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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의 다른 장르에 비해 소설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저마다의 인간이 가진 문학적 감수성을 10점 만점으로 해서 점수를 매겨 본다면, 나는 3점도 겨우 받을 터이다. 비단 문학적 감수성만의 결락이 아니라, 나는 원래 감수성과는 거리가 먼 메마른 종족이다. 아마 25년 인생에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린 순간은 다섯 손가락 안으로 꼽을 수 있지 않을까. 나도 소설을 읽으며 눈물을 또르르 흘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세상에는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 있고 가능하지 않은 것이 있는 법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체념한 건 아니고, 앞으로의 경험이 낳을 감수성의 발달에 희망을 살짝 걸어 두고는 있다.
그래도 인생에 취미라고 할 만한 것이 독서뿐이거니와, 영상보다는 활자를 선호하기에 활자로 이루어진 소설 또한 재미가 아예 없지는 않을 뿐더러, 남들이 읽고 너무 좋다고 감탄하는 소설은 왠지 안 읽으면 손해인 양 드는 기분 탓에, 책을 구입할 때마다 소설도 꼭 몇 권씩은 넣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간혹 큰 울림을 주는 소설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보니 보물찾기하는 심정으로 꾸준히 읽었다. 이번에는 텀이 꽤 길었지만 말이다. 이 텀은 이번에 <가벼운 마음>을 만나기 전, 대략 3개월 전쯤 읽은 마지막 소설 <위대한 개츠비>가 너무 노잼이었던 것에 기인한다. <위대한 개츠비>를 꾸역꾸역 읽어내고 소설에게 잠시 작별을 고한 것이다.
<가벼운 마음>은 내가 봤을 때 가히 북플의 영업왕이라고 해도 될만한 잠 모 님에게 영업당해서 샀다. 그 분 정말 영업에 재능 있는 사람이다. 월급만 루팡하는 게 아니라 남의 주머니까지 루팡하는 사람이다. 같은 책을 홍보해도 더 사고 싶게 만드는 필력으로. 내가 그 영업에 홀려서 구입했음에도 땡투를 안 했던데, 어차피 그 영업왕은 금주의 영업의 달인 2위에 오른 사람이니 괜찮을 거다. 영업 당해 구입한 이 책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저자의 에세이도 살 예정이니 그때 제대로 하면 된다.
이렇게 구입하게 된 <가벼운 마음>도 장르의 특성상 내가 덮어놓고 쟁인 다른 소설들과 함께 언제 읽힐지 가늠되지 않는 세계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 모 님의 <가벼운 마음>의 100자평 댓글에서 "난 주인공 같은 사람은 못 사귄다" "내 친구의 친구 중에도 주인공 같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나타난 은오 님 약간" "나 같은 사람은 아니다 은오 님은" 하는 대화를 발견했다. 주인공이 자신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그 책이 궁금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이러한 동기로 책을 집어 들었으니 자연히 주인공과 나를 비교하면서 읽게 되었고, 일단 내 주변에는 주인공 같은 사람들이 꽤나 존재하며 나는 그들과의 만남을 즐긴다는 것이 위 대화의 참여자들과 나의 다름을 방증한다. 그리고 실제로 주인공과 나 사이에 공유되는 요소가 제법 있다. 감상평을 요약하자면, '타고난 게으름과 충동성과 개인주의 정신을 받들어 주인공의 삶과 흡사한 삶을 살았으나, 현실과 불안의 벽에 부딪혀 더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결심한 와중에 이 책을 읽고 나니까 그냥 이렇게 살아도 될 것만 같아서 좆됨'이라 할 수 있겠다.
주인공의 태도와 삶의 궤적은 책의 제목인 '가벼운 마음'을 완연하고 아름답게 구현한다. 정말 완벽한 제목이 아닐 리 없다. 주인공은 이른바 '자유로운 영혼'이며, 진정 가벼운 마음으로 삶을 대한다. 이 지점에서 나와는 다르다. 나는 가벼운 행동을 반복하면서도 무거운 마음을 짊어지고 산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고, 현실을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더욱이 주인공은 삶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믿음에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거니와, 삶에서 마주하는 사소한 눈부심을 발견하며 즐길 줄 아는 능력의 보유자다. 나는 나의 무병단수를 기원할 따름이다.
주인공이 삶을 대하는 태도보다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유사한 점을 엿볼 수 있었다. 누구에게든 다가가면 내게 호의를 줄 것이라 믿고 접근하되, 의존과 애집은 주지도 받지도 않는다. 나는 그렇게 살았고, 그 덕에 사람으로 인한 상처도 전무하다시피 하니 그리 나쁘지 않게 된 셈이다. 간혹 호의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 주인공 엄마의 무기가 나에게도 있었으므로. 그 무기를 사용하면 마음이 한 번을 돌아서 결국에는 온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럴 수 있을지, 그리고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는 모르겠다. 물음표다.
위에서 아무래도 좆된 것 같다고 하기는 했지만, 어느 때에 가서는 다시 읽고 싶은 소설이다. 소설에는 북다트가 거의 안 꽂히는데 이 책은 북다트로 도배를 해 놓은 수준이었으니. 그만큼 허를 찌르는 찬란한 문장들이 넘쳐난다. 작가가 시인이라던가. 진정 '가벼운 마음'이 뭔지 궁금하다면 읽어보시라. 크리스티앙 보뱅이 간만에 소설을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 덕에 나는 소설과 재회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