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간의 연이은 발견으로 일본고대사의 연구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는 것처럼 보인다. 요즘은 모든 학문이 세분화되어 역사학 분야에서도 대략적인 역사 흐름의 파악이 오히려 소홀해지고, 또한 불가능해졌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일본고대사도 예외는 아닌데, 고대사의 경우 그 원인의 하나로 목간을 비롯한 새로운 사료의 증가를 예로 들어도 좋을 것이다. 사료의 증가는 역사 연구에서 환영할 일이지만, 고대사의 경우는 일반론으로 대입시킬 수 없다는 약점이 있다. 원래 고대사는 사료가 적은 것을 전제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새로운 설이나 이론이라 해도 지금 남아 있는 사료 사이에 정합성이 인정되면,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또한 검토한다는 마음을 먹어도 그 이상 새로운 사료가 발견될 가능성 따위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목간의 발견은 같은 조건을 바꾸었다. 더구나 땅 속에서 문헌사료가 계속 나오는 이상 안심은 할 수가 없다. 굵직한 가설이나 이론을 세울 수 없는 것도 당연한 현상이다. 이와는 달리 지금까지는 사료의 부족으로 확인할 수도 없었던 사항이 새로 나온 목간을 빌려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경우도 생긴다. 가설이 장래에 나올 목간에 따라 입증할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은 고대사 연구의 획기적인 일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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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왕권과 교역
이성시 / 청년사 / 1999년 4월
평점 :
절판


정창원에 갈무리된 신라 유물과 육국사 등에 기록된 발해 관련 기사를 두루 살펴보면서 근대인의 선입관과 달리 정치와 경제를 뚜렷이 가르기 어려운 고대 동아시아 교류사의 특성을 당대인의 시선에 가깝게 복원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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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요즘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역사 서술이 대체로 최근 100년 사이에 해석되고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일본 고대사의 내용도 고대부터 이어지는 전통적인 것과는 완전히 성격이 다르다. 그 대부분은 19세기 후반의 근대 국가 형성기에 국민의식을 형성하기 위해서 서양의 것과 유사하게 창안된 것으로, 이것이 지금까지 일본 고대사라고 일컬어져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고 중국, 한국, 북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본서기》를 필두로 하는 일본 6국사나 중국의 《사기》부터 《신당서》에 이르는 정사(正史), 혹은 한국의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고대사 사료는 이전부터 계속 읽혀 오지 않았는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역사상을 이들 사료에서 직접 끌어낼 수는 없다. 근대 국가가 고대의 역사상을 새롭게 구축했기 때문이다.

역사학은 해석학이다. 과거의 사료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떠한 시대에 살고 어떤 가치관의 구속을 받고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과거의 사료를 해석한다면, 현재 우리 시대의 가장 통속적인 가치관과 해석 도식에 질질 끌려다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험 삼아 2차세계대전 이전에 나온 일본사 책과 전후 1960년대 무렵까지의 연구서를 펼쳐보라. 거기서 일정한 사고의 패턴 아래 이뤄진 해석 유형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역사 연구는 어쩔 수 없이 그 시대 분위기와 시대상황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면 그러한 구속에서 그나마 자유롭게 역사를 탐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하나의 방법은, 우리가 어떤 시대의 구속을 받으면서 역사를 연구해 왔는가, 그리고 현재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를 깨닫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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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된 임진왜란 - 근세 일본 고문헌의 삽화로 보는 7년 전쟁
김시덕 지음 / 학고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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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 일본의 임진왜란 문헌에 실린 324점의 삽화를 통하여 일본인들이 임진왜란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되짚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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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1593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벽제관 전투, 1597~98년 가토 기요마사의 울산성 전투, 1598년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사천 전투를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3대첩이라고 칭한다. 조선·한국 측이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을 1592년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 전투, 이순신의 한산도 전투, 1593년 권율의 행주산성(幸州山城) 전투로 꼽는 것과 마찬가지로 각국은 자국군이 승리한 전투를 기억하고 패한 전투는 기억에서 지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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