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로 가는 길목에 큰 교회가 하나 있다. 내가 그 근처 고등학교를 다니던 18년 전에 그 교회에서 지역주민과 새신자를 위한 문화행사를 했었다. 영화도 보고 콘서트도 하고 암튼 뭐 그런 데였는데, 그 때 '서지원'이라는 가수를 봤다. 사실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정도로 나는 평범한 고등학생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아이들 티비 보면서 연예인에 열광 할 때, 나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었다. (믿거나, 말거나...)

 어쨌든, 방황도 많이 하는 질풍 노도의 시기에 어머니 하고도 사이가 워낙 안 좋았던 때라 집에는 정말 일찍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교회 문화행사를 찾았던 것인데, 그 콘서트 게스트 중 하나가 '서지원'이었다. 무슨 옷에 어떤 얼굴이었는지도 생각 안난다. 단지 분명히 콘서트 전에는 없었던 모자가, 그가 노래할 때는 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가 교회인데 자기 머리가 빨개서 어르신들 보시면 안 좋아 하실 것 같아 썼노라고 했다. 콘서트 진행하시는 분이 그래도 한 번 벗어 달라고 했더니 정말 벗었다.

 "어휴~. 닭 벼슬 같네."

 그 말에 아무 생각없는 사람들(나를 포함해서)이 웃었다. 그는 멋적어 하면서 모자를 도로 썼었다. 그리고 그 콘서트 지나고 얼마 후 그의 부음 소식을 들었다. 그 때까지도 나는 그의 팬이 아니었다. 단지 얼굴을 한 번 실제로 봤던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에 황망한 마음이 들었을 뿐...

 그 때는 어렸다지만, 지금은 혈기마저 다~ 죽은 30대 중반 애 둘 키우는 아줌마가 되고 보니, 한 가지 후회가 고개를 들었다. 왜 그 때, 용기내서 찾아가 말해주지 않았을까?

 '머리 색깔 예쁘네요. 아주 잘 어울리세요. 참 멋있습니다.'라고-.

 그에 대한 아픔은 사실 아픔이라고까지도 할 수 없는 사소한 것일 것이다. 아는 척 한 번 해주지 않았다는 것, 악수 한 번 청하지 않았다는 것... 그런 사람이 비단 나 한 사람 뿐일까?...

 그래서, 해 보지 않은 그 사소함 때문에 이 글도 썼다.

 

 매 번 써놓고 보면 참 창피하고 그렇다. 그러나 '해피투게더'에서 했던 대본을 여기서도 써먹어 본다.

"소설은 소설일 뿐, 신경 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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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현은 숨을 거칠게 내쉬며 민영을 바라보았다. 안 보던 사이 민영은 긴 머리를 단발 컷트로 치고 모습도 조금 야윈 듯했다.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가 꼭 꿈 속에서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둘은 잠시 그렇게 말이 없었다. 얼마 동안 그렇게 있다가 민영의 표정에 점차 미소가 번졌다.예의 그 기분 좋았던 미소가 아니었다. 언젠가 보았던 그 씁쓰레한 미소... 수현이 순간 당혹스러워했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그녀는 수현에게 몇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아침은 ...잘... 챙겨 드...."

 "내가 먼저 얘기 할께."

 수현은 민영의 말을 막았다.

 "첫 번째 소원은 100일 동안 애인되주기 였어."

 민영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그런데 우리가 애인으로 지낸 건 두 달이 조금 넘었을 뿐이야."

 민영은 침묵을 지킨다.

"두 번째 소원은 동요 100곡 칠 수 있도록 피아노 가르쳐주기 였어."

 또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그런데 넌 아직 절반도 못 치잖아."

 "괜찮아요..."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수현의 목소리는 조금 격앙 되있다.

 "세 번째 소원은 기쁘게 보내주라는 거였는데..."

 민영의 얼굴에서 그 보기 싫은 미소가 사라졌다. 수현은 말을 이었다.

 "그런 나 한테 넌 언제 떠난다는 얘기도 안 했고, 어디로 갈 건지도, 왜 가야 하는지도 얘기 안했어. "

 말없이 민영은 수현을 바라보고만 있다. 조금 있으면 정말로 보딩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수현의 말을 끊고 그 자리를 뜨면 안 될 것 같았다.

 "네가 원했던 소원... 이런 거였어?"

 민영은 그제야 한숨을 쉰다.

 "...괜찮아요... 이렇게 오셨으니까...제 세번째 소원도...이루어 졌네요..."

 '그래, 보고 싶었는데... 당신을 봤으니까 됐어.'민영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꼭 꼭 눌러 참는다.

 "그럼... 전 이만..."

 발걸음을 떼자, 수현이 한 발 다가서며 그의 앞을 막는다.

 "그럼 이제 내 차례지?"

 민영의 눈이 동그랗게 된다.

 "지금 말 할게...내 소원도...꼭... 들어주기다..."

 수현은 숨을 몰아쉰다.

 "내 첫 번째 소원은...."

 민영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수현이 말한다.

 "네 세번째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거야..."

 그녀의 얼굴에 놀란 빛이 든다.

 "두 번째는 네 진짜 애인이 되는 것."

 민영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세 번째는 ..."

 수현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걸 민영은 보았다.

"네가 영원히 내 옆에 있어 주는 거야."

 민영은 현기증이 일면서 귀가 먹먹해옴을 느낀다. 공항 안에는 그녀를 찾는 안내 방송이 울리고 있었다.

 "떠나지 마..."

 수현의 눈에서 눈물이 내린다.

 "가지 마..."

  민영은 그를 올려다 보고 입을 열지 못한다. 그러다 고개를 떨군 그녀의 눈에, 상처가 나서 퉁퉁 부은 그의 손이 보인다. 공항 안에서는 여전히 민영을 찾는 안내방송이 울린다.

         .

         .

         .

  삐이이이이-.

 초인종이 울렸다. 수현은 침대에서 일어나 현관 쪽으로 향해 간다.

 "너무 이르잖아. 아침은 됬다니까."

 수현은 빼꼼이 연 문틈으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사실, 그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며 얼마나 잠을 설쳤는지 모른다.   

 "얼른 나오세요. 기다릴 테니까."

 수현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들어와 있을래? 금방이면 되는데."

 "아니요.괜찮으니까 빨리 나오세요."

 수현이 준비하고 밖으로 나오는 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침이었지만 햇빛이 따뜻했다. 그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색깔이 예쁜 자전거를 끼고 민영이 서 있었다. 수현은 그녀를 보자마자 자연스레 미소가 떠올랐다. 서로는 함께 염색한 티를 입고 있었다. 기분 좋은 쑥 향기가 났다.

 "손은 좀 어떠세요?"

 민영이 묻자 수현은 드레싱 처리를 한 자신의 손을 들어보이고 까딱까딱 움직여본다. 두 사람은 곧 자전거를 타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오늘은 그들이 사는 동네에서 좀 떨어진 공원 쪽으로 하이킹을 가기로 했었다. 떠나는 대신 남기로 한 민영이 수현의 소원 들어주기를 조심스레 진행한지 3일이 되었다. 

 3일동안 수현과 민영은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수현은 강시현과 윤서준에 대한 아픔을 고백했고, 민영은 그 윤서준을 좋아했던 친구 재은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 말했다.수현은 윤서준이 자신의 꿈에 나타나 행복해 지라고 했던 건 민영과의 만남을 두고 한 말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결국 두 사람의 공통점이 두 사람을 만나게 했노라는 데 의견을 일치시키며 그들은 함께 울고 웃었다. 이야기가 길어져 밤을 샐 즈음에는 서로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기도 했다. 

 "목 안 말라요?"

 이마에 흐르는 땀을 팔에 닦으며 민영이 수현에게 묻는다.

 "말라. 뭐 있어?"

  그렇게 말하며 수현은 민영에게 다가와 주머니에 넣어둔 손수건을 빼내 이마를 닦아준다.

 "물 얼린 것 있어요."

 그녀의 얼굴에 붉은 빛이 돈다. 둘은 나란히 앉아 물을 나눠 마신다. 잎들이 제법 굵고 진한 녹색을 띤 나무 아래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있다.

   잠시 말도 없이 흐르는 강물만 무심히 바라본다. 그러다 수현이 드디어 물어보고 싶었던 것을 물어본다.

 "후회... 안 해?..."

 "뭐가요?"

 수현은 잠시 망설인다.

 "해외 봉사 안 간 거."

 민영은 수현을 돌아보고 또 웃는다.

 "후회를 왜 해요? 여기서도 할 일이 생겼는데."

 그 말에 수현도 같이 웃는다.

 "내가 네 할 일이야?"

 민영은 댓구 없이 그저 웃는다. 수현도 그건 마찬가지다.민영은 CDP를 꺼냈다. 안에는 수현의 피아노 연주 음반이 들어있었다. 두 사람은 이어폰을 나눠 끼고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렇게 말없이 호수만 보다가 수현이 민영의 어깨를 가만히 끌어당겼다. 민영도 가만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두 사람에게는 그 이상의 애정 표현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했다. 민영은 가만히 숨을 죽였다. 심장 소리가 그의 귀에 들릴까봐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수현은 가만히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어느 새 음악이 멈췄다. 그리고 사방이 조용했다.

 "...사랑.. 해..."

 민영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웃었다. 수현도 조용히 웃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 번 더 속삭였다.

 "사랑해."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이 그들이 앉은 나무에 불어 가지를 춤추게 했고, 그 주변의 배경을 고즈넉하게 만드는 듯 했다. 그들의 뇌리에 이제는 이날의 눈부심 만이 깊이 박힐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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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다. 이미 아침이었다. 베인 상처가 부어서 욱신욱신 쑤셨다.

 수현은 일어나 앉아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상태처럼 엉망 진창이다 라고 생각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따라 마셨다. 그제야 밧데리가 분리된 휴대폰이 눈에 들어왔다. 수현은 물끄러미 그 휴대폰을 내려다 보다 집어들고 밧데리를 끼웠다. 전원을 켜고 무심결에 피아노 앞에 앉았다. 피아노를 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피아노 앞에 앉으면 뚜껑을 여는 것도 습관이었다. 그리고 수현은 건반 위에 놓여진 사진을 발견했다. 남이섬으로 민영과 여행을 갔었을 때 지나가던 사람에게 부탁해 찍은 두 사람의 사진이었다. 수현은 그 사진을 집어들고 한 참을 보았다. 휴대폰은 전원이 완전히 들어왔다. 그 뒤,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수현은 사진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음성 메시지였다. 

 '...선생님...'

 수현은 사진에서 눈을 떼고 고개만 번쩍 들었다.

 '소원 들어주기 생각 나세요?'

 수현은 기억을 더듬었다. 민영의 첫 번째 소원은 100일동안 애인이 되 주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그녀에게 동요 100곡을 칠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이제 제 세 번째 소원을 말할게요... 제 세번째 소원은...'

수현은 숨을 죽였다.

'저를 기쁘게 보내주시는 거예요. '

 가슴이 내려 앉는 듯 했다. 결국 민영은 이렇게 떠나려고 한 것이었구나...

'그런데...'삐이이이-.

 음성 메시지가 멎었다. 수현은 다시 또 하나의 메시지를 열었다.

 '가기 전에 얼굴 뵈면... 가기 싫어질까봐 일부러 얘기 안했어요....제가 선생님을 ... 아주 많이 좋아 하거든요...'

 수현은 손에 사진을 쥔 채 집을 뛰쳐 나왔다. 뛰고 또 뛰어서 차도까지 나왔다. 택시를 잡아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어떻게 해서든 다시 그녀를 만나야 했다.

 

 민영은 공항으로 들어섰다. 한국에서의 살림 살이를 정리하고 외국으로 나가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짐이 단촐했다. 그 어떤 것에도 미련을 품는 건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필요하거나 좋아해서 챙겨둔 자그마한 몇 가지를 제외하고 그녀는 자신의 모든 물건들을 이웃들에게 나눠주거나 기부했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을 떠나는 데 미련은 없었다. 아니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현에 대한 생각까지 이르자 민영은 나직이 한 숨을 내리 쉬었다. 보딩을 기다리며 벤치에 앉은 그녀는 CDP를 꺼냈다. 그의 피아노 선율을 들으며 민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주말도 아닌데 차가 막혔다. 수현은 택시에서 안절 부절 못하다 결국 중간에서 내렸다.뛰고 걷고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움직이다가 택시가 있으면 또 잡아탔다. 조금 빨리 가면 비행기가 뜨기 전에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떠나버렸을 수도 있다. 수현은 갖가지 생각으로 머릿 속이 복잡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그는 공항에 도착했다.

 

 보딩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민영은 얼마 간의 돈을 달러로 환전하고, 그 옆의 서점에서 책을 두 권 샀다. 아프리카에서는 국외 택배로도 우리 말 책을 받기가 힘들 것이었다. 무게 때문에 욕심껏 많이 구해갈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당분간 읽을 책은 필요할 것 같았다.새치기 한 사람 덕분에 그녀는 계산대 옆의 우리나라 엽서에 눈이 닿는다. 지인들에게 가끔은 이 메일이 아닌 손으로 쓴 엽서를 보내는 것도 괜찮겠구나 싶어 그녀는 엽서도 몇 장 샀다. 준비는 다 끝났다. 이제 비행기를 탈 일만 남았다. 벤치에 앉아 책 두권과 엽서들을 핸드 캐리어에 단단히 담고 그녀는 게이트로 향했다.

 공항 안에서는 배웅 하러 온 사람들과 맞이하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것을 염두해 둔 터라,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보딩 시간을 말하지 않았다. 다른 건 다 괜찮았다. 단지 그 순간 그 공항으로 수현을 픽업하러 왔을 때가 떠올라 민영은 쓰게 웃었다. 그렇게 고개를 돌렸을 때, 민영은 멈춰섰다. 자신의 바로 앞에... 땀에 범벅이 되서 고르지 못한 숨을 내쉬고 있는 수현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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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민영의 이야기

 

 중학교를 중퇴하고 2년의 힘든 시간을 견뎌낸 민영은, 검정 고시 이후 다시 사회로 나오기까지 한번 더 눈물 겨운 시간들을 버텨 내야 냈다. 민영의 가족들은 그런 민영이 안쓰러웠지만, 민영이 살아가는 방식을 막아설 수는 없었다. 어쨌든 친구를 따라 죽기보다 친구가 살아야 했을 몫만큼 더 열심히 살겠노라고 한 딸이었으니까. 그래서 온 가족이 캐나다 이민행을 결정했을 때도 혼자 한국에 남아 살아보겠다는 민영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가족들이 한국을 떠났고, 온 가족이 함께 살던 큰 집에서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기 전, 혼자 남은 민영은 자장면을 시켜 먹으면서 티비를 보고 있었다. 이사할 짐조차 많지 않아 텅 빈 듯한 거실에 티비 소리만 왕왕 울려 퍼졌다. 티비에서는 재미없는 것만 나왔다. 너무 울거나, 폭력적이거나, 유치하거나, 아니면 야했다. 민영은 한 입 먹고 채널 돌리고, 또 한 입 먹고 채널 돌리고를 반복했다. 그러다 한 프로그램에서 채널을 멈췄다.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그럼, 이런 말 물어서 사실 죄송하긴 한데...그 때 심정은 어떠셨나요?" 

토크쇼를 리드하는 진행자가 물었다. 

 "아....그 때...."

 그는 말을 더듬었다. 민영은 씹던 것 마저 멈추고 그에게 주시했다.

 "그래도 저에게 처음 작곡가의 길을 열어준 사람이고, 친구 였었는데... 음악하는 일에 대한 회의를 처음 알게 해 준 경우이기도 한지라.... 음악을 계속 하면서도....여전히 트라우마로 남는 것 같아요. "

 뒤이어 윤서준의 노래와 사진이 동시에 화면을 채웠다. 민영은 더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5년 전 윤서준이 노래할 때 피아노를 연주해주었던 그의 얼굴이 순간 또렷이 떠올랐다.

 

 민영은 그 밤, 깊은 생각에 잠겼다. 친구 재은을 잃고 혼자서 견디며 살아야했던 그동안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신앙마저 흔들리고, 왜 사는지 몰라서 사는 것보다 죽음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했다.기도하고 사색하고 책을 읽으면서 다시 신앙을 회복하고 재은이 원했던 만큼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고 실천으로 옮기기까지 버거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민영은 외로웠다. 너무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이 커버렸던 그 시간.

 '나처럼....누군가도... 그만큼의 시간을 보냈구나....'

민영은 고민했다. 어쩌면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는데도 민영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 주위가 조금씩 환해지자 민영의 눈에서 꺼풀 하나가 벗겨진 듯 했다.민영은 환영 하나를 보듯 또렷이 눈을 떴다.

 

 "네, 엄마.... 네... 별 일 없으시구요...."

 지금은 한 밤 중일 것이다. 가족들은 혼자 한국에 남아있는 민영에게 잠을 설쳐 가면서도 자주 연락을 했다. 민영은 밤마다 화상으로 동생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고, 아침마다 부모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네... 그럼 건강 하시구요. 저 지금 수업 들어가요."

 전화를 끊고 민영은 강의실로 들어갔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민영의 꿈은 외교관이 되는 것이었다. 공부를 아주 잘하는 건 아니었지만, 매 교과 때마다 들어오는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모범생으로서 눈에 띄는 아이였었다. 학원도 다니지 않고 스스로 공부해서 매 시험 때마다 성적을 올리는 데다, 교과 수행 평가에서도 민영의 과제물은 단연 돋보였었다.

 그러나 재은의 죽음 후, 민영은 진로를 바꿨다.

 재은은 아이들을 좋아했고, 특히 유니세프나 월드비전 영상 자료에서 나오는 배고픈 아이들을 보고 눈물 짓는 때가 많았다. 윤서준과 결혼하는 것 외에 꿈이 없다던 재은을 떠올리면 많은 아이들과 함께 있는 모습도 같이 상상되곤 했었다. 그래서 민영은 교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조금 모자라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파트 타임으로 일도 다녔다. 그러는 틈틈이 교회에서나 외부 봉사단체에 속해 그들이 후원하는 고아원과 지역 공부방을 따라 다니기도 했다. 혼자 사는 삶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지만 민영은 흔들리지 않았다.학업을 마친 후, 민영은 사정이 여의치 않은 어린이들을 도우러 아프리카 오지로 갈 계획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한 가지 할 일이 더 생긴 것이다.

 

 민영은 윤서준과 정수현에 대한 자료를 모두 모았다. 시시때때로 재은에 대한 추억이 떠올라 민영은 제대로 먹을 수도 잘 수도 없었다. 그러나 결국 민영은 모든 자료와 인터넷을 부지런히 뒤져 얻은 인맥으로 정수현의 팬 카페에 등록하고 그의 상용 이메일 주소도 얻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정수현에게 처음으로 이 메일을 보내던 날, 재은은 또다시 무상한 생각에 잠겼다.

 '힘들었지요.... 조금씩 조금씩... 여우와 어린왕자 처럼... 그렇게 길들여지면... 아주 조금은... 행복하실 거예요... 아주 잠깐 동안만이라도.... 그렇게 행복해지세요...'

 민영은 날마다 메일을 보냈다. 해가 바뀌도록 답이 없어서 어떨 때는 원래 없는 이 메일 주소인데 괜한 짓을 하나 싶기도 했다. 그러나 되돌아온 메일도 없고 해서 민영은 계속 보내보기로 했다.

 

 1년 8개월이 지나고, 드디어 수현에게서 답장이 왔다.

 '정수현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메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도 저를 잊지 않고 관심 갖어 주신 것 정말 고맙습니다.

 민영은 시름을 벗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대 하지 않겠다 했지만, 그래도 답장을 받으니 자신이 쓸모없는 행동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매일 매일 민영은 또 메일을 보냈다.

 

 2년 2개월이 더 지난 어느 봄... 민영은 수현을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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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서트 후, 수현은 집에만 있었다. 민영이 오던 아침 6시 반이면 꼭 눈을 떴다. 그렇게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민영은 오지 않았다. 수현은 물을 끓여서 국화향을 우렸다. 그러나 그는 다시 마실 수 없었다. 한 모금을 마시면 목이 메였다. 민영이 스텝을 통해 건넨 후리지아는 시들어서 이제는 꽃잎이 거의 떨어져 있었다. 수현은 피아노 뚜껑조차 열지 못했다. 자신의 집 여기저기, 민영의 손이 닿았던 곳마다 그녀의 흔적이 느껴져 싸아 해지는 기분을 어쩌지 못했다.

 오후 세 시. 수현의 마음 속의 서운한 감정이 분노로 굳어갔다. 그도 알고 있었다. 민영이 잘못한 게 있어서가 아니란 걸. 그렇지만 그 분노가 정확히 민영을 조준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에 대한 것인지, 수현은 정의 내릴 수 없었다.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의 전화는 끊겨 있었다. 아무리 해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수현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네, 꽃예담 어린이집 입니다. '

 "......네.... 혹시 거기...... 주민영 선생님 계신가요?"

 '아, 퇴사 하셨는데요...' 

수현은 듣고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한 달 전에 그녀는 어린이집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불과 2주일 전만 해도 수현은 민영을 만났었다. 민영은 그 이전에 그만둔 것이다. 어린이집에서는 그 이상의 정보를 주지 않았다. 그 때 돌아보니 민영의 집조차 모르고 있던 자신에게 수현은 마음이 더욱 상했다. 수현은 일어났다. 

 

 "안녕 하세요?"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교사가 그를 돌아보았다.

"예... "

 수현은 다시 꾸벅 인사하고 민영의 행방에 대해 물어본다.

 "아~. 주민영 선생님이요. 지난 달에 해외로 나가신다고 여기 그만 두셨어요."

 수현은 그 말을 듣고 있는 자신의 귀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해외라니요... 어디로..."

 수현이 말을 잇지 못할 때, 한 아이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 교사는 울고 있는 아이에게로 얼른 뛰어갔다.

 "그것까지는 잘 모르구요. 더 자세한 건 안에 원장님께 여쭤 보세요."

수현은  그 말에 어린이집 안으로 들어갔다.

"주민영 선생님과는 어떻게 되시죠?"

 신상 정보를 함부로 줄 수 없다는 그녀의 말에 수현은 뭐라 말을 해야 할 지 몰랐다.

 "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다시 물어보는 원장에게 수현은 더욱더 할 말이 없었다.

 "그 선생님과 그 어떤 관계도 아니시면 신상 정보를 함부로 줄 수 없습니다. "

 수현은 그저 앉아 있었다. 그러다 드디어 입을 열었다.

 "... 잠깐 사귀었어요..."

 원장이 고개를 들었다.

 "잠깐... 사귀었는데... 그런데 그렇게 끝일 줄 알았는데... "

 원장은 앞으로 몸을 조금 숙였다.

 "그런데요?"

 수현은 다시 입을 열기까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 연락이 닿지 않는 지금... 돌아보니 제가 민영이한테 해 준 것이 없더군요."

 원장은 숙였던 몸을 당겨 꼿꼿이 앉았다.

 "아직...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는데... 민영이가 사라졌어요. "

 원장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군요... 주민영 선생님은 이 곳 어린이집에서 꽤 오랫동안 일하신 베테랑 선생님이시죠. 자기 가치관도 뚜렷하시구요."

 원장은 메모지에 무언가를 적더니 수현에게 건넸다.

 "선생님은 오랫동안 해외 봉사를 준비 하셨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비행기를 타시죠. 그 안에 연락이 되시길 빕니다. "

 수현은 메모지를 받고 감사하다고 인사하며 일어섰다.

 "정수현씨."

 원장이 그를 불러 세웠다.

 "주민영 선생님께 꼭 알려주세요. 저희 어린이집에서는 선생님을 언제라도 다시 환영하겠다구요."

 

 수현은 적힌 대로 민영의 집을 찾아갔다. 그녀의 집은 수현의 집과 두 블럭 사이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만날 수는 없었다. 이웃들은 그녀가 혼자 살았다고 전했다. 요새 세상에 보기 드문 처녀라고, 주말에도 혼자 있으면 빨래하고 청소하고 음식해서 이웃들과 나눌 줄도 알더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 집의 세간은 이미 정리되어 있었고, 그녀의 흔적은 온데 간데 없었다. 수현은 또 한번 찬 바람이 그의 가슴을 쓸어내 가는 듯 했다.

 

집으로 돌아온 수현은 소파에 털석 앉아 버렸다. 다시 휴대폰을 들어 민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전화는...'

 몇 번을 다시 걸어도 같은 답만 계속 들렸다. 그 자리에 못 박은 듯 앉아있던 수현은 휴대폰을 집어 던졌다. 전화기와 배터리가 부딪혀서 분리됐다. 벌떡 일어나 자기 눈 앞에 보이는 국화차 잔 마저 집어던졌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부숴 버렸다. 무어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소파마저 뒤집어 보려다 넘어져 깨진 컵에 손을 베었다. 빨간 피가 '뚝, 뚝'소리를 내며 흘렀다. 그렇게 무심한 듯 앉아 있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어느 새 피는 멎어있었다. 가슴이 저며와 통증마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누워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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