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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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에 대한 얘기를 접했을 때 나 역시 현지에서 생중계로 뉴스를 보며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라 리뷰 등을 자세히 살펴봤다. 17살 아이가 살인자로 오명을 남긴 채 자살로 그 짧은 인생을 마감한지 17년 만에 그 엄마가 쓴 담담한 수기적 내용. 그 때 사건 직후 헬기 등에서 촬영한 살인자들의 집들(참 크고 좋아보였던 걸로 기억한다), 전반적으로 경제수준 높고 살기 좋은 곳이라 알려져있는 곳에서 역시 중산층 백인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학교에서 벌어진 대학살극이었기에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고 그 때문에 온갖 추측과 가쉽이 난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 나름 아이러니 하다고 느꼈던 것은, 피살당한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가해자 측도 평범한 중산층 집안의 부모가 온전히 존재하는 보통 사람들의 아들들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그로부터 17년이란 자기복기 시간이 지나서 그 "가해자" 중 한 명의 엄마가 쓴 수기가 자기변명이 아닌 고통에 대한 그리고 혹시 무엇인가 놓친 것이 있었나 하는 자기반성의 글이란 내용의 리뷰를 읽고 이 책을 주문한 뒤 나름 그 내용에 기대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책을 읽으며 뒤로 갈수록 불편함을 느꼈던 것은..  저자가 "이렇게 아이를 사랑했고 저렇게 최선을 다 했으며 항상 그런 순간에는 바로 이렇게 대응을 했었다"고 한 부분들 때문이었다.  몇십 페이지에 걸쳐서 계속 나오는 그 내용들을 접하며 느낀 점은, 사실 이들에게서 굉장히 자녀에게 집착하고 아이의 행동을 하나하나 다 참견하며 간섭하는 부모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과도한 간섭과 집착을 애정이란 이름으로 잘 포장하고 들이밀었기 때문에, 아직 어린 아이들 입장에서는 그러한 "관심"을 거부하거나 부정하는데 큰 두려움과 자기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을 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큰 아들도 있는데 그 아이는 성격이 외향적이라 그럴수록 오히려 겉으로 반항하며 은연 중에 부모에게 경고함으로써 잘 비켜갔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사건의 당사자가 된 둘째의 경우 매우 내향적이고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는 성향의 아이였기에 그런 과도한 관심과 간섭, 집착이 오히려 아이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으리라 짐작이 되었다.  각 아이의 타고난 기질과 서로 "다름"에 대한 관찰과 배려가 전무한 상태에서, 스스로 생각하기에 "옳다고 생각"하는 잣대를 들이대며 그 잣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날 경우에는 집요하리 만큼 쫓아다니며 숨 쉴 공간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본인들은 좋은 부모 노릇을 완벽하게 했다고 생각하는 모습에서 그 내용을 글로 읽고 있는 "성인"인 나조차도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작 "가해자의 엄마"가 되어버린 당사자는 자신의 그 모든 "사랑"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어긋났다, 결국 자신은 잘못 키운 것이 없는데 그 아들의 뇌에 우울증을 극대화하는 특수한 호르몬이 작용 중이었던 것을 몰랐던 것이 원인이었단 내용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은 본인들의 철저하고 꼼꼼한 모니터링에도 불구하고 걸러내지 못 한 또 다른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친구 때문이었다는 식의 변명 아닌 변명으로 점철한 내용이라니..

 

이 글을 읽으며 내가 정말 안타까왔던 점은 사실 그 점이었다, 결국 이 사람은 끝까지 (본인의 의지로) 진실을 외면하거나 아니면 아예 (무지함으로) 정말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진실을 모르고 살아갈 것이란 사실 때문이었다.


아이가 잔혹한 방법으로 다른 많은 아이들의 목숨을 빼앗고 스스로 죽음을 결심한 괴물이 되기까지 그 모든 시간들을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살아온 부모로서, 많은 사람들이 사건 후 이 엄마에게 물었다고 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저자도 스스로에게 숱하게 되뇌이고 되물으며 괴로움과 고통 속에 몸부림을 쳐왔고 앞으로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찾지 못 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은 아이를 굉장히 사랑했고 부모로서 옳다고 생각한 방식으로 양육했으며 지금 생각해도 그 방법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자신이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 나누던 대화방식, 아이가 어떤 문제를 일으켰을 때 취했던 대응방식, 또 아이의 친구들에 대한 꼼꼼한 모니터링과 선정에 대한 애정(이라 씌여있었지만 내게는 "지독한" 간섭/폭력이라 읽혔다) 등등을 자세하게 기술해놨다.  물론 그러한 태도가 모든 아이들에게 다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양육방식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아이처럼 자기중심적 성향과 그에 따른 자존심이 엄청 강한 기질의 아이에게는 상당히 견디기 힘든 부모가 아니었을까 싶다.  결국 양육의 의 시작을 "내 자식은 내가 제일 잘 안다"는, 대부분의 부모가 저지르는 큰 오류로부터 첫 발자국을 뗀 것이 이 모든 불행의 시발점은 아니었을까.  읽는 내내 내가 받은 인상은 이 아이의 기질을 고려할 때, 애정을 빙자한 정서적 폭력이라고까지 읽혔으니까..

우리는 데이트폭력을 보며 더 이상 애정을 가진 두 남녀가 사랑싸움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애정을 품고 있다고 해도 폭력은 말 그대로 폭력일 뿐이고, 여기에는 물리적 폭력 뿐 아니라 언어적/정서적 폭력도 포함된다.  차이가 있다면 물리적 폭력은 그 피해의 정도가 측정하기 쉬운 반면 후자의 경우는 가늠하기 어렵다는 것 뿐.  하지만 그 후유증으로 따지자면 언어적 또는 잘못된 생각으로 인한 정서적 폭력은 그 여파와 지속성을 고려할 때 그러한 폭력의 피해자에게 장기적으로 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은 여러 관련 사건들과 연구들을 통해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놀라고 그래서 불쾌하게 느꼈던 점은, 그런 사실을 재확인했단 부분이 아니다.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러한 폭력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에게 가한 가해자는, 그로 인한 결과로 그 피해자가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극단적인 결말을 맞이한 뒤에까지조차도 자신이 사실 상 그 "괴물"이라 낙인찍힌 아들을 그런 존재로 만든 진짜 "가해자"란 사실을 결코 모르고(또는 그냥 외면일까?)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 엄마가 역시 평범하고 애정이 풍부한 가정에서 자라난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래서 이런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일반인"이 이렇게 타인(여기서는 아들)에게 애정이란 이름으로 피할 길이 없는 폭력을 무자비하게 쏟아낼 수 있었다면, 그럼 나를 비롯한 그 외의 모든 "일반인"들도 자신들이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애정을 쏟는 상대방 그 누군가에게는 결국은 가면을 쓴 괴물들일 수도 있다는 사실, 바로 그 부분이 못내 놀랍고 내 자신의 불안감을 자극해서 불쾌감을 느끼게 한 원인이었다.  어떤 부분에서는 이 책은, 읽으면서 묘하게 나름 충격으로 다가왔던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 "봄에는 나는 없었다"를 연상시키는 수기였다. 


저자는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 책을 썼다지만..  불행히도 다 읽고난 뒤에는 오히려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질문이었다.   단지 질문의 방향이 틀려졌을 뿐.  저자가 그 사건 이후로 주변인들에게 숱하게 받았고 자신도 끊임없이 되돌아보며 답하고자 했던 질문은 이것이었다:

 

"(당신 아들이 그런 괴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하지만 내가 책을 읽은 도중에 품게되어 끝까지 의문을 갖게 된 질문은 이것이었다:

 

"(당신이 애정이란 이름으로 그 아들을 막바지까지 몰아넣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지금까지도) 모를 수가 있어요?"

결국 책을 덮으며 끝까지 남는 질문은 하나였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책을 덮고 하루가 지나도록 생각해봐도 이 책에서는 그 답을 찾을 수가 없었기에..  저자의 저술에 대한 선량한 의도나 역자의 정성어린 번역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별점을 2개보다는 결코 더 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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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20-03-10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만큼 아들에 대한 충격과 실망이 컷다는 반증....
 
디어 마이 프렌즈 1 - 노희경 대본집 ㅣ 노희경 드라마 대본집 7
노희경 지음 / 북로그컴퍼니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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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과 낡음은 분명 다른데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낡음이란 의미로 늙음을 혼동해서 쓰고 있다, 그 편견을 깨주고 싶었다˝고 한 노희경 작가의 탁월한 통찰력에 감탄을 금치 못 하고 봤습니다. 그런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슬픔과 내 인생 최고의 작품을 만났단 기쁨으로 공존하는.. 소장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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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레드 에디션, 양장) -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우리에게 ㅣ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백영옥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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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한 회가 끝날 때마다 기다려야하는 시간이 성미에 안 맞아서 옴니버스 형식이나 에피소드 위주로 구성된 드라마가 아니면 거의 안 본다.  그러다보니 21세기 들어서서 항간에 세기(?)의 히트작이라 일컬어진 드라마들 중 본 것이 거의 없게 되었다.(가령 '별에서 온 그대', '궁', '기황후', '나인' 등등 특히 대장금처럼 호흡이 긴 작품은 더더욱..)  그래서 이번에 시니어 어벤져스라며 대대적 선전을 했던 드라마도 주변 친구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방영 중에는 본 적이 없다.  그러다가 우연히 재방송하는 것을 한 편 보게 되고 그대로 꽂혀서 TV다시보기로 새벽을 하얗게 지새워가며 그냥 쭉 내달리게 되었다.

 

그 드라마를 보면서 함께 울고 웃고..  연기를 잘한다는 것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고 어떤 것인지를 이번에 소름끼치게 깨달았다.  각 배우들은 표정 하나 눈짓, 몸짓, 손짓 하나하나가 그 역할에 빙의되어 그냥 그 "캐릭터" 자체로 변해서 내게 화면 속에서 걸어나와 말을 걸어왔고, 그들의 사는 모습을 브라운관 밖에서 훔쳐보며(시청자의 역할을 결국 그런 것이란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내 생각, 의견 따위는 떠올릴 순간도 없이 그냥 그렇게 그 안으로 같이 녹아들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예전 같았으면 몰랐을 감정들, 느낌들, 관계들을 같이 곱씹고 느끼고 아파하고 웃음지으며 함께 그 순간들을 살았다.  이런 국보급 연기자들이 기라성같이 한 시대에 늘어서서 함께 출연할 수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사한 시간들이었는지..  정말 이런 작품이야말로 수출하면(가령 저런 잔잔한 호흡의 작품들이 인정받는 일본이나, 또는 그 안에 카메오로 나온 몇몇 미남배우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중국 등에) 엄청난 국위선양일 텐데 하는 생각과 함께, DVD로 나오면 바로 사서 영원히 소장하리라 결심을 굳혔다.(부디 나오기를..)  

 

이런 이야기를 잡다하게 늘여놓는 이유는..  밤에는 그 드라마를 달렸다면 낮에는 이 책을 달렸기 때문이다.  아이의 수영수업을 기다리는 동안 읽을거리로 얼른 들고 나간 책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아이의 수영모습은 한 번도 안 쳐다보고 혼자서 미소짓고 때로는 혼자서 눈물 지으며 한시간 내내 고개를 푹 파뭏고 그대로 독파해버리게 되었다. 예전같았으면 몰랐을 감정을 나이가 들었기에 의미심장하게 와닿는 경험, 더 깊이 와닿는 느낌을 하루 사이에 활자물과 영상물로 다 접해버려서인가, 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날 때는 서로 연결되는 감정에 마음속 깊이 touching되는 느낌이었다.    

 

 

따지고보면 나이가 어려서 접했을 때는 아직 그 글의 의미나 작가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 했던 책들이 이 나이가 되어서야 문장 하나하나가 아리게 박혀오는 글들이 있다.  황순원의 "소나기", 알퐁스 도데의 "별", 생 텍쥐뻬리의 "어린왕자"와 "야간비행", 미당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 등 학교 국어책에서 접해봤던 글들, 그리고 이 "빨강머리 앤" 같은 글 말이다.  정말 짧은 문장들로 이뤄져있고 서정적 표현에 둘러싸여있는 글들이다보니 어린 나이에 접했을 때는 그 문장들 속에 감춰져있는 깊은 감정과 철학적이기까지 한 삶에 대한 고찰을 전혀 알아듣지 못 했었더랬다.  소위 말하는 고전급 장편들이나 좀 읽어야 그 정도 수준의 깊이있는 내용을 알 수 있을까 하는 허황된 마음에 두꺼운 장편들을 끼고 읽느라 저 산문형 단편들을 휙휙 던져버리기 일쑤였으니까.  특히 빨강머리 앤의 경우는 만화로 먼저 접했었는데, 내가 참 싫어했던 "캔디" 스타일의 작풍으로 표현된 그림체에 더 우습게 여겼던 것 같다.

 

그런데 어제 대기실에 앉아서 읽으며 앤의 그 다정한 말들, 그 현명한 말들, 그 따뜻한 말들, 그리고 그 안에서 느껴지는 무한긍정적이면서도 위로해주는 말들은 결코 그렇게 우스운 것들이 아니었다.  아니, 작가만이 아니라 작가의 글을 통해 접하는 나까지도 같이 힐링이 되는 느낌이었다.  다이애나와의 우정을 놓고 그 소중함에 감사하며 상대에게 표현하는 앤의 모습은, 시니어벤져스에서 보여졌던 우정들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서로에 대한 지나친 애정으로 가끔은 상대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도 줬지만 그 아픔을 통해 한 뼘씩 성장해가는 모습들 속에서, 내 지나온 삶의 인연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현실 속의 내 인연들은 그렇게해서 같이 성장해간 관계도 있고 또는 그렇게 해서 영영 끈을 놔버린 인연들도 있다.  함께 했던 시간들과 추억들을 돌이켜보면 너무나 아쉽고 안타깝지만..  또 그렇게 놓아보내진 손에 대해서는 시간이 지나며 그리움의 색이 바래지고 그 흐려져가는 실루엣들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게 되는 것을 보면 아마 그 인연은 거기까지였나보다 하는 것을 나름 수긍하는, 또 다른 의미의 깨달음의 인연들이기도 했다.  그래도 우정이란 이름으로 함께 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을 통해 느끼고 배웠던 감정들, 그리고 그 감정들을 통해 조금씩 변해갔던 내 모습 등, 그들을 어떻게 다 잊을 수 있을까. 

 

예전에는 위에 말한 책들을 읽을 때 별다른 감흥이 없고 오히려 졸리기까지 했었던 이유는 아마 내 살아온 날이 너무 日淺하여, 책에서 표현한 감정들이 내 생전 느껴보지 못 한 생각들이고 가져보지 못 한 인연들이었기에 이해를 못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작은 오해로 가장 소중했던 친구를 잃어보기도 하고 소원해져보기도 하고 또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서 나이를 뛰어넘어 마음을 나누는 경험을 차곡차곡 내 몸 안에 쌓아가다보니, 짧은 문장들 안에 함축된 울림들이 사실은 얼마나 큰 것이었나 이제는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또 다른 느낌으로 또 다른 생각으로 다가오는 그들, 웬만한 철학서보다 더 많은 것들을 얘기해주고 가르쳐주고 보여주는 그들, 전에는 정말 이해하지 못 했었던 그들의 목록 안에 앤도 넣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잔잔하게 미소와 함께 때로는 눈물 한 방울과 함께 위로로 다가와주는 앤과 그 만화의 스틸컷들.  여자아이를 키워본 적 없어서 항상 표현함에 서툴고 갖고 있는 애정만큼 다 드러내지 못 해서 안타까운 매튜 아저씨는 앤에게 퍼프소매의 원피스를 사주며 이렇게 말한다, "네 낭만을 전부 포기하지는 말아라, 앤.  낭만은 좋은 거란다.  너무 많이는 말고, 앤. 조금은 간직해둬."

 

조금은 간직해둬..  시니어벤져스가 나온 드라마에서 오랜 시간동안 가정폭력에 시달려온 딸을 위해 뒤에서 화를 내며 주저앉는 우리들의 아버지 세대를 대표하는 그 家長은 나중에 다른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기는 그 시대 남자들이 다 그랬듯이 자식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고.  그저 자식을 그런 경험에 내몰리게 한 자신의 가난이 더 미웠을 뿐이라고.  그 아버지도 사실은 딸에게 네 잘못이 아니라고 그러니 네 자신을 자책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네 마음을 네 모습을 그대로 간직해둬라고 말해주고 싶지 않았을까.  어떻게 말해야할지 미리 알았다면, 그렇게 딸을 위로해주고 붙들어주고 일으켜세워줄 수 있지 않았을까.  무뚝뚝함이, 그리고 소통부재가 가장의 권위라 믿었던 그 시절, 가해자보다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더 큰 상처를 받았을 딸에게 뒤늦게나마 그렇게 사과를 하게 되는 모습을 보며 매튜아저씨가 떠올랐더랬다.  설사 표현력의 부재로 또는 시대적 환경의 차이로 비록 말로는 다 표현 못 할지라도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이에게 해주고 싶었을 말, (남들과 다르다고 해도 그런 네 모습을 그대로 사랑하며) "조금은 간직해둬"라는 말.  그리고 어느 자녀가 자기 부모로부터 그런 격려와 지지를 원하지 않을까 싶은..  작가를 통해 다시 돌아보게 된 앤은 정말 나한테 참 많은 얘기들을 들려줬었다.  그래서 아이가 열심히 수영교습을 받는 동안 학부모대기실에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작가가 전해주는 앤의 말들을 들으며 간혹 나도 모르게 떨어지는 눈물방울들을 가리느라 좀 고생했단 것은 안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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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를 위한 감정코칭 - 존 가트맨.최성애 박사의
존 가트맨.최성애.조벽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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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아이를 앞에 놓고서 생활할 때는 실천하지 못 하는 행동들이나 또는 미처 생각나지 않는 말들이 있다.  아이가 가졌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그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서 그런 "자세"가 있다는 걸 보고 배워야할 role model로서의 부모가 되어 부족한 품성이라면 많은 경우, 자제심, 인내력, 배려, 경청하고 공감하는 자세이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육아서나 인생서적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많이 논의한다.  남(자식)을 대하는 책(육아서)에서는 저 부분을 많이 강조한다면 나를 대하는 책(자기계발서)에서는 감사하는 마음에 대해서도 많이 얘기한다.  그런데 육아를 하며 감사하는 마음이 또 전후로 따라올 수 있음을 어제 알았다.

 

 

어제 꼬마 친구네 놀이터파티에 초대되어 찾아갔다가, 아들 잘못으로 호스트 친구가 엄청 울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사과하고 일찍 물러나왔는데 쭈볏대며 사과한 꼬마와 달리 그 친구는 우리가 떠나는 순간까지 마음이 안 풀렸었다. 

 

지켜본 나로선 그 친구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이었으나 아들로선 많이 민망했었나, 돌아오는 차 안에서 사과해도 안 받아줄 것을 왜 하게했냐며 날 상대로 원망을.. 그래서 "00아, 넌 사과한 걸로 끝난다해도 상대는 사과받은 즉시, 그래 알았어 이젠 괜찮아. 하지 못 할 때도 있는거야.  너는 일부러 한 행동이 아니라 해도 결과적으로 상대를 그만큼 아프게 한 것이라면 그 아이 입장에서는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들었다고 바로 분이 풀릴 순 없잖아" 하니 그럼 자긴 어떻게 해야하냐고..  용서받을 때까지 기다리는거라고, 상대방이 받아주든 안 받아주든 넌 일단 잘못한 거 인정하고 사과하고 그 다음엔 원망말고 기다려야한다고.  그렇게 얘기해줬는데, 아이한테 말하며 그러는 나는 과연 그렇게 살아왔나 갑자기 돌아보게 되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하였고 그 일에 대하여 사과했을 때 상대방이 즉각적인 용서반응을 안 보인다면, '사과했는데도 왜 저래?'하며 오히려 상대방이 속 좁다(?)고 일방적으로 단정짓고 상대의 감정을 무시하며 그대로 돌아서지는 않았나 싶은..  정말, 난 이 아이에게 모범이 될 만 했을까 갑자기 내 자신을 여러가지로 돌아보게 되었다.  사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언행으로 부아를 돋궈놓고서는 "아 저런, 몰랐어. 미안!"하는 한 마디로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가버리는 상대방을 보고 더 화나지 않을까 싶으니, 어쩌면 미안해하고 사과하는 행동의 앞뒤로는 (상대의 감정에 대한) 공감-(내 언행의 잘못에 대한) 사과-(상대가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는데 있어서 배출하는 것에 대한) 배려-(그 감정이 씻겨내려갈 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의 연쇄작용이 필요한 것을 그 동안 살아오면서 나 역시 제대로 작동시켜본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아이를 키우며 부모가 성숙한다는 옛 말, 그른 것이 하나도 없나 보다.  아이를 향해서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때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나?'싶을 때도 있고, 이미 하고난 뒤 돌아서서 '그때 왜 그랬을까'하고 후회할 때도 많지만, 또 아이가 있는 덕분에 그 아이를 통해 제3자 입장에서 내 행동을 돌아보는 기회도 많은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고보면 내 아이를 생각해서 읽은 육아서에 나온 글들은 내 아이만을 상대로 한 코칭이 아니라 사회에서 살아가며 타인에 대해 전반적으로 나의 부족한 면을 깨우치고 채워주는 내용들이 더 많았던 듯 싶다.  운전하며 돌아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생각이 스쳐가며, 귀가 후에는 그간 무심코 읽고 지나갔던 책들을 그 목차로 짚어보며 내 행동양식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평범한 하루 일과 중에서 아이와 함께 한 것만으로 나의 부족한 면을 깨달을 기회가 있었다는 점에 감사한 하루이기도 했다. 

 

이렇게 작은 깨달음과 감사들이 쌓여가면서 매일 조금씩 아이와 함께 성장해간다.  그저 한 가지 더 바라는 점이 있다면, 친구 말마따나 "철 들자마자 노망난다"고 너무 늦게 되지만은 않기를.

 

(여하튼 그 존재 자체로만으로도 도움이 되는 책들이 분명 있다.  목차만 되짚어 읽어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해주는 책들은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비좁은 책장 속에 꾸역꾸역 쌓아놓더라도 소장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 새삼 느꼈다.)

육아, 아이는 부모의 스승, 대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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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스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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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친정에 놀러갔다가 한 번 읽어보라고 부모님으로부터 우연히 받은 책. 아이에게 혼자 놀고 있으라고 장난감을 찾아준 뒤 더운 김에 씻고 편히 누워서 뒤적이다가 그만 끝까지 읽게 된 책이었다.

 

 

내용은 단순하다, 주변에 내세울 만한 인지도가 부족한 주인공은 공부 하나로 승부를 봐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거기서 누가 봐도 인기남일 친구를 만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親友"란 것을 가져본 기쁨을 누려본다. 키도 훤칠하고 얼굴도 곧잘 생기고 운동도 잘하고 성격까지 좋은 그와 향 좋은 커피를 거의 매일이다시피 함께 자취방에서 만나 음미하며 둘은 그냥 조용히 시간을 같이 보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져보고 느껴본 우정의 기쁨, 그 소중함.  하지만 그 행복은, 잘 나가는 학우들이 모여 만든 세미나에 함께 소속한 두 사람이 그 학우들 중 한 명의 가족이 소유한 별장에 초대받으며 결국 그 친우의 갑작스러운 사고사로 끝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결코 왕따나 은따의 이야기도, 사회부적응자에 대한 부정적이고 음울한 현실 이야기도 아니다.  그 잘나가는 학우들도 알고보면 다들 꼬이거나 모나지 않은 성격의 따뜻한 친구들일 뿐이고 졸업 후에는 각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그냥 건실한 청년들일 뿐이다.  하지만 문제는 학창시절의 암흑사로 깊이 묻어둔 그 건에 대하여 누군가가 각 청년들의 직장으로 또는 이웃으로 "xxx는 살인자다"라는 투서를 하면서 시작된다.

 

 

실제로 살인을 했거나 도모한 경우도 아니었고, 사실 그 사고사에 대해서는 법적책임보다는 그냥 도의적 책임 외에는 없는 그들이지만 마음 속 깊이 죄책감을 품고 지냈던 그들은 모두 충격을 받고 그래서 다시 한 번 "그 날" 밤의 일을 되짚어보게 된다.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죄책감에 더하여 그리움까지 품고 살아가고 있었던 주인공은 그렇게 모여 주고받는 대화 중에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그 친구의 다른 모습들, 또는 전해듣지 못 했던 모임 등을 듣게 되며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내가 친했다고 생각했던 우리 관계가 정말 그에게도 친밀한 관계 그 자체였을까?'하는 의문이었다.

 

 

어느 조직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그 수많은 조직 중에서도 인간관계가 가장 끈적이고 친밀하고 밑바닥까지 오픈할 수 있기에 더 큰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는 곳은 학교일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서로 이름으로 상대를 부르며 그 이후로 흐른 물리적 시간에 상관없이 얼굴을 마주함과 동시에 그대로 그 때 그 나이로 돌아가서 툭툭 치며 농담을 주고받는 희안한 힘을 가진 청춘시절을 함께 한 사람들, 지나가버린 내 시간을 공유하였기에 내게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편하고 다른 누군가와는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위치를 내 마음 속에 그리고 내 머리 속에 차지하고 그렇게 서로 엮이고 또 서로의 기억 속에 집어넣어 추억이란 이름으로 각자 살아가는 동안 시시때때로 열어보며 미소로 때로는 쓴웃음으로 되살아나는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과 공간이 바로 학교생활이라고나 할까.  사람따라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학창시절의 친구들을 만나면 지금의 나이에 상관없이 그들을 만났던 그 나이대의 정신연령에 맞게 얘기를 나눈 수준으로 나도 모르게 되돌아가게 된다.  그러다보니 초,중학교 때 친구들보다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친구들이 이 나이에 만나면 오히려 더 편하고 뒤로 갈수록 더 가까운 느낌이 드는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는 그래도 사고능력의 확장으로 대화의 화제도 풍부해지고 깊이도 더해진 수준으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본 가락이 있기에 그럴 것이다. 

 

 

그래서 대학에서 평생의 지기를 만났다는 주인공의 사연도 이해가 되었고, 그렇게 만난 친구였기에 나는 내 바닥을 보여주면서까지 가깝다고 생각한 것 만큼 그에겐 내가 그만한 가치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얼마나 큰 충격이 되었을까도 이해가 되었다.  그 상대가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 사실 자체가 내 청춘의 유의미한 부분이 사실은 무의미한 시간이었다는, 내 지나간 시간에 대한 부정이 되어버리는 느낌이 될 테니까.  그러다보니, 사실은 자기가 일찍 떠나간 친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고 "착각"한 사실을 깨닫고 그 친구에 대해 이제부터라도 알아보겠다고 나선 주인공의 여정에 같이 몰입해들어가게 되었다.  주인공의 모습도 집착이라기보다는 뒤늦은 사죄라고 할까, 아니면 이제 그 아팠던 청춘으로부터 한걸음 떨어져나왔기에 오히려 담담히 돌아보는 모습 때문이라고 할까, 결코 질척거리거리는 신파조나 또는 자기변명으로 일관하는 값싼 모습이 아니었기에 더 현실적으로 함께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렇게 읽어나가며 내 지난 세월을 돌아볼 기회도 가져봤다.  나는 그 누군가에게 "親友"라고 여겨지고 있기는 할까. 그리고 그 누군가가 내가 생각하는 "누군가"와 동일인물이기는 할까 등등.

 

 

아이를 키우며 또 바라게 되는 것은 살아가며 그런 친구들을 평생 한 두명쯤은 꼭 만나기를, 그리고 놓치지 않고 그 끈을 계속 이어갈 수 있기를 하는 점이다.  그런 친구들만 가질 수 있다면 외동이라도 놓고가는 부모 입장에서는 큰 걱정없이 세상을 떠나는 날 마음 편히 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집안의 큰일에는 형제자매 만한 관계가 없겠지만 남편의 친구들이나 내 대학동기들을 보면 남자애들의 우정이란 서로 다른 부모 밑에 태어났다고 해서 큰 일을 당한 친구에게 "내 부모는 아니니까"하며 외면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게되니 그 부분도 역시 마음이 놓이게 된다.  어쨌든 우리 부부가 세상을 뜬 뒤에 홀로 이 각박한 세상을 헤쳐나가야하는 녀석이 결코 외롭지는 않을 것임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믿음과 평안함은 아직은 어디에 있는 누군지도 모르는 하지만 장래 내 아이와 서로에게 좋은 친구들이 되어줄 그 녀석들 덕분이란 것, 그래서 그 누군지도 모를 '꼬마들'에게(적어도 아직은. 아마도?) 감사함으로 함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도 내게는 우리집 녀석을 볼 때마다 흐뭇함으로 그 성장을 지켜볼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니, 진정한 우정이란 그 당사자 뿐 아니라 주변에도 기쁨이 되어주는 소중한 관계일 것이다.  마치 주인공이 외아들을 사고사로 잃고 쓸쓸히 가는 시간들을 견뎌내고 있는 노부부를 찾아갔을 때, 이미 떠나버린 아들이지만 그 아들에게 그래도 좋은 친구들이 있었단 사실을 알게 된 것 하나만으로도 흐뭇해했던 부모의 마음처럼 말이다. 

 

 

 

 

그래서 은연 중에 여러가지 입장에서 감정이입이 된 것일까..  주인공을 따라서 함께 먼저 세상을 뜬 친구의 족적을 따라가며 나도 모르게 바랐었다, 그 친구에게도 주인공과의 그 때의 그 시간이 정말 따뜻하고 소중한 시간이었기를.  함께 한 그 순간들이 너무나 귀했기에 다른 무엇과 바꾸고 싶지 않은 청춘의 한 자락으로 몸에 각인되고 마음에 기록되어 혹 살아있었다면 그 생을 통해 내내 기억되고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었기를.  다행히도 끝에 가서는 독자인 나 뿐만 아니라 이야기 속의 주인공도 알게 되었다, 주인공이 생각한 그 친구와의 "우리"모습은 그 친구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우리"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오랜만에 진지하게 읽고 또 그 온기가 오래 남는 소설이었다.

 

 

 

 

사족: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어쩌면 이제는 故人이 된 친구의 사고사 원인에 대해 그 동안 은연 중에 주인공이 다른 학우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품고 있었던 도덕적 우월감을 - '나는 최소한 그 때 음주운전을 조장하며 너희들처럼 그 친구의 등을 떠밀지는 않았다'는 - 부숴버리는 기억이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 친구가 거절하지 못 하는 성격으로 서투른 운전실력에도 그 밤에 폭우가 쏟아지는 그 산길을 홀로 운전해서 나가게 되었을 때, 침묵으로 동조한 자신이 그 친구와의 우정밀도를 돌이켜볼 때 사실은 그 자리에 있었던 그 누구보다도 가장 책임을 느껴야 했었다는 때늦은 후회감.  그것을 그 긴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는 것 아니었을까.  이제 그 깨달음이 주는 무게감을 지게되었으니 주인공이 앞으로 삶의 남은 시간들을 어떻게 견뎌낼지는..  참으로 쉽지 않은 시간들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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