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 저자


단편소설 '오직 두 사람'을 쓴 김영하 작가는 지난 1995년 계간 '리뷰'에 '거울에 대한 명상'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장편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너의 목소리가 들려', '퀴즈쇼', '빛의 제국', '검은 꽃', '아랑은 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등을 썼으며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하기도 했다. 김영하 작가는 또한 문학동네작가상, 동인문화상, 황순원문학상, 만해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줄거리·느낀 점


김영하 작가의 신작이자 단편소설 모음집인 '오직 두 사람'은 약 칠 년 동안 쓴 일곱 편의 단편 소설을 묶었다. 그 중 단편소설 '아이를 찾습니다'는 세월호 사건이 터졌던 2014년 겨울에 발표한 것으로 다음해인 2015년에 김유정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가장 먼저 '오직 두 사람'은 주인공 현주의 친아버지가 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한 후 자신이 아는 언니에게 편지를 보내는 형식으로 시작한다. 평생을 아버지와 함께 했던 현주는 마흔 살이 넘는 나이가 되면서 자신의 부녀 관계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아버지에게 벗어나기 위해 외국에 사는 친언니에게 간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자신은 '진정한 나'의 모습이 아님을 깨닫고 아버지가 있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단편소설 '아이를 찾습니다'는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갑작스럽게 아이를 잃어버리고 그 충격에 아내 미라마저 병을 얻게 되어 한순간에 인생이 바뀐 주인공 윤석의 이야기다. 정규직으로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오로지 아들을 찾기 위해 전단지만을 돌리던 그, 어느날 아이를 찾았다는 전화를 받게 됐지만 그 앞에 나타난 아들은 전단지 속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어색하기만 하다. 아들 역시 자신을 납치한 여자가 진짜 어머니인 줄 알고 컸기에 진짜 자기 가족은 남으로 치부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아내 미라를 잃은 윤석은 아들의 아이를 홀로 키우게 되는 상황이 생기는데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이 애타게 기다렸던 한 아이만이 남겨졌다는 것에서 그가 원했던 삶을 찾은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단편소설 '인생의 원점'에서는 어릴 적 좋아했던 여자아이를 다시 만난 후 갈등을 겪게 되는 서진의 이야기다. 서진은 현재의 남편에게 매일 구타당하는 인아와 함께 살게 되는 꿈을 꾸지만 뒤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사채업자에 겁이 나 그녀를 피한다. 남편을 모르고 죽였다는 인아의 말에 서진은 달려오지만 그 남편이 사채업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혼란이 오는데, 이후 인아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사채업자가 모두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기뻐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섬뜩하면서도 한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이 느껴지기도 했다.


단편소설 '옥수수와 나'에서는 소설가인 주인공이 아내의 부탁에 새 소설을 쓰기 위해 머나먼 외국으로 떠난다. 출판사 사장이 빌려준 집에서 우연히 그의 아내를 만나게 된 주인공은 불륜을 일으키면서도 자신의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몰두한다. 결국 출판사 사장에게 불륜이 발각되어 눈 앞에서 죽음의 약을 받게 되는데 자신이 죽은지도 안 죽은지도 모른채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심오했다.


단편소설 '슈트'는 자신의 기억에 조차 없던 아버지가 외국에서 돌아가셨다는 말에 직접 찾아갔으나 그곳에서 생전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여성 그리고 자기와 나이가 똑같은 한 남성이 나타나 자신의 아버지가 자기 아버지라고 말하는 내용이 담겼다. 매일 허름하게 옷을 입고 다니는 시인이자 주인공은 자신의 아버지가 진짜 친아버지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품인 슈트를 입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단편소설  '최은지와 박인수'는 출판사 사장이자 주인공인 박인수가 자신 밑에서 일하는 직원인 최은지로 인해 구설수가 오르는 내용이다. 결혼을 하기 싫고 오로지 아이만을 원하는 최은지의 심경을 직원들 앞에서 대변해주라는 부탁을 받게 된 박인수는 자신은 착하고 직원들에게 성실하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착각일뿐 주변에선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각종 오해를 받게 된 박인수는 그전엔 없는 무자비한 사장으로 바뀌는데 그것이 더욱 편하다는 모습에서 이야기가 끝난다.


'신의 장난'에서는 한 회사의 워크샵을 갔다가 방에 갇힌 네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여기서 주인공인 정은은 힘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강재와 인과관계를 믿는 태준, 그저 신에게 기도만을 하는 수진 앞에서 자신은 방을 탈출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에 죄책감을 갖는다. 결국 방을 탈출하기 위해 모두와 함께 전략을 짜지만 결국 실패한 정은은 역시 아무런 것도 하지 않음이 맞다며 원점으로 돌아온다.


김영하 작가의 일곱 작품에서는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과 남들이 판단하는 양심에서 갈등을 빚는 주인공의 모습이 차례대로 나온다. 결국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말이 맞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는데 한 사람이 생각과 갈등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김영하 작가의 문체에 빠져들이 책을 덮지 않고 쭉 읽어가게 된다.


지난 2013년에 출간한 장편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으로 김영하 작가를 알게 됐는데 그의 문체는 심오하면서 그대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매력이 있다. 이번 단편소설 모음집인 '오직 두 사람'도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사건으로 한 사람이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는지를 파악하며 읽다 보면 다음 작품도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 기억하고 싶은 구절


전신마취를 하면 인간은 그때 그냥 죽는 거야. 문서를 복사하면 열화가 일어나듯이 오랜 시간 마취됐다가 깨어난 사람은 원래의 그 사람이 아니야. 일종의 복사물인 거지. 도마뱀의 꼬리도 잘리면 다시 자라나긴 하지만 원래 크기로는 자라지 않는다잖아 – 12


언니, 수학에 이런 방정식 있잖아요? 예를 들면 3x+4xy+6xyz=8이라고 해요. 그럼 좌변에서 x를 괄호 밖으로 빼낼 수 있잖아요? X(3+4y+6yz)=8. 여기서 x가 아빠에요. 아빠를 괄호 밖으로 빼내면 수식은 참 단순해져요. 하지만 그렇다고 아빠가 어디로 사라진 건 아니예요. 수식을 잘 보세요. 괄호 밖에서 x가 모두를 가두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 36


다들 충고들을 하지요. 인생의 바른길을 자신만은 알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서요. 친구여, 네가 가는 길에 미친놈이 있다니 조심하라.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전화를 받는 친구가 바로 그 미친놈일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미친놈도 언젠가 또다른 미친놈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거예요. 인생을 역주행하는 미친놈이 있다는데 너만은 아닐 줄로 믿는다며. 그 농담의 말미처럼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미친놈은 아마 한둘이 아닐 거고 저 역시 그중 하나였을 거예요 – 39


멍하다. 지난 세월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살아온 그였다. 그런데 마음이 왜 이럴까. 흥분도, 감격도 없다. 저 두 명의 여자, 미쳐가는 아내, 그리고 지금의 이 상황,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진다. 이것은 혹시 잠시 후 저들이 데리고 들어올 애가 가짜라는 어떤 초자연적 증거가 아닐까? 부모의 직감이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예지몽 하나 없이, 그 어떤 징조조차 없이 갑자기 들어온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 60


견딜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지나다 보니 어찌어찌 견뎌냈다.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은 바로 지금인 것 같았다. 언젠가 실수로 지름길로 접어드는 바람에 일등으로 골인하고서도 메달을 빼앗긴 마라토너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 결승점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때, 그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 65


어디서부터, 왜, 모든 것이 어그러졌을까? 마트에 가자고 한 아내의 잘못인가? 부주의하게 카트의 손잡이를 놓아버린 자기 잘못인가? 아니면 화장품 가게에서 클렌징크림을 산 아내의 잘못인가? 둘은 상대방의 부주의를 원망하고 비난했다. 싸움은 상대의 숨겨진 무의식까지 넘겨짚으며 위험구역으로 들어갔다. 당신은 원래 애를 원하지 않았어. 그래서 내가 대신 벌을 받은 거라고! 미라가 소리를 지르며 윤석은 한때 낙태를 고려했던 미라를 비난했다. 애를 원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너야. 도대체 그놈의 직장이 뭐라고, 애는 천천히 낳으면 된다고 말했던 게 바로 너 아니었어? 가혹한 처음 몇 년이 지나간 후에는 체념과 냄소의 세월이 이어졌다. 그들을 이어준 것은 전단지였다. 그것은 종교적 상징이자 의식이었다. 매달 찾아가는 인쇄소는 그들의 교회였고 전단지는 고난의 현세를 잊고 천국으로 인도할 복음서였다. 그러는 동안 미라의 병은 점점 깊어져갔다 – 66


사람들은 그가 미친 아내를 떠맡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윤석이 정신 나간 아내에게 기대하고 있었다. 아무 소용이 없는 줄 알면서도 매일 전단지를 돌린 것처럼, 남들이 보기엔 아무 희망도 없는 부부관계에서 그는 삶을 지탱할 최소한의 에너지를 쥐어짜내고 있었다. 그에게 미라는 카라반의 낙타와도 같은 존재였다. 목표와 희망까지 공유할 필요는 없었다. 말을 못해도 돼. 웃지 않아도 좋아. 그저 살아만 있어다오. 이 사막을 건널 때까지, 그래도 당신이 아니라면 누가 이 끔찍한 모래지옥을 함께 지나가겠는가 – 71


모르지. 본 적도 없고 만진 적도 없어. 마치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혼처럼, 내 내부에 있다는, 인간마다 고유하다는 그것에 대해 나도 이전엔 아무 관심도 없었지. 너를 잃은 후에야, 방바닥을 기어다니며 너의 갈색 머리카락을 주워본 후에야 나는 유전자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됐지. 그게 내 아이를 다시 찾아줄지도 모른다고 믿었지. 그리고 그 결과로 지금 네가 내 앞에 앉아 있지. 그런데 나는 네가 아주 낯설고 너 역시 그렇겠지. 우리가 네 배내옷에서 찾아낸 머리카락과 네 구강에서 긁어낸 세포에서 나온 유전자가 일치하면 그게 한 사람이라는 증거라는데, 우리가 그걸 믿어야 한다는데, 반드시 믿어야 한다는데, 그럴 수밖에 없다는데, 왜 그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를 않을까? – 76


서진은 인아가 이런 순간을 이미 여러 차례 겪었으며, 지금 이 장면 역시 인아가 겪어왔고 앞으로도 겪을 순간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직감이 들었다. 불행한 결혼생활을 계속해온 인아가 어떻게 자신한테만 마음을 열었겠는가? 뭔가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의 인생으로부터 도망친 여러 남자가 서진 이전에 존재했던 것이다. 서진에게는 인아가 회귀할 원점이었으나 인아에게 서진은 인생이라는 힘겨운 등산길에서 만나게 되는 대피소와 같은 것이 아닐까. 원점과 달리 대피소는 당장은 눈물나게 고마울지 몰라도 언제든지 새로 만날 수 있다. 서진은 인아에게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 92


서진은 생각해보았다. 인아가 죽고 없는 것과 사채업자가 살고 있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자신에게 더 고통스러울까. 살아서 사채업자의 여자가 되어 있는 것이 어쩌면 더 힘들 것 같았다. 인아의 죽음을 두고 이런 상상이나 하고 있는 자신이 혐오스러웠지만,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인아는 죽었고, 그 남편도 곧 죽거나 그에 버금가는 상태가 될 것이고, 사채업자는 교도소에 가게 될 것인데, 자신만 아무 일 없이 무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게 문득 기가 막히게 좋았다. 행복감이 솟구쳤다. 엄청난 유혹을 이겨내고, 위기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지켜냈다는 것에 자부심마저 들었다. 인생의 원점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 그런 정신적 사치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 그게 진짜 중요한 거야. 그는 이제야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고, 어릴 적 위인전이나 읽으며 헛된 꿈을 꾸던 감상적 어린아이와 결별했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하기도 했다 – 108


섹스 파트너와 뭔가를 교환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지. 나는 그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 교환하다니? 뭘? 전쟁 당사국들이 전쟁을 교환하지 않듯이, 바둑 친구들이 바둑을 교환하지 않듯이, 섹스 파트너들끼리도 섹스를 교환하지 않아. 나와 그녀는 뭔가를 교환하기 위해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낭비하기 위해 만나는 거야. 우리는 시간과 에너지를 함께 소비하지. 그러나 궁극적으로 낭비하는 것은 바로 섹스라는 관념이야. ‘나는 섹스를 한다’는 무거운 관념을, 덤프트럭이 모래를 쏟아놓듯 훌훌 던져버리고 홀가분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비트겐슈타인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섹스 파트너라는 이름의 상자를 공유하고 있는 거야.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열지 않아. 우리가 뚜껑을 열지 않는 한, 우리는 안전해 – 123


사장은 원고를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출판사 사장에게 원고를 넘기고 이렇게 긴장해본 적이 있었던가? 한 손에 총을 든 편집자라니, 어쩌면 저것이야말로 모든 편집자가 꿈꾸는 모습이 아닐까? 뺀질거리며 마감을 안 지키는 작가의 집에 들이닥쳐 초고를 탈취한 후 즉결심판 하는 것이다. 수작이면 살려주고 태작이면 사살한다. 초고조차 안 써놓은 뻔뻔한 작가는? 그 자리에서 바로 총살. 탕, 탕, 탕, 마피아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지. ‘친절한 말 한마디에 총을 곁들이면 좀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다.’ – 156


범죄자와 작가는 비슷한 구석이 있다. 은밀히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계획이 뻔하면 덜미를 잡힌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때로는 자기 꾀에 자기가 속는다는 점도 그렇지. 이 아파트에서 내가 쓰고 있던 소설은 정해진 플롯이라고는 없는 중구난방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었다. 반면 사장의 음모는 아주 짜임새 있는,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저급한 추리소설의 냄새를 풍긴다. 그런데도 승자는 사장이라니, 이것은 혹시 잘 짜인 플롯이 결국에는 중구난방 요령부득의 서사를 이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너무 비약인가? 나는 내 곁에서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영선을 바라보았다. 이 범죄 치정극의 마지막 퍼즐, 그런 소설에는 꼭 등장하는 절대 미모의 팜므파탈, 그런데 이 여자, 너무 얌전하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치고는 – 166


출판사의 구석진 책상에 앉아 하루종일 범죄소설을 편집하는 이 시인이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던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좀 섬뜩한 생각이 들어 나도 입을 다물었다. 그가 짐을 챙겨 JFK 공항으로 떠난 후, 아내는 전에 없던 규모의 대청소를 했다. 마치 그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버리겠다는 듯이 – 190


당시에, 내가 그 여자한테 결별을 통보하고 피해다녔을 때 말야. 그 여자가 미친듯이 나한테 매달렸었거든. 전화하고 집으로 찾아오고, 스토커가 따로 없었어. 그런데 내가 정말 매몰차게 대했어. 심한 말도 퍼붓고 받은 선물도 다 다시 소포로 보내버렸어. 정나미 떨어지게 한 거지. 그러니까 결국은 포기하고 마음을 정리하더라. 그런데 하루는 샤워를 하다가 문득 내 거시기를 보게 됐어. 균, 그 여자한테 옮은 성병 균이 아직도 거기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항생제 먹어서 다 죽었겠지만 일부는 남아 있지 않을까.뭐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남아 있었으면 좋겠더라고. 어쨌든 그 여자한테 받은 거잖아. 말을 안 했으니 그때도 그 여자 몸속에는 당연히 그 균들이 남아 있었을 거고. 우리가 마지막으로 공유한 유일한 존재가 바로 그 균이였던 거야 – 228


아, 수진은 속죄를 믿고, 강재는 자기 덩치를 믿고, 태준은 인과관계를 믿는데, 나만 아무것도 믿지 않기 때문에 무임승차자가 된 것이로구나. 나도 믿는 것이 있어. 지리산 도령 강재씨, 나는 우울을 믿어. 인간은 천둥이 치고 비가 퍼붓는 궂은 날씨에는 울적하도록 진화했어. 가만히 동굴에 틀어박혀서 날씨가 좋아지길 기다리는 게 유리하거든. 에너지를 아끼면서 말이야. 인류가 이렇게 진보한 건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끝없이 자신의 과오에 집착해온, 사실 나 같은 우울증 환자들 덕분이야. 그들을 헛된 희망을 품지 않아. 스스로를 과신하지도 않고, 그래서 살아남은 거야 -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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