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 사마천과 사기의 세계 -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사마천의 생각 읽기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이경덕 옮김 / 다른세상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정사이자 가장 빼어난 사서인 『사기』를 쓴 역사가 사마천이 품은 생각 엿보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마천은 스스로 공자의 제자임을 밝혔다. 사마천이 무제武帝의 강권정치 아래에서 흉노족과 싸워 패하고 항복한 이릉李陵을 구하기 위해 무제에게 간언한 것은 자유인이라는 신념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무제에 대해 그 실정失政을 바로잡으려고 했다고 본다면 그것은 충의 행위이며, 만약 친구인 이릉을 불행에서 구하려고 했다고 본다면 그것은 신의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분석을 하면 사마천의 심정에 반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이때 보여준 사마천의 행동에 대해서는 무제나 이릉 등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는 사마천의 결단과 그 용기에 대해 칭찬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에게 그런 결단을 내리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움직일 수 없는 자유인으로서의 긍지였을 것이다.

열전 70권은 『사기』 속에서도 사마천이 특히 심혈을 기울여 쓴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사마천은 열전에서 오로지 도시국가를 기반으로 한 고대 시민사회 속에 교차하는 인간 군상을 묘사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공자의 제자였기 때문에 그가 서술하는 사람의 행위에는 늘 칭찬과 비판이 뒤따른다. 칭찬과 비판은 후세 유학자들이 가볍게 판단을 내리는 듯한 교과서적인 것이 아니다.

사마천이 모은 수많은 전대의 명사들 중에서 그가 어떤 인물을 가장 존경했는지를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자유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떤 권위에도 굴복하지 않고 어떤 유혹에도 지지 않고 자기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 사람, 그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공자가 말하는 인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기』는 중국인을 주체로 한 민족사이지 세계사가 아니다. 『사기』에는 당시 중국에 알려져 있던 넓은 지역, 그러니까 북쪽으로는 몽골, 서쪽으로는 지중해, 남쪽으로는 인도, 동쪽으로는 바다 속의 선산仙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역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 이질적인 민족이 중국과 평행해서 독자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공존한다는 종합적인 입장에서 붓을 놀린 것은 아니다. 그들이 어쩌다 중국과 관계를 맺었을 때 사마천은 그 관계에 대해서만 흥미를 나타냈을 뿐이다. 그 민족의 과거를 뒤지거나 그들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사마천에게는 오늘날 우리가 지니고 있는 철학이 없었다. 사마천은 그저 나름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기』를 저술했을 뿐이다. 그는 역사의 필연성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 필연성의 뒷면에 있는 이론과 같은 것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모든 사상 또는 철학 같은 것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를 종합적으로 기술하는 역사 속에 모두 포함시켜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마천이 지닌 사상이나 가치관이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의 역사학에는 나름대로 연원이 있고 배경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어느 정도 역사학적으로 궤적을 추적할 수 있는 것이다.

사마천의 역사학은 확실히 공자孔子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른바 유가儒家는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공자의 가르침인 유교에 몰입해서 공자의 교조를 천명하는 일에 주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공자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거기에 합류하지 않고 새로운 일파의 학문으로서 역사학을 수립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학술총서 5
한명기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조선과 명 제국, 청 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병자호란은 아예 무력을 이용하여 조선의 세계관과 인식을 강제로 바꾸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1637년 1월, 남한산성에서 농성하고 있던 조선 조정은 예의 ‘재조지은‘을 내세워 명과의 관계를 단절할 수 없다고 했다. 조선은 그러면서 ‘명의 신종황제가 임진왜란 당시 천하의 병력을 동원하여 조선을 구원했다‘며 ‘재조지은‘을 강조했다. 청은 답서를 보내 ‘명이 조선을 돕기 위해 천하의 병력을 동원했다‘는 조선 측 국서의 문구를 문제 삼았다. 청은 ‘명은 천하 국가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며 명을 천하로 지칭한 조선의 표현을 망령된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그것은 당시 청이 명을 ‘남조南朝‘, 혹은 ‘주조朱朝‘라고 부르고 있던 시각과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조선이 강조하는 ‘재조지은‘의 의미를 축소하여 명을 ‘상대적 존재‘로 격하시키려고 시도하는 한편, 청 태종은 항복을 받아주는 조건으로 인조의 출성을 강요하여 결국 그에게서-만·몽·한의 신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세 차례에 걸친 삼배구고두의 항례를 받아냈다. 정신적으로도 끝까지 저항했던 조선을 무력을 이용하여 억누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