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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 ㅣ 금요일엔 역사책 1
장지연 지음, 한국역사연구회 기획 / 푸른역사 / 2023년 6월
평점 :
『고려사(高麗史)』에는 왕건(王建, 877~943)이 태어나기 전에 그와 얽힌 신비로운 이야기 하나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왕건의 아버지 왕륭(王隆, ?~897)은 송악(松嶽, 개성의 옛 이름)에 새집을 지었는데, 마침 도선(道詵, 827~898) 스님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기장[穄]을 심어야 할 땅에다 어찌하여 삼[麻]을 심었는가?"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부인에게서 그 말을 전해 들은 왕륭은 스님을 뒤쫓아가서 그를 붙잡고 대화를 나눕니다. 스님은 왕륭에게 풍수지리에 맞춰 집을 지으라고 일러 주고서 뒷날 삼한을 통일할 인물을 아들로 얻을 테니 그 이름을 왕건으로 지으라고 예언합니다. 왕륭이 새집을 지은 이듬해 스님이 예언한 대로 왕건이 태어나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왕건은 고려 왕조를 세운 태조(太祖)로서 후삼국을 통일하는 업적을 이룹니다.
고려 후기에 활동한 문인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왕건의 탄생담이 사실이 아니며, 누군가 나중에 지어냈으리라고 의심하면서도 우리말에서 기장은 왕(王)과 서로 비슷하다는 김관의(金寬毅)의 해설을 인용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도대체 어디를 봐서 기장과 왕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인지 현재 우리의 언어 감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기장과 왕, 전혀 닮아 보이지 않는 두 단어를 이을 실머리는 뜻밖에도 『천자문(千字文)』에서 나타납니다. 『천자문』은 옛날부터 한문 학습 입문서로 널리 쓰인 만큼 여러 가지 판본이 있는데, 그 가운데 1575년(선조 8)에 간행한 판본은 전라도 광주에서 간행했다고 해서 『광주천자문(光州千字文)』이라고 부릅니다. 『광주천자문』은 그보다 조금 뒤에 간행한 『석봉천자문(石峯千字文)』과 계통이 달리합니다. 같은 한자라고 하더라도 독음과 새김이 『석봉천자문』의 그것과 사뭇 다른 까닭입니다. 이를테면 '왕(王)' 자의 새김이 『석봉천자문』에서는 '님금'이지만, 『광주천자문』에서는 '긔ᄌᆞ'입니다. '님금'은 '임금'으로 형태가 바뀌어서 오늘날까지 이어졌기에 우리에게 낯익으나, '긔ᄌᆞ'는 현대 국어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형태이기에 낯섭니다.
『광주천자문』에 나온 '王' 자의 새김(디지털한글박물관)
비록 현대 국어로 이어지지 못하고 사라졌으되 '긔ᄌᆞ'는 '임금'처럼 왕을 뜻하는 고유어 단어였습니다. '긔ᄌᆞ'는 광주 지역에서 오랫동안 내려오던 백제어 단어일 가능성이 큰데, 다행히 그러한 추측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외국에 남았습니다. 중국의 역사서인 『주서(周書)』에는 백제 백성들이 왕을 '건길지(鞬吉支)'라고 부르고,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백제왕을 '코니키시(コニキシ)'라고 일컫는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건길지'와 '코니키시'는 다른 자료까지 참고해 보면, '건+길지'와 '코니+키시'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백제어에는 왕을 뜻하는 단어 '긔ᄌᆞ'가 있었고, 이것을 중국에서는 '길지'로, 일본에서는 '키시'로 표기한 셈입니다.
또한, 이 말은 고구려에서도 쓰인 듯합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왕봉현(王逢縣)'과 '왕기현(王岐縣)'이라는 지명이 각각 고구려의 '개백현(皆伯縣)'과 '개차정현(皆次丁縣)'을 바꾼 것이라고 나와서 고구려어에서 왕이라는 말이 '개(皆)' 또는 '개차(皆次)'와 비슷했음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개차'가 '길지'와 '키시'처럼 '긔ᄌᆞ'를 달리 표기한 형태였다고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왕륭과 왕건 부자의 근거지인 송악은 옛 고구려 땅이었습니다. 왕건이 태어났을 무렵까지 송악에 고구려어의 영향력이 미쳤다고 헤아려 볼 만합니다. 그렇기에 도선 스님이 고구려어에서 왕을 뜻하는 단어인 '개차'와 발음이 유사한 단어인 '기장'을 비유법으로 활용했겠지요. 왕건의 탄생담에서 언급된 땅에 기장을 심으라는 말은 왕의 씨를 낳으라는 소리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처럼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에서 우리는 지금은 사라진 옛말 하나가 역사에 남긴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문으로 적힌 『고려사』만 읽었다면, 거의 눈에 띄지 않았을 희미한 흔적입니다.
"이렇듯 토착 언어와 문자에는 토착 지식이 담겨 있다. 토착 언어나 이를 표기하는 수단이 끊기면 그 지식 역시 단절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문을 통해 그런 지식이 전해질 수 있긴 했겠지만, 문자의 장벽, 언어 및 지식의 위계 등을 비롯한 여러 이유로 쉽지 않았다. 이렇게 수많은 과거의 지식이 이제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 수도 없는 채 사라졌을 것이다." - 25쪽
장지연 교수의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는 한자가 주류 문자이고, 한문이 보편 문어로 기능하던 시대에 한자가 아닌 구결, 이두, 향찰, 훈민정음 등으로 기록한 역사에 주목합니다. 우리말로 기록한 역사는 한문으로 기록한 역사와 다른 풍경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토착 언어와 문자에는 토착 지식이 담겼기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한자로 쓴 『한경지략(漢京識略)』과 한글로 쓴 <한양가(漢陽歌)>는 조선의 수도 한양의 19세기 모습을 동시대에 다뤘음에도 글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아주 다릅니다. 또 똑같은 대상을 가리키지만, 한자어인 '경사(京師), 경성(京城), 도성(都城), 왕경(王京)' 등과 고유어인 '서울'은 그 속뜻이 같지 않습니다. 장지연 교수가 지적한 대로 한문 자료에서 과도하게 당대의 상을 뽑아내는 것은 위험한 일임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푸른역사의 '금요일엔 역사책' 시리즈로 나온 첫 번째 책인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은 그 밖에도 흥미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특히 조선 시대에 남성은 한문으로, 여성은 언문으로 문자 생활을 했다는 통념을 깨는 분석이 눈길을 끕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선 시대 남성들은 한글을 제법 잘 썼고, 한문으로 글을 쓰다가도 자기감정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면, 그 속에 '뒤쥭박쥭('뒤죽박죽'의 옛말)' 같은 고유어를 한글로 섞어 쓰기도 했습니다. 임금이 모후나 옹주에게 정성껏 쓴 한글 편지를 부치기도 했으니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나 정약용(丁若鏞, 1762~1836)처럼 언문을 익히지 않은 것이 드문 경우였습니다.
이렇게 한문으로 기록한 역사 너머의 또 다른 역사를 살펴보고 싶다면,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를 읽으면서 주말을 보내면 어떨까요?
※ 이 서평은 푸른역사에서 제공한 책을 토대로 작성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