람의 발과 다리가 이렇게 됐을까 싶은 궁금증이 생겼지요."

진영은 그러더니 채소를 손에 잡았다. 사실 두꺼운 흰 무를 사람 발과 다리처럼 깎아 연결해 놓은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쿡!' 웃었다.

 진영도 그런 그들을 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네, 무슨 생각하는지 압니다. 지금까지 이런 시뮬레이션은 없었죠."

장내를 한 번 쓰윽 훑어보더니, 진영은 그 사람다리같은 무를 자기 앞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사실 그래픽 기술로 해도 무방하지만, 실제로 보면 조금더 실감나지 않을까 싶어 좀 무리해봤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진영에게만 주시했다.

 "이 사람은 30대 가량의 여성이고 아이를 낳은 흔적이 있습니다.

 공중전까지는 아니라도 산전 수전까지는 겪었을 여자라는 거지요.

그런 여자에게 생긴 발과 다리의 상처.

이건 오직 칼날이 위로 솟은 곳을 발로 밟았을 때라야 가능하지요."

진영은 잠시 말을 멈췄다.

"이제 어떻게 된 상황인지 짐작하실 수 있으십니까?"

뚜벅뚜벅 작두모형 앞으로 걸어갔다.

"손잡이가 없는 이런 작두는 으례히 칼날만이 위로 솟아있죠. 그리고 이 작두는, 주로 무녀들이 굿을 하다 신내림의 일환으로 올라서기도 합니다."

장내의 사람들의 얼굴이 변했다. 놀람으로, 누군가는 흥미로.

"그럼, 그 유골의 주인은 무녀라는 말이십니까?"

손도 들지 않고 한 사람이 질문을 했다.

"그게 가장 그럴듯한 가설입니다."

사람들은 신음인지 환호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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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새도록 뒤척이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악몽같은 꿈에 또 깨고, 몇 번 더 뒤척이다가 결국 일어나 앉았다.

이제 아침이면 그동안의 조사에 대한 브리핑이 있다.

진영은 기왕에 깨버린 잠이니 브리핑 준비를 하기로 했다.

"그 전에,"

진영은 누구도 같이 있지 않았으나, 큰 소리로 자신에게 말했다. 

"샤워가 필요해."

 

 물을 맞고 있으니, 그나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진영은 눈을 감은 채 그렇게 쏟아지는 물을 맞았다.

모든 사실들이 머릿 속에서 맴을 돌았다.

함께 조합된 뼈들,  어쩌다 풍화를 맞게 됐는지 등의 근거 추론.

진영은 그 모든 과정과 사실을 머릿속으로 이해하려고 애썼다.

'한치의 오차도 없어야 해.'

따뜻한 물을 얼굴로 내리받으며 진영은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브리핑에 들어가기 전,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매 순간, 긴장이 극에 달할 때 진영은 그렇게 어머니의 응원을 받곤했다.

매사가 긍정적이고, 따뜻한 감성을 가지신 어머니의 기운이 한겨울 찬바람에 흔들리는 가시나무 같던 진영의 마음을 그렇게 가라앉혀주는 것 같았다.

"또 긴장이 되서 그래?"

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

"아니요. 뭐.... 어머니 몸도 안 좋으시다셔서..."

어머니는 가볍게 웃으셨다.

"이게 어디 하루 이틀만에 끝날 일인가? 유병장수라고 병이 있어도 관리하면 오래 사는 세상인데 뭐."

"아니, 그래두....."

어머니는 또 가볍게 웃으셨다.

진영도 말없이 그렇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 잘 해 우리 딸."

어머니의 말에 진영은 체하고 내려가지 않았던 체증들이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네...어머니.."

 

 함박사는 그녀의 소견에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진영은 ppt로 맨처음 유골을 찾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보시다시피, 이 유골은 오랜 시간 퇴적된 지층에 묻혀있다가 최근이라고 추정되는 바닷속 지형변화로 지상으로 올라왔습니다."

진영의 설명과 함께 ppt속의 땅 속 지층 그래픽이 지진에 갈라져 하나는 가라앉고 하나는 위로 올리워졌다.

그리고 깊이 묻혀 있던 사람 모양의 뼈가 지층이 올라오면서 자연스럽게 딸려 올라오는 모습이 이어졌다.

조교 정한수의 작품이다.

한수는 이런 시뮬레이션에 능통한 실력자였다.

다음 장면은 각 부분별로 모아져 조립되어진 뼈 사진이었다.

"우리는 그 땅에서 출토된 유골로 조립을 했습니다.

당연하겠지만,  이 모든 뼈들은 한 사람의 것입니다."

그 다음 사진은 그 유골에 살을 입힌 부분이다.

"퇴적층에서 오래 있었던 만큼 뼈의 수축과 손상이 심해 뼈주인의 세부사항을 아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진영은 잠시 말을 쉬었다가, 시뮬레이션 속 뼈에 살이 다 붙어서야 입을 열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뼈 주인은, 이 사람이 살았던 300여년 전 대략 30대 가량의 여성으로, 모든 2차 성징을 마치고, 성숙 단계에서 퇴행 단계로 넘어가는 사람이라는 추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이미 살갗이 얹힌 뼈 시뮬레이션에 진영이 레이저를 쏘자, 레이저를 맞은 그 부분에만 뼈가 드러났다.

"보통 십대 소녀들의 경우, 골반이 작고, 하체의 뼈가 이처럼 두드러지지는 않습니다. 이 여성은 다소 팽창되어 보이는 골반과 두드러진 허벅지를 가진 것이라 여겨지는 넙적다리 뼈모양 등은, 아마도 이 여성이 살아생전에 출산을 했을 것이라는 암시를 줍니다."

 브리핑을 듣던 교수중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정강이부터 발바닥 부분까지의 뼈에 길게 난 금은 왜 생긴 겁니까?"

진영은 그의 질문에 인심좋은 미소를 띄었다.

"글쎄요, 제가 그 상황을 못 봐서요."

앞에 앉은 교수 몇이 피식 웃었다.

물론 질문을 던진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그 부분이 많이 궁금했었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저는 그 상황을 못봐서 뭐라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진영의 얼굴에는 조금씩 진지한 빛이 돌아왔다.

"지금부터, 저 발부터의 뼈에 긴 금이 간 이유를 데모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진영의 얼굴에는 자못 비장한 빛마저 돌았고,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마저 침을 꿀꺽 삼켰다. 맨 앞에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함박사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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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친 자국이 나 있던 부분은 발목 뼈 윗 쪽이었다. 그 아래의 부분은 부서져서 형체를 맞추기가 어려웠다.

"설마, 이 뼈들을 다 맞춰 보려는 건 아니시겠죠?"

 정은수의 말에는 대꾸도 않고 진영은 뼛조각들을 주워 담았다. 스탠드 불빛에 그 뼈들을 내려놓고 돋보기로 하나하나 관찰하면서 핀셋으로 조각들을 들어내기 시작하자 정은수는 다시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교수님 안 피곤하세요? 오늘도 그거 맞춘다고 잠 못 주무시면 닷새 째예요.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

"교수님?"

정은수의 재촉에 진영은 말없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방 속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가서 커피나 좀 사올래? 나 아직 식전이니까 김밥도 괜찮아."

"어차피 사 와도 안 드실 거잖아요."

은수는 투정 섞인 말을 뱉으면서도 돈을 받았다.

"너 먹어 그럼."

뭐 늘 그런 식이었다. 진영은 한 번 연구에 빠져들면 잠도, 음식도, 인간관계도 전폐했다. 그러나 옆의 사람이 배를 곯거나 잠이 부족해 힘들어하는 꼴은 또 못 보는 그런 사람이었다. 퇴근이 좀 늦었으면 늦었지, 결코 배 고프거나 피곤해 본 적이 없던 은수였던지라 지금의 진영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고 있었다.

"...그럼 제가 충무 김밥에 된장국 사올께요. 그건 저랑 같이 먹어요."

진영은 그저 뼈에만 온 신경을 쏟을 뿐 그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은수는 나가려다 문득 문 앞에서 진영의 뒷 모습을 돌아보았다.

 '귀신이 곡을 할 노릇이군. 물 속에 빠져 있던 유골이 어떻게 발부분의 뼈만 부서진 거지?'

뼈 구조본을 두고 한 조각씩 맞춰 가던 진영은 무심결에 중얼 거렸다.

'귀신이 곡을 해... 귀...신....'

순간 소름이 쫘악 돋았다.

'하! 장난해, 권진영...'

진영은 일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없어... 그런 건 없어....'

진영은 또 도리도리 고개까지 흔들었다. 뼛 조각을 이리저리 맞추면서 진영은 '귀신'이 아닌 자신이 이해할 수 있을만한 괜찮은 스토리를 생각하려고 애썼다. 

 '삼백년 전에 죽은 사람.... 그 사람은 여자.... 죽은 곳은 바다... 바다에는 왜?... 열녀?... 아님... 심청인가?...아님.... 수영하다 물 귀신... 아...'

 또 진영의 머리 뒤편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입만 방정이 아니야. 이느므 생각도 문제지...'

 진영은 또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뭐 하세요?"

진영은 순간 소스라쳐서 핀셋으로 들었던 뼛조각을 떨어뜨렸다. 바닥으로.

"...교수님?"

진영은 로봇처럼 뻣뻣이 고개만 돌려 그를 돌아보았다. 해맑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정은수.

"김밥 사왔어요."

서서히 일그러지는 진영의 표정에 은수는 웃음기를 거두고 눈만 크게 떴다.

"정은수! 뼈!"

그 말에 은수도 손에서 김밥 봉지를 떨어뜨렸다. 바닥으로.

진영은 더 놀라서 얼른 밑으로 꿇어앉아 바닥을 훑었다. 된장국이 쏟아져 흐르고 있었으나. 다행히 뼛조각은 국물의 영향력(?) 밖이었다. 은수는 얼른 봉지를 거두고 된장국이 더 쏟아지지 않게 주워  들었다.

 "... 뭐야?"

뼛조각을 손에 들고, 국물이 뚝뚝 흐르는 봉지를 들고 진영과 은수는 서로의 얼굴만 멍청히 보았다. 

"...김밥이요..."

진영은 그의 손에 든 봉지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은수를 올려다 보았다.

"푸훗!" 

그렇게 웃음보가 터진 두 사람은 한참을 숨도 못 쉬고 웃었다.

"김밥 드세요."

조금씩 진정이 되자 은수가 말했다.

"뭐, 된장국 말은 김밥?"

진영의 말에 두 사람은 또 웃음을 터뜨렸다.

"... 그래, 먹자."

 휴지며 물티슈등으로 바닥을 닦고 정리한 뒤 은수는 김밥이며 반 정도 남은 국물을 진영에게 내밀었다.

"근데, 교수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다가 놀라신 거예요?"

"응?"

오징어 무침이랑 무김치 등을 싸서 김밥을 입에 넣은 직후였다.

"교수님, 저 오기 전에 뭔가 깊이 생각하셨잖아요."

진영은 입에 든 내용물을 얼른 씹었다. 은수는 그런 그에게 국물을 권했다.

"내가 생각을 했다고?"

은수도 입을 오물거리며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냥 뼈만 보고 있었는데."

"교수님은, 집중하실 때랑 생각하실 때랑 눈빛이 달라요."

진영은 다시 김밥과 무김치를 함께 들어 입에 넣었다.

"아무 생각 안 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얘기해 주세요."

진영은 다시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내가 생각하는지 집중하는지 뭘 그렇게 알려고 그래? 나한테 관심이 많구나."

진영의 말에 은수는 크게 웃었다.

"이제 아셨어요? 저 교수님 사랑하잖아요."

그 말에 진영은 사래에 들려 컥컥 거렸다.

"농담이에요, 농담~"

은수는 진영의 등을 두드리며 또 헤헤 웃었다.

"농담을 진담처럼 하냐 왜? 자꾸 그러면 오해한다."

 진영은 말없이 다시 김밥을 먹었다.

"... 여기 김밥 맛있죠?"

은수는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게 먹다 보니 피곤하고 허기졌던 진영도 바짝 힘이 나고 머리도 회전하는 것 같았다. 맞추다 만 뼛조각을 돌아보던 진영이 은수에게 물었다.

"저거... 왜 그런 것 같아?"

은수는 진영의 시선을 따라 그 뼛조각을 보았다.

"글쎄요..."

진영은 팔짱을 끼고 입을 열었다.

"여자이고, 바다에 빠졌다...왜?"

은수는 진영의 모습을 따라 팔짱을 끼고 같은 톤으로 목소리를 깔았다.

"그렇다면, 열녀나 심청이 아닐까요?"

"응?"

"그렇잖아요. 바다에 빠지는 여자 치고 정조를 지키려고 노심초사해서 자살하는 열녀나 공양미 삼백석에 제물이 되는 심청이 빼고 다른 게 뭐 있겠어요?"

진영은 은수의 말에 다시 뼈를 돌아보았다.

"그래...그럼..."

진영은 다시 은수에게 시선을 돌리고 물었다.

"그럼, 저 칼에 쓸린 자국 같은 건 뭘까?"

은수는 그런 진영을 보다가 말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잠시 정적이 돌았다. 뼈들에 시선이 고정된 진영은 은수의 시선이 깊어진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정 조교, 나 커피 한잔 타주고 집에 가라."

 진영은 다시 뼈 앞에 섰다.

"정말 오늘도 밤 새시려구요?"

은수의 말에는 대꾸도 없이 진영은 장갑을 꼈다.

"그러다 탈 나세요."

"커피 멀었니?"

돌아보지도 않고 뱉는 진영의 말에 은수는 또 어깨를 으쓱하고 나갔다.

'열녀일까? 심청일까?'

진영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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