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은 아예 무력을 이용하여 조선의 세계관과 인식을 강제로 바꾸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1637년 1월, 남한산성에서 농성하고 있던 조선 조정은 예의 ‘재조지은‘을 내세워 명과의 관계를 단절할 수 없다고 했다. 조선은 그러면서 ‘명의 신종황제가 임진왜란 당시 천하의 병력을 동원하여 조선을 구원했다‘며 ‘재조지은‘을 강조했다. 청은 답서를 보내 ‘명이 조선을 돕기 위해 천하의 병력을 동원했다‘는 조선 측 국서의 문구를 문제 삼았다. 청은 ‘명은 천하 국가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며 명을 천하로 지칭한 조선의 표현을 망령된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그것은 당시 청이 명을 ‘남조南朝‘, 혹은 ‘주조朱朝‘라고 부르고 있던 시각과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조선이 강조하는 ‘재조지은‘의 의미를 축소하여 명을 ‘상대적 존재‘로 격하시키려고 시도하는 한편, 청 태종은 항복을 받아주는 조건으로 인조의 출성을 강요하여 결국 그에게서-만·몽·한의 신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세 차례에 걸친 삼배구고두의 항례를 받아냈다. 정신적으로도 끝까지 저항했던 조선을 무력을 이용하여 억누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