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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 계엄군
김양우 / 종로서적 / 1996년 12월
평점 :
절판
지난 2017년에 전두환의 회고록이 논란 속에 발간되고, 영화 <택시운전사>가 천만 관객을 모아 흥행하면서 여느 때보다 5·18 민주화 운동에 주목하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거기에 맞물려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 무렵 광주를 둘러싼 상황을 엿볼 만한 자료도 여럿 드러났는데, 그 가운데 "한국군이 점령군의 태도를 견지하면서 광주 시민을 외국인처럼 다뤘다"는 증언이 들어간 미국 국방정보부의 비밀문서(관련 기사)와 광주 시민들을 '적'으로 규정한 육군 본부의 비밀문서(관련 기사)가 눈길을 끕니다.
당시 새로 공개된 비밀문서들은 계엄군이 광주에서 학살을 저지른 까닭을 우리에게 넌지시 말하는 듯합니다.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군이 시민들을 '외국인'이나 '적'으로 바라봤다는 건 경악스럽습니다. 동족마저 '비국민'으로 취급하는 짓을 서슴지 않을 만큼 권력욕이 무서움을 새삼 느낍니다. 그런데 현실은 문서에 담긴 내용보다 더 끔찍했습니다. 부산에 기반을 둔 『국제신문』의 기자로 취재팀을 이끌고 광주에 들어간 김양우 씨의 책 『시민군 계엄군』에는 계엄군이 시민군을 '진압'한 직후인 1980년 5월 27일 오전 전남도청 앞에서 어떤 광경이 펼쳐졌는지 나옵니다.
"갑자기 단말마같은 고함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야! 이놈들아, 우릴 빨리 죽여라! 이 비겁한 군인놈들아! 포로를 묶어놓고 때려 죽이는 더러운 놈들아! 전쟁터에서도 포로는 못 죽이는 것 아니냐! 이놈들아!" 포승에 묶인 젊은이들 중 한 명이었다.
도청 정문 안 시멘트 바닥에 방치돼 있어 시체거니 하고 눈여겨 보지도 않았던 사람 6명이었다. 사람을 엎어 전깃줄로 두 팔을 뒤로 돌려 묶고 발못을 이 줄로 함께 묶은 뒤 다시 목까지 칭칭 동여매 두었다. 얼마나 세게 잡아당겨 조였던지 얼굴과 두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몸이 마치 활처럼 뒤쪽으로 둥글게 휘어져 있었다. 네 사람을 전깃줄 하나로 동여매었다. 흡사 굴비를 엮어 놓은 형상이었다. 한 줄에 묶인 넷 중 양쪽 끝 둘은 이미 숨이 끊어져 머리가 푹 꺾여져 시멘트 바닥으로 처박혀 있었다. 바로 그 옆에는 따로 두 사람이 묶인 채 이미 시체가 되어 있었다.
(중략) 지금도 어쩌다 꿈속에서 나타나곤 하는 그 젊은이의 눈빛이 눈에 선하다. 그의 말대로라면 포로로 잡은 시민군을 계엄군들이 묶은 채로 죽였다는 얘기가 된다. 하사관 한 명과 병사 두 명이 어디선가 나타나더니 버럭 고함을 쳤다. "야! 이새끼, 아직 숨이 붙어 있었구나. 까불지말고 가만있어. 죽여줄테니까." 구둣발로 짓이기고 개머리판으로 얼굴을 두들기는데, 금방 피투성이가 돼 얼굴이 푹 고꾸라졌다."
김양우 전 기자의 기록대로라면, 당시 계엄군에 사로잡힌 시민군은 포로만도 못한 처지에 놓인 셈입니다. 더욱이 시민군의 주검을 병사들이 함부로 다뤄 훼손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 시기 대한민국을 과연 민주 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이 나라는 헌법에서 규정한 것과 달리 제대로 된 민주정 국가가 아니었음을 광주 학살은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계엄군에게 강제 연행되는 광주 시민들을 찍는 기자의 모습(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렇게 시민군의 항쟁이 비극으로 끝맺은 날에서 이야기를 시작한 『시민군 계엄군』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국제신문』 취재팀이 꾸려지고 광주에서 취재한 과정을 그렸습니다. 199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문민정부가 일으킨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의 영향으로 전두환과 노태우가 법의 심판을 받고, 5·18 민주화 운동을 재조명하던 분위기에 힘입어 나온 이 책은 요즈음 봐도 놀라운 일화를 적잖이 실었습니다. 몇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택시운전사>에서도 묘사했듯이 그때 광주는 계엄군의 통제로 외부와 단절된 상태라서 취재팀이 시내로 들어가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31사단에 속한 김 대위와 정 소령의 도움으로 군 작전 도로를 이용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광주 시내와 시외를 드나들면서 취재하는 행운을 누립니다. 김 대위와 정 소령은 광주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정확히 파악하지도 신군부의 만행을 막지도 못했지만, 『국제신문』 취재팀에 이런저런 편의를 제공해 주면서 광주의 비극이 세상에 알려지는 데 조금이나마 이바지했습니다. 특히 정 소령은 취재팀의 중재로 시민군에서 활동한 몇몇 젊은이와 지역 신문사 기자가 계엄군이 시내에 진입하기 직전에 광주 바깥으로 탈출할 수 있게끔 도와줬다는 점에서 양심적인 군인이라고 할 만합니다.
"정소령은 일부 군인들, 예컨대 첫날 광주 시위대를 사살했던 공수부대원들을 빼고는 군인들이라고 해서 모두 광주시민들, 특히 시민군들을 미워하거나 적대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일부 병사들은 "우리가 왜 광주시민들을 학살하는 데 동원되어야 하느냐."면서 노골적으로 반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교들 가운데도 상당수는 광주사태를 다루는 군수뇌부나 정부방침에 겉으로 드러내놓고 반발을 못한 것이지, 내심으로 불만이 많다고 했다. 비단 31사단쪽이 아니라도 다른 지역을 지키는 군인들의 도움을 받아 광주 밖으로 빠져나간 대학생들이 제법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오히려 31사단 쪽은 전남대와 인접해 있어 경비가 엄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는 피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또 글쓴이는 중앙정보부와 보안 사령부 소속 요원뿐만 아니라 일반 공무원까지 광주에서 정보원으로 활동한 이가 줄잡아 수천 명이었으며, 5월 26일에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인 약 3천 명의 시민 중 2천 명가량은 기관원이었다고 주장합니다. 황당한 숫자처럼 보입니다만, 정 소령도 상부의 지시로 자기 부대 소속 병사들을 민간인으로 꾸며 시내에 숨어들게 했다고 기자들에게 털어놓았으니 수천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거기에 버금가는 수의 정보원이 광주를 돌아다닌 건 사실인 듯합니다. 물론 제대로 훈련받은 정보원은 그보다 더 적었겠지만 말이지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글쓴이는 지역감정을 자극하며 광주 안팎에서 돌아다닌 흉흉한 소문들이 신군부 측에서 정보원들을 통해 슬그머니 흘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의심합니다. 광주 학살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뒤집어씌우려고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을 조작했듯이 유언비어로 살벌한 분위기를 조장하여 광주 시민들에게 위압감, 절망감, 무력감을 심으려는 여론 조작 수법이 아니었겠느냐는 것이지요.
이제 와서 소문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캐내기란 어렵겠지만, 신군부가 광주 시민들의 항쟁을 '폭동'으로 날조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은 것을 보면, 터무니없는 가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신군부가 광주 안 사정을 훤히 꿰뚫어 봤음에도 무력 진압을 선택했다는 것과 5·18 민주화 운동을 왜곡하려는 무리가 여전히 기승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몇몇 국회의원까지 역사 왜곡에 앞장선 일은 개탄스러울 따름입니다. 광주 학살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 2017년 9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