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는 중국인을 주체로 한 민족사이지 세계사가 아니다. 『사기』에는 당시 중국에 알려져 있던 넓은 지역, 그러니까 북쪽으로는 몽골, 서쪽으로는 지중해, 남쪽으로는 인도, 동쪽으로는 바다 속의 선산仙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역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 이질적인 민족이 중국과 평행해서 독자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공존한다는 종합적인 입장에서 붓을 놀린 것은 아니다. 그들이 어쩌다 중국과 관계를 맺었을 때 사마천은 그 관계에 대해서만 흥미를 나타냈을 뿐이다. 그 민족의 과거를 뒤지거나 그들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사마천에게는 오늘날 우리가 지니고 있는 철학이 없었다. 사마천은 그저 나름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기』를 저술했을 뿐이다. 그는 역사의 필연성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 필연성의 뒷면에 있는 이론과 같은 것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모든 사상 또는 철학 같은 것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를 종합적으로 기술하는 역사 속에 모두 포함시켜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마천이 지닌 사상이나 가치관이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의 역사학에는 나름대로 연원이 있고 배경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어느 정도 역사학적으로 궤적을 추적할 수 있는 것이다.

사마천의 역사학은 확실히 공자孔子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른바 유가儒家는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공자의 가르침인 유교에 몰입해서 공자의 교조를 천명하는 일에 주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공자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거기에 합류하지 않고 새로운 일파의 학문으로서 역사학을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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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학술총서 5
한명기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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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조선과 명 제국, 청 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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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은 아예 무력을 이용하여 조선의 세계관과 인식을 강제로 바꾸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1637년 1월, 남한산성에서 농성하고 있던 조선 조정은 예의 ‘재조지은‘을 내세워 명과의 관계를 단절할 수 없다고 했다. 조선은 그러면서 ‘명의 신종황제가 임진왜란 당시 천하의 병력을 동원하여 조선을 구원했다‘며 ‘재조지은‘을 강조했다. 청은 답서를 보내 ‘명이 조선을 돕기 위해 천하의 병력을 동원했다‘는 조선 측 국서의 문구를 문제 삼았다. 청은 ‘명은 천하 국가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며 명을 천하로 지칭한 조선의 표현을 망령된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그것은 당시 청이 명을 ‘남조南朝‘, 혹은 ‘주조朱朝‘라고 부르고 있던 시각과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조선이 강조하는 ‘재조지은‘의 의미를 축소하여 명을 ‘상대적 존재‘로 격하시키려고 시도하는 한편, 청 태종은 항복을 받아주는 조건으로 인조의 출성을 강요하여 결국 그에게서-만·몽·한의 신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세 차례에 걸친 삼배구고두의 항례를 받아냈다. 정신적으로도 끝까지 저항했던 조선을 무력을 이용하여 억누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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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년의 정묘호란은 후금의 입장에서 모문룡을 제거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당시 조선의 인조 정권은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등으로 비롯된 내정의 동요를 추스르는 데도 겨를이 없었다. 따라서 인조 정권이 집권 이후 비록 ‘친명배금‘을 표방했지만 현실에서는 ‘배금‘을 실천할 능력이나 여유가 없었다. 인조 정권은 ‘친명‘을 강조하면서도 후금과의 관계에서는 최소한 현상을 유지하려는 신중한 행보를 보였다. 따라서 조선은 후금에게 이렇다 할 전쟁 도발의 명분을 제공하지 않았거니와 그 같은 상태에서 후금이 호란을 일으킨 것은 조선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즉 후금은 내부의 모순을 밖으로 배출하여 홍타이지의 권력을 강화하는 한편, 조선을 움직여 교역선을 확보하고, 자신들의 턱밑에서 서진西進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모문룡을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기병했던 것이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강홍립과 한윤 등이 홍타이지를 부추겨 광해군을 위해 복수하기 위해 쳐들어온 전쟁‘이라고 정묘호란을 정의하는 일각의 설명은 조선 후기 특정 당파를 중심으로 형성된 편향된 시각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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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왕국의 풍경, 그리고 새로운 시선
이근우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현대인인 우리는 오늘날의 잣대로 고대인과 그들이 살던 옛날을 바라보기 쉽다. 그러나 선입관과 편견을 버리고서 고대인의 시선에 가깝게 고대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고대사 속에 숨은 풍부한 이야기를 캐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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