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는 중국인을 주체로 한 민족사이지 세계사가 아니다. 『사기』에는 당시 중국에 알려져 있던 넓은 지역, 그러니까 북쪽으로는 몽골, 서쪽으로는 지중해, 남쪽으로는 인도, 동쪽으로는 바다 속의 선산仙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역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 이질적인 민족이 중국과 평행해서 독자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공존한다는 종합적인 입장에서 붓을 놀린 것은 아니다. 그들이 어쩌다 중국과 관계를 맺었을 때 사마천은 그 관계에 대해서만 흥미를 나타냈을 뿐이다. 그 민족의 과거를 뒤지거나 그들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사마천에게는 오늘날 우리가 지니고 있는 철학이 없었다. 사마천은 그저 나름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기』를 저술했을 뿐이다. 그는 역사의 필연성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 필연성의 뒷면에 있는 이론과 같은 것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모든 사상 또는 철학 같은 것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를 종합적으로 기술하는 역사 속에 모두 포함시켜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마천이 지닌 사상이나 가치관이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의 역사학에는 나름대로 연원이 있고 배경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어느 정도 역사학적으로 궤적을 추적할 수 있는 것이다.
사마천의 역사학은 확실히 공자孔子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른바 유가儒家는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공자의 가르침인 유교에 몰입해서 공자의 교조를 천명하는 일에 주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공자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거기에 합류하지 않고 새로운 일파의 학문으로서 역사학을 수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