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 저자


단편소설 '오직 두 사람'을 쓴 김영하 작가는 지난 1995년 계간 '리뷰'에 '거울에 대한 명상'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장편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너의 목소리가 들려', '퀴즈쇼', '빛의 제국', '검은 꽃', '아랑은 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등을 썼으며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하기도 했다. 김영하 작가는 또한 문학동네작가상, 동인문화상, 황순원문학상, 만해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줄거리·느낀 점


김영하 작가의 신작이자 단편소설 모음집인 '오직 두 사람'은 약 칠 년 동안 쓴 일곱 편의 단편 소설을 묶었다. 그 중 단편소설 '아이를 찾습니다'는 세월호 사건이 터졌던 2014년 겨울에 발표한 것으로 다음해인 2015년에 김유정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가장 먼저 '오직 두 사람'은 주인공 현주의 친아버지가 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한 후 자신이 아는 언니에게 편지를 보내는 형식으로 시작한다. 평생을 아버지와 함께 했던 현주는 마흔 살이 넘는 나이가 되면서 자신의 부녀 관계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아버지에게 벗어나기 위해 외국에 사는 친언니에게 간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자신은 '진정한 나'의 모습이 아님을 깨닫고 아버지가 있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단편소설 '아이를 찾습니다'는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갑작스럽게 아이를 잃어버리고 그 충격에 아내 미라마저 병을 얻게 되어 한순간에 인생이 바뀐 주인공 윤석의 이야기다. 정규직으로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오로지 아들을 찾기 위해 전단지만을 돌리던 그, 어느날 아이를 찾았다는 전화를 받게 됐지만 그 앞에 나타난 아들은 전단지 속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어색하기만 하다. 아들 역시 자신을 납치한 여자가 진짜 어머니인 줄 알고 컸기에 진짜 자기 가족은 남으로 치부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아내 미라를 잃은 윤석은 아들의 아이를 홀로 키우게 되는 상황이 생기는데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이 애타게 기다렸던 한 아이만이 남겨졌다는 것에서 그가 원했던 삶을 찾은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단편소설 '인생의 원점'에서는 어릴 적 좋아했던 여자아이를 다시 만난 후 갈등을 겪게 되는 서진의 이야기다. 서진은 현재의 남편에게 매일 구타당하는 인아와 함께 살게 되는 꿈을 꾸지만 뒤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사채업자에 겁이 나 그녀를 피한다. 남편을 모르고 죽였다는 인아의 말에 서진은 달려오지만 그 남편이 사채업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혼란이 오는데, 이후 인아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사채업자가 모두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기뻐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섬뜩하면서도 한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이 느껴지기도 했다.


단편소설 '옥수수와 나'에서는 소설가인 주인공이 아내의 부탁에 새 소설을 쓰기 위해 머나먼 외국으로 떠난다. 출판사 사장이 빌려준 집에서 우연히 그의 아내를 만나게 된 주인공은 불륜을 일으키면서도 자신의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몰두한다. 결국 출판사 사장에게 불륜이 발각되어 눈 앞에서 죽음의 약을 받게 되는데 자신이 죽은지도 안 죽은지도 모른채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심오했다.


단편소설 '슈트'는 자신의 기억에 조차 없던 아버지가 외국에서 돌아가셨다는 말에 직접 찾아갔으나 그곳에서 생전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여성 그리고 자기와 나이가 똑같은 한 남성이 나타나 자신의 아버지가 자기 아버지라고 말하는 내용이 담겼다. 매일 허름하게 옷을 입고 다니는 시인이자 주인공은 자신의 아버지가 진짜 친아버지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품인 슈트를 입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단편소설  '최은지와 박인수'는 출판사 사장이자 주인공인 박인수가 자신 밑에서 일하는 직원인 최은지로 인해 구설수가 오르는 내용이다. 결혼을 하기 싫고 오로지 아이만을 원하는 최은지의 심경을 직원들 앞에서 대변해주라는 부탁을 받게 된 박인수는 자신은 착하고 직원들에게 성실하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착각일뿐 주변에선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각종 오해를 받게 된 박인수는 그전엔 없는 무자비한 사장으로 바뀌는데 그것이 더욱 편하다는 모습에서 이야기가 끝난다.


'신의 장난'에서는 한 회사의 워크샵을 갔다가 방에 갇힌 네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여기서 주인공인 정은은 힘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강재와 인과관계를 믿는 태준, 그저 신에게 기도만을 하는 수진 앞에서 자신은 방을 탈출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에 죄책감을 갖는다. 결국 방을 탈출하기 위해 모두와 함께 전략을 짜지만 결국 실패한 정은은 역시 아무런 것도 하지 않음이 맞다며 원점으로 돌아온다.


김영하 작가의 일곱 작품에서는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과 남들이 판단하는 양심에서 갈등을 빚는 주인공의 모습이 차례대로 나온다. 결국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말이 맞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는데 한 사람이 생각과 갈등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김영하 작가의 문체에 빠져들이 책을 덮지 않고 쭉 읽어가게 된다.


지난 2013년에 출간한 장편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으로 김영하 작가를 알게 됐는데 그의 문체는 심오하면서 그대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매력이 있다. 이번 단편소설 모음집인 '오직 두 사람'도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사건으로 한 사람이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는지를 파악하며 읽다 보면 다음 작품도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 기억하고 싶은 구절


전신마취를 하면 인간은 그때 그냥 죽는 거야. 문서를 복사하면 열화가 일어나듯이 오랜 시간 마취됐다가 깨어난 사람은 원래의 그 사람이 아니야. 일종의 복사물인 거지. 도마뱀의 꼬리도 잘리면 다시 자라나긴 하지만 원래 크기로는 자라지 않는다잖아 – 12


언니, 수학에 이런 방정식 있잖아요? 예를 들면 3x+4xy+6xyz=8이라고 해요. 그럼 좌변에서 x를 괄호 밖으로 빼낼 수 있잖아요? X(3+4y+6yz)=8. 여기서 x가 아빠에요. 아빠를 괄호 밖으로 빼내면 수식은 참 단순해져요. 하지만 그렇다고 아빠가 어디로 사라진 건 아니예요. 수식을 잘 보세요. 괄호 밖에서 x가 모두를 가두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 36


다들 충고들을 하지요. 인생의 바른길을 자신만은 알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서요. 친구여, 네가 가는 길에 미친놈이 있다니 조심하라.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전화를 받는 친구가 바로 그 미친놈일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미친놈도 언젠가 또다른 미친놈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거예요. 인생을 역주행하는 미친놈이 있다는데 너만은 아닐 줄로 믿는다며. 그 농담의 말미처럼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미친놈은 아마 한둘이 아닐 거고 저 역시 그중 하나였을 거예요 – 39


멍하다. 지난 세월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살아온 그였다. 그런데 마음이 왜 이럴까. 흥분도, 감격도 없다. 저 두 명의 여자, 미쳐가는 아내, 그리고 지금의 이 상황,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진다. 이것은 혹시 잠시 후 저들이 데리고 들어올 애가 가짜라는 어떤 초자연적 증거가 아닐까? 부모의 직감이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예지몽 하나 없이, 그 어떤 징조조차 없이 갑자기 들어온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 60


견딜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지나다 보니 어찌어찌 견뎌냈다.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은 바로 지금인 것 같았다. 언젠가 실수로 지름길로 접어드는 바람에 일등으로 골인하고서도 메달을 빼앗긴 마라토너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 결승점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때, 그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 65


어디서부터, 왜, 모든 것이 어그러졌을까? 마트에 가자고 한 아내의 잘못인가? 부주의하게 카트의 손잡이를 놓아버린 자기 잘못인가? 아니면 화장품 가게에서 클렌징크림을 산 아내의 잘못인가? 둘은 상대방의 부주의를 원망하고 비난했다. 싸움은 상대의 숨겨진 무의식까지 넘겨짚으며 위험구역으로 들어갔다. 당신은 원래 애를 원하지 않았어. 그래서 내가 대신 벌을 받은 거라고! 미라가 소리를 지르며 윤석은 한때 낙태를 고려했던 미라를 비난했다. 애를 원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너야. 도대체 그놈의 직장이 뭐라고, 애는 천천히 낳으면 된다고 말했던 게 바로 너 아니었어? 가혹한 처음 몇 년이 지나간 후에는 체념과 냄소의 세월이 이어졌다. 그들을 이어준 것은 전단지였다. 그것은 종교적 상징이자 의식이었다. 매달 찾아가는 인쇄소는 그들의 교회였고 전단지는 고난의 현세를 잊고 천국으로 인도할 복음서였다. 그러는 동안 미라의 병은 점점 깊어져갔다 – 66


사람들은 그가 미친 아내를 떠맡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윤석이 정신 나간 아내에게 기대하고 있었다. 아무 소용이 없는 줄 알면서도 매일 전단지를 돌린 것처럼, 남들이 보기엔 아무 희망도 없는 부부관계에서 그는 삶을 지탱할 최소한의 에너지를 쥐어짜내고 있었다. 그에게 미라는 카라반의 낙타와도 같은 존재였다. 목표와 희망까지 공유할 필요는 없었다. 말을 못해도 돼. 웃지 않아도 좋아. 그저 살아만 있어다오. 이 사막을 건널 때까지, 그래도 당신이 아니라면 누가 이 끔찍한 모래지옥을 함께 지나가겠는가 – 71


모르지. 본 적도 없고 만진 적도 없어. 마치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혼처럼, 내 내부에 있다는, 인간마다 고유하다는 그것에 대해 나도 이전엔 아무 관심도 없었지. 너를 잃은 후에야, 방바닥을 기어다니며 너의 갈색 머리카락을 주워본 후에야 나는 유전자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됐지. 그게 내 아이를 다시 찾아줄지도 모른다고 믿었지. 그리고 그 결과로 지금 네가 내 앞에 앉아 있지. 그런데 나는 네가 아주 낯설고 너 역시 그렇겠지. 우리가 네 배내옷에서 찾아낸 머리카락과 네 구강에서 긁어낸 세포에서 나온 유전자가 일치하면 그게 한 사람이라는 증거라는데, 우리가 그걸 믿어야 한다는데, 반드시 믿어야 한다는데, 그럴 수밖에 없다는데, 왜 그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를 않을까? – 76


서진은 인아가 이런 순간을 이미 여러 차례 겪었으며, 지금 이 장면 역시 인아가 겪어왔고 앞으로도 겪을 순간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직감이 들었다. 불행한 결혼생활을 계속해온 인아가 어떻게 자신한테만 마음을 열었겠는가? 뭔가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의 인생으로부터 도망친 여러 남자가 서진 이전에 존재했던 것이다. 서진에게는 인아가 회귀할 원점이었으나 인아에게 서진은 인생이라는 힘겨운 등산길에서 만나게 되는 대피소와 같은 것이 아닐까. 원점과 달리 대피소는 당장은 눈물나게 고마울지 몰라도 언제든지 새로 만날 수 있다. 서진은 인아에게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 92


서진은 생각해보았다. 인아가 죽고 없는 것과 사채업자가 살고 있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자신에게 더 고통스러울까. 살아서 사채업자의 여자가 되어 있는 것이 어쩌면 더 힘들 것 같았다. 인아의 죽음을 두고 이런 상상이나 하고 있는 자신이 혐오스러웠지만,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인아는 죽었고, 그 남편도 곧 죽거나 그에 버금가는 상태가 될 것이고, 사채업자는 교도소에 가게 될 것인데, 자신만 아무 일 없이 무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게 문득 기가 막히게 좋았다. 행복감이 솟구쳤다. 엄청난 유혹을 이겨내고, 위기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지켜냈다는 것에 자부심마저 들었다. 인생의 원점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 그런 정신적 사치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 그게 진짜 중요한 거야. 그는 이제야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고, 어릴 적 위인전이나 읽으며 헛된 꿈을 꾸던 감상적 어린아이와 결별했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하기도 했다 – 108


섹스 파트너와 뭔가를 교환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지. 나는 그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 교환하다니? 뭘? 전쟁 당사국들이 전쟁을 교환하지 않듯이, 바둑 친구들이 바둑을 교환하지 않듯이, 섹스 파트너들끼리도 섹스를 교환하지 않아. 나와 그녀는 뭔가를 교환하기 위해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낭비하기 위해 만나는 거야. 우리는 시간과 에너지를 함께 소비하지. 그러나 궁극적으로 낭비하는 것은 바로 섹스라는 관념이야. ‘나는 섹스를 한다’는 무거운 관념을, 덤프트럭이 모래를 쏟아놓듯 훌훌 던져버리고 홀가분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비트겐슈타인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섹스 파트너라는 이름의 상자를 공유하고 있는 거야.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열지 않아. 우리가 뚜껑을 열지 않는 한, 우리는 안전해 – 123


사장은 원고를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출판사 사장에게 원고를 넘기고 이렇게 긴장해본 적이 있었던가? 한 손에 총을 든 편집자라니, 어쩌면 저것이야말로 모든 편집자가 꿈꾸는 모습이 아닐까? 뺀질거리며 마감을 안 지키는 작가의 집에 들이닥쳐 초고를 탈취한 후 즉결심판 하는 것이다. 수작이면 살려주고 태작이면 사살한다. 초고조차 안 써놓은 뻔뻔한 작가는? 그 자리에서 바로 총살. 탕, 탕, 탕, 마피아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지. ‘친절한 말 한마디에 총을 곁들이면 좀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다.’ – 156


범죄자와 작가는 비슷한 구석이 있다. 은밀히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계획이 뻔하면 덜미를 잡힌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때로는 자기 꾀에 자기가 속는다는 점도 그렇지. 이 아파트에서 내가 쓰고 있던 소설은 정해진 플롯이라고는 없는 중구난방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었다. 반면 사장의 음모는 아주 짜임새 있는,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저급한 추리소설의 냄새를 풍긴다. 그런데도 승자는 사장이라니, 이것은 혹시 잘 짜인 플롯이 결국에는 중구난방 요령부득의 서사를 이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너무 비약인가? 나는 내 곁에서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영선을 바라보았다. 이 범죄 치정극의 마지막 퍼즐, 그런 소설에는 꼭 등장하는 절대 미모의 팜므파탈, 그런데 이 여자, 너무 얌전하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치고는 – 166


출판사의 구석진 책상에 앉아 하루종일 범죄소설을 편집하는 이 시인이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던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좀 섬뜩한 생각이 들어 나도 입을 다물었다. 그가 짐을 챙겨 JFK 공항으로 떠난 후, 아내는 전에 없던 규모의 대청소를 했다. 마치 그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버리겠다는 듯이 – 190


당시에, 내가 그 여자한테 결별을 통보하고 피해다녔을 때 말야. 그 여자가 미친듯이 나한테 매달렸었거든. 전화하고 집으로 찾아오고, 스토커가 따로 없었어. 그런데 내가 정말 매몰차게 대했어. 심한 말도 퍼붓고 받은 선물도 다 다시 소포로 보내버렸어. 정나미 떨어지게 한 거지. 그러니까 결국은 포기하고 마음을 정리하더라. 그런데 하루는 샤워를 하다가 문득 내 거시기를 보게 됐어. 균, 그 여자한테 옮은 성병 균이 아직도 거기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항생제 먹어서 다 죽었겠지만 일부는 남아 있지 않을까.뭐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남아 있었으면 좋겠더라고. 어쨌든 그 여자한테 받은 거잖아. 말을 안 했으니 그때도 그 여자 몸속에는 당연히 그 균들이 남아 있었을 거고. 우리가 마지막으로 공유한 유일한 존재가 바로 그 균이였던 거야 – 228


아, 수진은 속죄를 믿고, 강재는 자기 덩치를 믿고, 태준은 인과관계를 믿는데, 나만 아무것도 믿지 않기 때문에 무임승차자가 된 것이로구나. 나도 믿는 것이 있어. 지리산 도령 강재씨, 나는 우울을 믿어. 인간은 천둥이 치고 비가 퍼붓는 궂은 날씨에는 울적하도록 진화했어. 가만히 동굴에 틀어박혀서 날씨가 좋아지길 기다리는 게 유리하거든. 에너지를 아끼면서 말이야. 인류가 이렇게 진보한 건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끝없이 자신의 과오에 집착해온, 사실 나 같은 우울증 환자들 덕분이야. 그들을 헛된 희망을 품지 않아. 스스로를 과신하지도 않고, 그래서 살아남은 거야 -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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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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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신작은 예판으로 사면 안 된다는 것을 이번에도 느꼈다. 책을 구매한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이번에 구매한 사람들만 북커버를 준단다. 예전에도 몇 번이나 이런 경우가 많았는데 앞으론 알라딘에서 책 구매 시에는 당장 읽을 책이 아니라면 조금 지켜보고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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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 하트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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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저자


장편소설 '데드하트'를 쓴 작가 더글라스 케네디는 우리나라에서는 '빅 픽쳐' 작가로 유명세를 탄 바 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미국보다는 프랑스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자랑하며 프랑스문화원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기도 했다. 더글라스 케네디가 쓴 소설은 '빅 픽쳐', '픽업', '비트레이얼', '빅 퀘스천', '스테이트 오브 더 유니언', '파이브 데이즈', '더 잡', '리빙 더 월드', '템테이션', '행복의 추구', '파리5구의 여인', '모멘트', '위험한 관계' 등이 있다.


# 줄거리·느낀 점


※ 스포 주의


어지러운 도시 생활을 오래도록 하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오지로 가서 생활해보고 싶은 생각을 한다. 보통 상상으로만 생각할 뿐인데 '데트하트' 속 주인공인 닉 호손은 이를 실행하기 위해 자신이 살던 곳에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호주로 여행을 떠난다.


호주로 온 닉 호손은 길에서 만난 목사에게 밴을 구매해 퍼스라는 곳으로 여행 계획을 세운다. 야간 운전 중 갑작스럽게 캥거루를 친 닉 호손은 수리 및 기름을 넣기 위해 한 주유소를 들렸고 그곳에서 자신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게 될 여인 앤지를 만난다.


앤지를 만난 닉 호손은 그동안 만났던 여자와는 달리 야생 분위기를 내는 그녀에게 매력에 빠졌다. 이후 여러 차례 관계를 갖은 닉 호손은 슬슬 그녀와 헤어지려고 했으나 어느순간 정신을 잃었고 그녀의 손에 의해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는 마을인 울라누프로 납치된다.


공동생산과 공동소비로 주민자치를 실현하는 마을인 울라누프에 오게 된 닉 호손은 사이코 같은 앤지와 그의 아버지 대디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탈출을 시도하려 밴을 고쳤지만 결국 망가지게 된다.


데드 하트라는 황무지를 지나 약 400km나 떨어진 울라누프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사라진 닉 호손은 점점 정신이 피폐해지고 무기력해진다. 그런 닉에게 크리스탈이라는 여성이 나타나게 되고 그녀의 도움으로 다시 밴을 고쳐 탈출을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닉은 대디를 포함한 울라누프 사람들을 총으로 쏴 죽이게 되지만 경찰에 잡히지 않은 채 탈출을 성공해 미국으로 돌아온다.


장편소설 '데드하트'의 주인공 닉 호손은 이기적이면서도 아무런 책임을 지고 싶지 않는 청년이다. 그런 그에게 하늘이 벌이라도 주듯 나타난 앤지와 울라누프 마을, 그곳에서도 그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려 하지 않고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런 그에게 천사처럼 내려온 크리스탈도 탈출을 도우려다 결국 죽게 됐지만 닉은 잠깐이나마 자책할 뿐 어떻게든 호주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그동안 더글라스가 쓴 장편소설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읽을 정도로 그의 팬이라 자부한다. 이번에 나온 장편소설 '데트하트'도 주말동안 단숨에 읽었고 그의 중독성 있는 스토리와 문체에 감탄이 나왔다. 잠시나마 킬링 타임을 갖고 싶거나 최근에 나온 장편소설 중에서 추천을 받고 싶다면 더글라스 케네디의 '데트하트'를 읽어보면 좋겠다.   


# 기억하고 싶은 구절


작고 사소한 행복이야말로 우리의 생에서 기대할 수 있는 진정한 축복일진대 왜 우린 평생 어렵게 행복을 찾아 헤맬까? - 22


오하이오 주 애크런이라면 자동차타이어를 생산하는 공장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 아닌가? 애크런에서 2년을 보낸다는 건 내 자신을 스스로 박제해두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왜 나는 아무런 보람도 없는 일에 내 자신을 꽁꽁 묶어두려 하는가? 나에게는 생계를 책임질 가족도 없지 않은가? 내가 꿈꾸는 홀가분한 삶을 살고 싶다면 잠시나마 다람쥐 쳇바퀴에서 벗어나 거대한 자연으로 사라질 때가 되지 않았나? - 26


세상의 시작인가? 아니면 세상의 끝인가? 아무튼 내 처지에 걸맞은 심연이야. 내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변명의 여지없이 시각적으로 확인했다. 이제 더 이상 볼 게 없었다. 오지? 이미 눈으로 확인했으니 여행의 목적이 이미 실현된 게 아닌가? - 48


원시적인 대자연 속에 있다 보면 사소한 근심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은 죄다 헛소리일 뿐이었다. 내 경우에는 오히려 두려움과 자기혐오가 증폭되었다. 대자연이 내게 말했다. "넌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 59


남자들 대부분은 여자가 섹스를 강요하는 상황이 되면 두려움을 느낀다. 여자가 권총을 겨누며 섹스를 원할 경우 더욱 그렇다 - 85


여행지에서의 불장난은 유효 기간이 짧다. 유통기한이 길어야 일주일을 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불장난에 빠져들게 된다. 끝내야 하는 순간이 다가왔음에도 '며칠만 더' 시간을 늘려보려 하는 건 어리석고 미련한 짓이었다 - 91


향수병이 가장 심하게 느껴질 때는 언제일까? 내가 스스로 나를 유배시킨 경우인 듯했다. 직므 나는 전혀 납득할 수 없는 곳에 와 있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자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곳,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에 와 있었다 - 108


절벽 위에 앉아 90미터 아래의 울라누프 마을을 내려다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 가장 먼저 벗어날 길 없는 막다른 길이 떠오르지 않을까? 뜨거운 태양에 시들어버린 마을, 비상구가 보이지 않는 구덩이의 중심부에 서서 붉은 포탑들을 올려다보면 위협적인 자연에 조롱당한 느낌이 들 것 같았다 - 151


그날 밤, 문어의 빨판 같은 앤지의 팔에 안겨 잠이 들기 전 '소니와 셰어'라는 이름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나는 결혼하길 원한 적이 없었고, 아이를 원한 적도 없었다. 나란 인간을 복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내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곧 아빠가 되어야 하고, 아이의 이름을 지어야 하다니? 소니와 셰어? 그 이름이 마치 죽음의 종소리처럼 귓전을 울렸다 - 188


5년 동안 울라누프에서 가석박 없는 생활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 마을이 정말 나의 종착지인가? 나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죄수처럼 어느 화창한 날 아침에 누군가 내 등을 툭 치며 '이제 죄수 생활이 모두 끝났어. 나가도 돼.' 하고 말하기를 헛되이 희망했다. 혹은 경비가 더없이 삼엄한 이 마을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기를 헛되이 희망했다 - 202


사람들은 힘든 노동에 더욱 큰 목적이 있는 척하며 삶을 견딘다. 노동이 그저 의식주를 해결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 아니라 더욱 큰 목적이 있는 척한다. 결국 우리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일할 뿐이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초라한지 마주하지 않기 위해 일할 뿐이다. 계속 바삐 일하다 보면 우리의 삶이 절망적으로 무가치하다는 사실과 우리 스스로 빠져든 막다른 길의 깊은 수령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 204


엔지의 말대로 나는 똥오줌이 질펀한 매트리스에서 잠을 자야 했다. 앤지는 나를 똥오줌 천지인 매트리스에 내버려두고 빈백 의자에서 잠들었다. 그때서야 나는 내가 벌인 짓이 마냥 연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머릿속이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내 자신도 알 수 없는 세계에 다다라 있었다. 연기였다면 지금쯤 포기해야 마땅했다. 밤새 똥오줌 천지인 매트리스에서 누워 잔다는 건 연기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더러운 침구를 앤지의 얼굴에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내 의지력은 완전히 바닥났고 기력은 탈진 상태였고 머릿속은 몽롱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 219


이제 예전생활보다 더욱 의미 없는 일상에 갇힌 나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며 헤아릴 수 없는 가치가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대디가 밴을 망가뜨렸을 때 내가 왜 무기력증에 빠지게 되었는지 그 이유도 깨달았다. 내가 마침내 소중한 시간을 들여 구축한 일이었기 때문이며, 혼신을 다해 일했던 성과가 눈앞에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 285


앤지에게 작별키스를 하고 싶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의자로 앤지의 머리를 내려치고 싶기도 했다. 결국 나는 이 모든 어리석은 우연에 머리를 가로저었을 뿐이다. 주유소에서 쓸데없이 멈췄고, 낯선 여자를 만났고, 갑자기 삶이 엉망이 되었다. 운명은 잔인하지 않지만 터무니없었다.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마지막으로 집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이 쓰레기장 같은 집이 머릿속에 영원히 기억되도록 깊이 아로새겨 두었다. 마침내 나는 문을 열었고, 정식으로 도주로에 올랐다 - 297


여태껏 지금 달리고 있는 길에 필적할 만큼 잔혹하고 위험한 길로 들어서본 적이 없었다. 황량하고 메마른 땅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잠시 더위를 식힐 나무그늘도 없었다. 마른 잡초조차 없었다. 생명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생명체가 나타나면 여지없이 죽여 버리는 무시무시한 황무지였다. 평평하게 펼쳐진 메마른 세계, 검붉은, 녹아내린, 대륙의 데드 하트 - 311


크리스탈은 나를 지나치게 많이 아껴주었다. 나는 크리스탈이 지불한 대가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 나느 또 다시 아무런 소속 없이 이곳에 있다. 내게 연결된 끈은 없다. 마침내 나는 나의 고독, 나의 뿌리가 없다는 사실이 두려워졌다. 책임 없는 삶은 실체 없는 삶이라는 말을 누가 했더라? 틀림없이 어떤 신성한 척하는 얼간이가 그 말을 했을 거야. 아무튼 그는 진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분명했다 - 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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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호가들
정영수 지음 / 창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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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단편소설 '애호가들'을 쓴 저자 정연수 작가는 1983년 서울생으로 지난 2014년 단편소설 '레바논의 밤'으로 창비 신인 소설상을 수상한 바 있다.


# 줄거리·느낀 점


한 권의 책을 끝까지 읽기보단 어느 순간 잊힐 때가 있다. 단순하게 읽을 문학 작품이 아닌 지식서를 읽었기에 그랬던 것일까? 머리를 비우기 위해 가볍게 읽을 국내 작가의 소설을 찾다가 평소 호감 있던 출판사인 창비에서 추천한 정연수 작가의 소설 '애호가들'을 알게 됐다. 커다란 소라가 가지런히 놓인 표지에 이끌려서인지 오랜만에 남성 작가의 작품을 읽을 수 있어서인지 어느새 '애호가들'은 내 손에 담겨 있었다.


'애호가들'은 정연수 작가가 그동안 '창작과비평'이나 '악스트'에 발표한 총 여덟 개의 단편소설이 담겨 있다. 사실 단편소설은 보통 함축적인 내용이 많이 담겨 있고 한 번 읽어서는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어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는다. 책을 읽다가도 이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이해가 어렵기 때문이다.


'애호가들'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이 책에 담긴 여덟 개 작품의 공통점을 하나 발견했다. 이는 단편소설에 나온 주인공들은 교제하다 헤어진 연인과 우연한 계기로 다시 만나는 것인데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해피엔딩도 배드엔딩도 아닌 자연스럽게 시간이 흘러가듯 끝맺는다.


아마도 우리의 인생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살다 보면 정말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해피엔딩이나 배드엔딩이 아닌 예상치 못하게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 다음을 기약하며 안녕을 보내지도 못한 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은 누구나 겪는 일상이 아닐까.


정연수 작가의 '애호가들' 속 단편소설들은 막상 읽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작품 속 주인공이 독자들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를 정확하게 알기란 어렵다. 지금에야 생각해보면 아마 그게 맞는 게 아닐까. 타인의 인생을 모두 다 알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책을 읽다 보니 그동안 인연을 맺고 유유히 흘러간 지난 인연이 떠오른다. 그들이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지, 한때 우리가 함께 이야기했던 삶과 비슷하게 살고 있을지 아니라면 이후에 만난 인연으로 다른 삶을 사는 것인지, 그래도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이였기를.


# 기억하고 싶은 구절


책장을 넘기다보면 언젠가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다. 공부를 계속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정작 책장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언제나 그뒤엔 죽은 것들이 있었으니까. 살아 있는 것들을 바깥에 있고 이 안에는 늘 죽은 것들이 있었다 - 13


구덩이를 다 메우고 나서 적당히 주변을 정리한 뒤 나무둥지에 기대앉아서 숨을 도렸다. 연희가 앉아 있던 곳이었고 나는 거기에서 조금  전까지 구덩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나뭇가지와 돌을 적당히 흩어놓으니 방금 무언가를 파묻은 곳처럼 보이지 않았다. 시체는 사라졌고 장에게서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남은 것은 내 손에 들린 녹슨 삽 한자루뿐이었다. 나는 삽을 나무에 기대어놓았다. 산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매미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31


나는 희곡을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모든 희곡에는 미친 사람이 등장하지 않을까. 아니면 사실 모든 문학 작품에는 미친 사람이 등장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했다. 그녀는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하나는 사람들이 미치지 않고 이토록 긴 삶과 반복되는 매일을 견뎌내는 것이 너무나 놀랍다고 말했다. 자신은 이제 겨우 열여덟살이지만 이미 백년은 산 것 같다는 것이다 - 72


우리의 삶은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상 모든 것이 우연이기 때문에 우연이라는 단어 자체가 정말 필요한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세상이 생겨난 이래 일어난 모든 일은 우연이다. 이 간결하고도 명백한 명제를 따로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하필 그날, 그곳에서 선영이를 만나게 된 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우연이라 불리는 예측불허의 상황 충돌을 넘어선, 그야말로 운명의 장난이라고 할 만한 수준이었다. 키노꾸니야 서점에서 선영을 만나다니, 게다가 우에노도 아니고, 아끼하바라도 아닌, 이께부꾸로점이라니 - 86


나는 그떄까지 그렇게 거대한 육상 포유류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신화 속 존재 같았다. 안내판을 보니 그 동물은 신생대에 존저했던 인드리코테리아움이라는 이름의 거대 포유류였는데 무리 생활을 했던 동물이라고 쓰여 있었다. 삽화를 보니 말도 아니고, 사슴도 아니고, 기린도 아닌, 머리는 얼핏 코뿔소를 닮았지만 뿔은 없고 체형 또한 완전히 다른, 난생처음 보는 괴상한 동물이었다. 그런 이상하고 거대한 생물이 수십마리씩 몰려다녔다니 - 104


나는 그녀가 충분히 오랫동안 그 생물을 바라보기를, 그것이 살아 움직였던 머나먼 과거를 상상해보기를, 그것의 호흡을 느끼기를 기대하면서 아무 대답도 않고 함께 옆에 서 있어다. 그녀는 꽤 오랫동안 인드리코테리움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나만큼 그 생물을 보고 전율을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한참 동안 그것을 바라보는 그녀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것들도 자기들이 영원한 줄 알았겠지?" - 113


나는 경험을 통해 지루함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외할아버지의 부고를 들었을 때 나는 사방이 꽉 막힌 작업공간에서 지루한 노동을 반복하며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시기에 나는 매 작품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그리스비극을 머릿속으로 암송하며 매일매일 끊어질 듯한 숨을 연장하고 있었다. 아마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루함이라는 괴물에 잡아먹혔을 것이다. 잘근잘근 씹히고, 짓이겨지고, 꿀꺽 삼켜지고.. 아니, 나는 사실 매일 죽었다. 극한의 지루함이 나의 영혼에 경련을 일으키고 심장을 쥐어짰다. 지루함은 권태와 다르다. 권태가 아주 천천히 목을 졸라오는 그림자 같은 거라면 지루함은 역설적이게도 순식간에 몸을 잘라버리는 기요띤 같다 - 126


나는 그 이야기가 정말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중요한 문제 같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 이야기를 하필 지금, 내게, 왜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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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Asia (문재인 대통령 표지) 주간 아시아판 : 2017년 05월 15일 - 영어, 매주 발행
TIME(Asia)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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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하단 부위가 살짝 찢어져서 왔어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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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고객센터 2017-05-17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편드려 너무 죄송합니다. 좀더 신경써서 작업하지 못한 점 다시한번 죄송한 말씀드리며
지적하신 부분은 담당부서 작업자들 전달하여 더 주의 기울이겠으니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후 이용하시면서 불편하신 부분은 나의계정>1:1고객상담으로 연락주시면 신속하게 안내 드리고 있으니 참고해주십시오.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