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은 숨을 거칠게 내쉬며 민영을 바라보았다. 안 보던 사이 민영은 긴 머리를 단발 컷트로 치고 모습도 조금 야윈 듯했다.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가 꼭 꿈 속에서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둘은 잠시 그렇게 말이 없었다. 얼마 동안 그렇게 있다가 민영의 표정에 점차 미소가 번졌다.예의 그 기분 좋았던 미소가 아니었다. 언젠가 보았던 그 씁쓰레한 미소... 수현이 순간 당혹스러워했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그녀는 수현에게 몇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아침은 ...잘... 챙겨 드...."

 "내가 먼저 얘기 할께."

 수현은 민영의 말을 막았다.

 "첫 번째 소원은 100일 동안 애인되주기 였어."

 민영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그런데 우리가 애인으로 지낸 건 두 달이 조금 넘었을 뿐이야."

 민영은 침묵을 지킨다.

"두 번째 소원은 동요 100곡 칠 수 있도록 피아노 가르쳐주기 였어."

 또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그런데 넌 아직 절반도 못 치잖아."

 "괜찮아요..."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수현의 목소리는 조금 격앙 되있다.

 "세 번째 소원은 기쁘게 보내주라는 거였는데..."

 민영의 얼굴에서 그 보기 싫은 미소가 사라졌다. 수현은 말을 이었다.

 "그런 나 한테 넌 언제 떠난다는 얘기도 안 했고, 어디로 갈 건지도, 왜 가야 하는지도 얘기 안했어. "

 말없이 민영은 수현을 바라보고만 있다. 조금 있으면 정말로 보딩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수현의 말을 끊고 그 자리를 뜨면 안 될 것 같았다.

 "네가 원했던 소원... 이런 거였어?"

 민영은 그제야 한숨을 쉰다.

 "...괜찮아요... 이렇게 오셨으니까...제 세번째 소원도...이루어 졌네요..."

 '그래, 보고 싶었는데... 당신을 봤으니까 됐어.'민영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꼭 꼭 눌러 참는다.

 "그럼... 전 이만..."

 발걸음을 떼자, 수현이 한 발 다가서며 그의 앞을 막는다.

 "그럼 이제 내 차례지?"

 민영의 눈이 동그랗게 된다.

 "지금 말 할게...내 소원도...꼭... 들어주기다..."

 수현은 숨을 몰아쉰다.

 "내 첫 번째 소원은...."

 민영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수현이 말한다.

 "네 세번째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거야..."

 그녀의 얼굴에 놀란 빛이 든다.

 "두 번째는 네 진짜 애인이 되는 것."

 민영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세 번째는 ..."

 수현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걸 민영은 보았다.

"네가 영원히 내 옆에 있어 주는 거야."

 민영은 현기증이 일면서 귀가 먹먹해옴을 느낀다. 공항 안에는 그녀를 찾는 안내 방송이 울리고 있었다.

 "떠나지 마..."

 수현의 눈에서 눈물이 내린다.

 "가지 마..."

  민영은 그를 올려다 보고 입을 열지 못한다. 그러다 고개를 떨군 그녀의 눈에, 상처가 나서 퉁퉁 부은 그의 손이 보인다. 공항 안에서는 여전히 민영을 찾는 안내방송이 울린다.

         .

         .

         .

  삐이이이이-.

 초인종이 울렸다. 수현은 침대에서 일어나 현관 쪽으로 향해 간다.

 "너무 이르잖아. 아침은 됬다니까."

 수현은 빼꼼이 연 문틈으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사실, 그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며 얼마나 잠을 설쳤는지 모른다.   

 "얼른 나오세요. 기다릴 테니까."

 수현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들어와 있을래? 금방이면 되는데."

 "아니요.괜찮으니까 빨리 나오세요."

 수현이 준비하고 밖으로 나오는 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침이었지만 햇빛이 따뜻했다. 그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색깔이 예쁜 자전거를 끼고 민영이 서 있었다. 수현은 그녀를 보자마자 자연스레 미소가 떠올랐다. 서로는 함께 염색한 티를 입고 있었다. 기분 좋은 쑥 향기가 났다.

 "손은 좀 어떠세요?"

 민영이 묻자 수현은 드레싱 처리를 한 자신의 손을 들어보이고 까딱까딱 움직여본다. 두 사람은 곧 자전거를 타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오늘은 그들이 사는 동네에서 좀 떨어진 공원 쪽으로 하이킹을 가기로 했었다. 떠나는 대신 남기로 한 민영이 수현의 소원 들어주기를 조심스레 진행한지 3일이 되었다. 

 3일동안 수현과 민영은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수현은 강시현과 윤서준에 대한 아픔을 고백했고, 민영은 그 윤서준을 좋아했던 친구 재은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 말했다.수현은 윤서준이 자신의 꿈에 나타나 행복해 지라고 했던 건 민영과의 만남을 두고 한 말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결국 두 사람의 공통점이 두 사람을 만나게 했노라는 데 의견을 일치시키며 그들은 함께 울고 웃었다. 이야기가 길어져 밤을 샐 즈음에는 서로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기도 했다. 

 "목 안 말라요?"

 이마에 흐르는 땀을 팔에 닦으며 민영이 수현에게 묻는다.

 "말라. 뭐 있어?"

  그렇게 말하며 수현은 민영에게 다가와 주머니에 넣어둔 손수건을 빼내 이마를 닦아준다.

 "물 얼린 것 있어요."

 그녀의 얼굴에 붉은 빛이 돈다. 둘은 나란히 앉아 물을 나눠 마신다. 잎들이 제법 굵고 진한 녹색을 띤 나무 아래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있다.

   잠시 말도 없이 흐르는 강물만 무심히 바라본다. 그러다 수현이 드디어 물어보고 싶었던 것을 물어본다.

 "후회... 안 해?..."

 "뭐가요?"

 수현은 잠시 망설인다.

 "해외 봉사 안 간 거."

 민영은 수현을 돌아보고 또 웃는다.

 "후회를 왜 해요? 여기서도 할 일이 생겼는데."

 그 말에 수현도 같이 웃는다.

 "내가 네 할 일이야?"

 민영은 댓구 없이 그저 웃는다. 수현도 그건 마찬가지다.민영은 CDP를 꺼냈다. 안에는 수현의 피아노 연주 음반이 들어있었다. 두 사람은 이어폰을 나눠 끼고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렇게 말없이 호수만 보다가 수현이 민영의 어깨를 가만히 끌어당겼다. 민영도 가만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두 사람에게는 그 이상의 애정 표현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했다. 민영은 가만히 숨을 죽였다. 심장 소리가 그의 귀에 들릴까봐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수현은 가만히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어느 새 음악이 멈췄다. 그리고 사방이 조용했다.

 "...사랑.. 해..."

 민영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웃었다. 수현도 조용히 웃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 번 더 속삭였다.

 "사랑해."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이 그들이 앉은 나무에 불어 가지를 춤추게 했고, 그 주변의 배경을 고즈넉하게 만드는 듯 했다. 그들의 뇌리에 이제는 이날의 눈부심 만이 깊이 박힐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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