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6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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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에 대한 얘기를 접했을 때 나 역시 현지에서 생중계로 뉴스를 보며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라 리뷰 등을 자세히 살펴봤다. 17살 아이가 살인자로 오명을 남긴 채 자살로 그 짧은 인생을 마감한지 17년 만에 그 엄마가 쓴 담담한 수기적 내용. 그 때 사건 직후 헬기 등에서 촬영한 살인자들의 집들(참 크고 좋아보였던 걸로 기억한다), 전반적으로 경제수준 높고 살기 좋은 곳이라 알려져있는 곳에서 역시 중산층 백인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학교에서 벌어진 대학살극이었기에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고 그 때문에 온갖 추측과 가쉽이 난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 나름 아이러니 하다고 느꼈던 것은, 피살당한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가해자 측도 평범한 중산층 집안의 부모가 온전히 존재하는 보통 사람들의 아들들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그로부터 17년이란 자기복기 시간이 지나서 그 "가해자" 중 한 명의 엄마가 쓴 수기가 자기변명이 아닌 고통에 대한 그리고 혹시 무엇인가 놓친 것이 있었나 하는 자기반성의 글이란 내용의 리뷰를 읽고 이 책을 주문한 뒤 나름 그 내용에 기대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책을 읽으며 뒤로 갈수록 불편함을 느꼈던 것은..  저자가 "이렇게 아이를 사랑했고 저렇게 최선을 다 했으며 항상 그런 순간에는 바로 이렇게 대응을 했었다"고 한 부분들 때문이었다.  몇십 페이지에 걸쳐서 계속 나오는 그 내용들을 접하며 느낀 점은, 사실 이들에게서 굉장히 자녀에게 집착하고 아이의 행동을 하나하나 다 참견하며 간섭하는 부모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과도한 간섭과 집착을 애정이란 이름으로 잘 포장하고 들이밀었기 때문에, 아직 어린 아이들 입장에서는 그러한 "관심"을 거부하거나 부정하는데 큰 두려움과 자기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을 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큰 아들도 있는데 그 아이는 성격이 외향적이라 그럴수록 오히려 겉으로 반항하며 은연 중에 부모에게 경고함으로써 잘 비켜갔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사건의 당사자가 된 둘째의 경우 매우 내향적이고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는 성향의 아이였기에 그런 과도한 관심과 간섭, 집착이 오히려 아이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으리라 짐작이 되었다.  각 아이의 타고난 기질과 서로 "다름"에 대한 관찰과 배려가 전무한 상태에서, 스스로 생각하기에 "옳다고 생각"하는 잣대를 들이대며 그 잣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날 경우에는 집요하리 만큼 쫓아다니며 숨 쉴 공간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본인들은 좋은 부모 노릇을 완벽하게 했다고 생각하는 모습에서 그 내용을 글로 읽고 있는 "성인"인 나조차도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작 "가해자의 엄마"가 되어버린 당사자는 자신의 그 모든 "사랑"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어긋났다, 결국 자신은 잘못 키운 것이 없는데 그 아들의 뇌에 우울증을 극대화하는 특수한 호르몬이 작용 중이었던 것을 몰랐던 것이 원인이었단 내용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은 본인들의 철저하고 꼼꼼한 모니터링에도 불구하고 걸러내지 못 한 또 다른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친구 때문이었다는 식의 변명 아닌 변명으로 점철한 내용이라니..

 

이 글을 읽으며 내가 정말 안타까왔던 점은 사실 그 점이었다, 결국 이 사람은 끝까지 (본인의 의지로) 진실을 외면하거나 아니면 아예 (무지함으로) 정말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진실을 모르고 살아갈 것이란 사실 때문이었다.


아이가 잔혹한 방법으로 다른 많은 아이들의 목숨을 빼앗고 스스로 죽음을 결심한 괴물이 되기까지 그 모든 시간들을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살아온 부모로서, 많은 사람들이 사건 후 이 엄마에게 물었다고 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저자도 스스로에게 숱하게 되뇌이고 되물으며 괴로움과 고통 속에 몸부림을 쳐왔고 앞으로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찾지 못 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은 아이를 굉장히 사랑했고 부모로서 옳다고 생각한 방식으로 양육했으며 지금 생각해도 그 방법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자신이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 나누던 대화방식, 아이가 어떤 문제를 일으켰을 때 취했던 대응방식, 또 아이의 친구들에 대한 꼼꼼한 모니터링과 선정에 대한 애정(이라 씌여있었지만 내게는 "지독한" 간섭/폭력이라 읽혔다) 등등을 자세하게 기술해놨다.  물론 그러한 태도가 모든 아이들에게 다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양육방식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아이처럼 자기중심적 성향과 그에 따른 자존심이 엄청 강한 기질의 아이에게는 상당히 견디기 힘든 부모가 아니었을까 싶다.  결국 양육의 의 시작을 "내 자식은 내가 제일 잘 안다"는, 대부분의 부모가 저지르는 큰 오류로부터 첫 발자국을 뗀 것이 이 모든 불행의 시발점은 아니었을까.  읽는 내내 내가 받은 인상은 이 아이의 기질을 고려할 때, 애정을 빙자한 정서적 폭력이라고까지 읽혔으니까..

우리는 데이트폭력을 보며 더 이상 애정을 가진 두 남녀가 사랑싸움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애정을 품고 있다고 해도 폭력은 말 그대로 폭력일 뿐이고, 여기에는 물리적 폭력 뿐 아니라 언어적/정서적 폭력도 포함된다.  차이가 있다면 물리적 폭력은 그 피해의 정도가 측정하기 쉬운 반면 후자의 경우는 가늠하기 어렵다는 것 뿐.  하지만 그 후유증으로 따지자면 언어적 또는 잘못된 생각으로 인한 정서적 폭력은 그 여파와 지속성을 고려할 때 그러한 폭력의 피해자에게 장기적으로 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은 여러 관련 사건들과 연구들을 통해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놀라고 그래서 불쾌하게 느꼈던 점은, 그런 사실을 재확인했단 부분이 아니다.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러한 폭력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에게 가한 가해자는, 그로 인한 결과로 그 피해자가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극단적인 결말을 맞이한 뒤에까지조차도 자신이 사실 상 그 "괴물"이라 낙인찍힌 아들을 그런 존재로 만든 진짜 "가해자"란 사실을 결코 모르고(또는 그냥 외면일까?)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 엄마가 역시 평범하고 애정이 풍부한 가정에서 자라난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래서 이런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일반인"이 이렇게 타인(여기서는 아들)에게 애정이란 이름으로 피할 길이 없는 폭력을 무자비하게 쏟아낼 수 있었다면, 그럼 나를 비롯한 그 외의 모든 "일반인"들도 자신들이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애정을 쏟는 상대방 그 누군가에게는 결국은 가면을 쓴 괴물들일 수도 있다는 사실, 바로 그 부분이 못내 놀랍고 내 자신의 불안감을 자극해서 불쾌감을 느끼게 한 원인이었다.  어떤 부분에서는 이 책은, 읽으면서 묘하게 나름 충격으로 다가왔던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 "봄에는 나는 없었다"를 연상시키는 수기였다. 


저자는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 책을 썼다지만..  불행히도 다 읽고난 뒤에는 오히려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질문이었다.   단지 질문의 방향이 틀려졌을 뿐.  저자가 그 사건 이후로 주변인들에게 숱하게 받았고 자신도 끊임없이 되돌아보며 답하고자 했던 질문은 이것이었다:

 

"(당신 아들이 그런 괴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하지만 내가 책을 읽은 도중에 품게되어 끝까지 의문을 갖게 된 질문은 이것이었다:

 

"(당신이 애정이란 이름으로 그 아들을 막바지까지 몰아넣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지금까지도) 모를 수가 있어요?"

결국 책을 덮으며 끝까지 남는 질문은 하나였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책을 덮고 하루가 지나도록 생각해봐도 이 책에서는 그 답을 찾을 수가 없었기에..  저자의 저술에 대한 선량한 의도나 역자의 정성어린 번역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별점을 2개보다는 결코 더 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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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20-03-10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만큼 아들에 대한 충격과 실망이 컷다는 반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