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민영의 이야기

 

 중학교를 중퇴하고 2년의 힘든 시간을 견뎌낸 민영은, 검정 고시 이후 다시 사회로 나오기까지 한번 더 눈물 겨운 시간들을 버텨 내야 냈다. 민영의 가족들은 그런 민영이 안쓰러웠지만, 민영이 살아가는 방식을 막아설 수는 없었다. 어쨌든 친구를 따라 죽기보다 친구가 살아야 했을 몫만큼 더 열심히 살겠노라고 한 딸이었으니까. 그래서 온 가족이 캐나다 이민행을 결정했을 때도 혼자 한국에 남아 살아보겠다는 민영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가족들이 한국을 떠났고, 온 가족이 함께 살던 큰 집에서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기 전, 혼자 남은 민영은 자장면을 시켜 먹으면서 티비를 보고 있었다. 이사할 짐조차 많지 않아 텅 빈 듯한 거실에 티비 소리만 왕왕 울려 퍼졌다. 티비에서는 재미없는 것만 나왔다. 너무 울거나, 폭력적이거나, 유치하거나, 아니면 야했다. 민영은 한 입 먹고 채널 돌리고, 또 한 입 먹고 채널 돌리고를 반복했다. 그러다 한 프로그램에서 채널을 멈췄다.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그럼, 이런 말 물어서 사실 죄송하긴 한데...그 때 심정은 어떠셨나요?" 

토크쇼를 리드하는 진행자가 물었다. 

 "아....그 때...."

 그는 말을 더듬었다. 민영은 씹던 것 마저 멈추고 그에게 주시했다.

 "그래도 저에게 처음 작곡가의 길을 열어준 사람이고, 친구 였었는데... 음악하는 일에 대한 회의를 처음 알게 해 준 경우이기도 한지라.... 음악을 계속 하면서도....여전히 트라우마로 남는 것 같아요. "

 뒤이어 윤서준의 노래와 사진이 동시에 화면을 채웠다. 민영은 더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5년 전 윤서준이 노래할 때 피아노를 연주해주었던 그의 얼굴이 순간 또렷이 떠올랐다.

 

 민영은 그 밤, 깊은 생각에 잠겼다. 친구 재은을 잃고 혼자서 견디며 살아야했던 그동안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신앙마저 흔들리고, 왜 사는지 몰라서 사는 것보다 죽음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했다.기도하고 사색하고 책을 읽으면서 다시 신앙을 회복하고 재은이 원했던 만큼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고 실천으로 옮기기까지 버거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민영은 외로웠다. 너무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이 커버렸던 그 시간.

 '나처럼....누군가도... 그만큼의 시간을 보냈구나....'

민영은 고민했다. 어쩌면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는데도 민영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 주위가 조금씩 환해지자 민영의 눈에서 꺼풀 하나가 벗겨진 듯 했다.민영은 환영 하나를 보듯 또렷이 눈을 떴다.

 

 "네, 엄마.... 네... 별 일 없으시구요...."

 지금은 한 밤 중일 것이다. 가족들은 혼자 한국에 남아있는 민영에게 잠을 설쳐 가면서도 자주 연락을 했다. 민영은 밤마다 화상으로 동생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고, 아침마다 부모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네... 그럼 건강 하시구요. 저 지금 수업 들어가요."

 전화를 끊고 민영은 강의실로 들어갔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민영의 꿈은 외교관이 되는 것이었다. 공부를 아주 잘하는 건 아니었지만, 매 교과 때마다 들어오는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모범생으로서 눈에 띄는 아이였었다. 학원도 다니지 않고 스스로 공부해서 매 시험 때마다 성적을 올리는 데다, 교과 수행 평가에서도 민영의 과제물은 단연 돋보였었다.

 그러나 재은의 죽음 후, 민영은 진로를 바꿨다.

 재은은 아이들을 좋아했고, 특히 유니세프나 월드비전 영상 자료에서 나오는 배고픈 아이들을 보고 눈물 짓는 때가 많았다. 윤서준과 결혼하는 것 외에 꿈이 없다던 재은을 떠올리면 많은 아이들과 함께 있는 모습도 같이 상상되곤 했었다. 그래서 민영은 교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조금 모자라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파트 타임으로 일도 다녔다. 그러는 틈틈이 교회에서나 외부 봉사단체에 속해 그들이 후원하는 고아원과 지역 공부방을 따라 다니기도 했다. 혼자 사는 삶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지만 민영은 흔들리지 않았다.학업을 마친 후, 민영은 사정이 여의치 않은 어린이들을 도우러 아프리카 오지로 갈 계획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한 가지 할 일이 더 생긴 것이다.

 

 민영은 윤서준과 정수현에 대한 자료를 모두 모았다. 시시때때로 재은에 대한 추억이 떠올라 민영은 제대로 먹을 수도 잘 수도 없었다. 그러나 결국 민영은 모든 자료와 인터넷을 부지런히 뒤져 얻은 인맥으로 정수현의 팬 카페에 등록하고 그의 상용 이메일 주소도 얻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정수현에게 처음으로 이 메일을 보내던 날, 재은은 또다시 무상한 생각에 잠겼다.

 '힘들었지요.... 조금씩 조금씩... 여우와 어린왕자 처럼... 그렇게 길들여지면... 아주 조금은... 행복하실 거예요... 아주 잠깐 동안만이라도.... 그렇게 행복해지세요...'

 민영은 날마다 메일을 보냈다. 해가 바뀌도록 답이 없어서 어떨 때는 원래 없는 이 메일 주소인데 괜한 짓을 하나 싶기도 했다. 그러나 되돌아온 메일도 없고 해서 민영은 계속 보내보기로 했다.

 

 1년 8개월이 지나고, 드디어 수현에게서 답장이 왔다.

 '정수현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메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도 저를 잊지 않고 관심 갖어 주신 것 정말 고맙습니다.

 민영은 시름을 벗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대 하지 않겠다 했지만, 그래도 답장을 받으니 자신이 쓸모없는 행동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매일 매일 민영은 또 메일을 보냈다.

 

 2년 2개월이 더 지난 어느 봄... 민영은 수현을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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