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이미 아침이었다. 베인 상처가 부어서 욱신욱신 쑤셨다.

 수현은 일어나 앉아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상태처럼 엉망 진창이다 라고 생각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따라 마셨다. 그제야 밧데리가 분리된 휴대폰이 눈에 들어왔다. 수현은 물끄러미 그 휴대폰을 내려다 보다 집어들고 밧데리를 끼웠다. 전원을 켜고 무심결에 피아노 앞에 앉았다. 피아노를 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피아노 앞에 앉으면 뚜껑을 여는 것도 습관이었다. 그리고 수현은 건반 위에 놓여진 사진을 발견했다. 남이섬으로 민영과 여행을 갔었을 때 지나가던 사람에게 부탁해 찍은 두 사람의 사진이었다. 수현은 그 사진을 집어들고 한 참을 보았다. 휴대폰은 전원이 완전히 들어왔다. 그 뒤,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수현은 사진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음성 메시지였다. 

 '...선생님...'

 수현은 사진에서 눈을 떼고 고개만 번쩍 들었다.

 '소원 들어주기 생각 나세요?'

 수현은 기억을 더듬었다. 민영의 첫 번째 소원은 100일동안 애인이 되 주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그녀에게 동요 100곡을 칠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이제 제 세 번째 소원을 말할게요... 제 세번째 소원은...'

수현은 숨을 죽였다.

'저를 기쁘게 보내주시는 거예요. '

 가슴이 내려 앉는 듯 했다. 결국 민영은 이렇게 떠나려고 한 것이었구나...

'그런데...'삐이이이-.

 음성 메시지가 멎었다. 수현은 다시 또 하나의 메시지를 열었다.

 '가기 전에 얼굴 뵈면... 가기 싫어질까봐 일부러 얘기 안했어요....제가 선생님을 ... 아주 많이 좋아 하거든요...'

 수현은 손에 사진을 쥔 채 집을 뛰쳐 나왔다. 뛰고 또 뛰어서 차도까지 나왔다. 택시를 잡아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어떻게 해서든 다시 그녀를 만나야 했다.

 

 민영은 공항으로 들어섰다. 한국에서의 살림 살이를 정리하고 외국으로 나가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짐이 단촐했다. 그 어떤 것에도 미련을 품는 건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필요하거나 좋아해서 챙겨둔 자그마한 몇 가지를 제외하고 그녀는 자신의 모든 물건들을 이웃들에게 나눠주거나 기부했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을 떠나는 데 미련은 없었다. 아니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현에 대한 생각까지 이르자 민영은 나직이 한 숨을 내리 쉬었다. 보딩을 기다리며 벤치에 앉은 그녀는 CDP를 꺼냈다. 그의 피아노 선율을 들으며 민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주말도 아닌데 차가 막혔다. 수현은 택시에서 안절 부절 못하다 결국 중간에서 내렸다.뛰고 걷고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움직이다가 택시가 있으면 또 잡아탔다. 조금 빨리 가면 비행기가 뜨기 전에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떠나버렸을 수도 있다. 수현은 갖가지 생각으로 머릿 속이 복잡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그는 공항에 도착했다.

 

 보딩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민영은 얼마 간의 돈을 달러로 환전하고, 그 옆의 서점에서 책을 두 권 샀다. 아프리카에서는 국외 택배로도 우리 말 책을 받기가 힘들 것이었다. 무게 때문에 욕심껏 많이 구해갈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당분간 읽을 책은 필요할 것 같았다.새치기 한 사람 덕분에 그녀는 계산대 옆의 우리나라 엽서에 눈이 닿는다. 지인들에게 가끔은 이 메일이 아닌 손으로 쓴 엽서를 보내는 것도 괜찮겠구나 싶어 그녀는 엽서도 몇 장 샀다. 준비는 다 끝났다. 이제 비행기를 탈 일만 남았다. 벤치에 앉아 책 두권과 엽서들을 핸드 캐리어에 단단히 담고 그녀는 게이트로 향했다.

 공항 안에서는 배웅 하러 온 사람들과 맞이하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것을 염두해 둔 터라,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보딩 시간을 말하지 않았다. 다른 건 다 괜찮았다. 단지 그 순간 그 공항으로 수현을 픽업하러 왔을 때가 떠올라 민영은 쓰게 웃었다. 그렇게 고개를 돌렸을 때, 민영은 멈춰섰다. 자신의 바로 앞에... 땀에 범벅이 되서 고르지 못한 숨을 내쉬고 있는 수현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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