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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스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6년 7월
평점 :
주말에 친정에 놀러갔다가 한 번 읽어보라고 부모님으로부터 우연히 받은 책. 아이에게 혼자 놀고 있으라고 장난감을 찾아준 뒤 더운 김에 씻고 편히 누워서 뒤적이다가 그만 끝까지 읽게 된 책이었다.
내용은 단순하다, 주변에 내세울 만한 인지도가 부족한 주인공은 공부 하나로 승부를 봐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거기서 누가 봐도 인기남일 친구를 만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親友"란 것을 가져본 기쁨을 누려본다. 키도 훤칠하고 얼굴도 곧잘 생기고 운동도 잘하고 성격까지 좋은 그와 향 좋은 커피를 거의 매일이다시피 함께 자취방에서 만나 음미하며 둘은 그냥 조용히 시간을 같이 보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져보고 느껴본 우정의 기쁨, 그 소중함. 하지만 그 행복은, 잘 나가는 학우들이 모여 만든 세미나에 함께 소속한 두 사람이 그 학우들 중 한 명의 가족이 소유한 별장에 초대받으며 결국 그 친우의 갑작스러운 사고사로 끝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결코 왕따나 은따의 이야기도, 사회부적응자에 대한 부정적이고 음울한 현실 이야기도 아니다. 그 잘나가는 학우들도 알고보면 다들 꼬이거나 모나지 않은 성격의 따뜻한 친구들일 뿐이고 졸업 후에는 각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그냥 건실한 청년들일 뿐이다. 하지만 문제는 학창시절의 암흑사로 깊이 묻어둔 그 건에 대하여 누군가가 각 청년들의 직장으로 또는 이웃으로 "xxx는 살인자다"라는 투서를 하면서 시작된다.
실제로 살인을 했거나 도모한 경우도 아니었고, 사실 그 사고사에 대해서는 법적책임보다는 그냥 도의적 책임 외에는 없는 그들이지만 마음 속 깊이 죄책감을 품고 지냈던 그들은 모두 충격을 받고 그래서 다시 한 번 "그 날" 밤의 일을 되짚어보게 된다.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죄책감에 더하여 그리움까지 품고 살아가고 있었던 주인공은 그렇게 모여 주고받는 대화 중에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그 친구의 다른 모습들, 또는 전해듣지 못 했던 모임 등을 듣게 되며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내가 친했다고 생각했던 우리 관계가 정말 그에게도 친밀한 관계 그 자체였을까?'하는 의문이었다.
어느 조직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그 수많은 조직 중에서도 인간관계가 가장 끈적이고 친밀하고 밑바닥까지 오픈할 수 있기에 더 큰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는 곳은 학교일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서로 이름으로 상대를 부르며 그 이후로 흐른 물리적 시간에 상관없이 얼굴을 마주함과 동시에 그대로 그 때 그 나이로 돌아가서 툭툭 치며 농담을 주고받는 희안한 힘을 가진 청춘시절을 함께 한 사람들, 지나가버린 내 시간을 공유하였기에 내게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편하고 다른 누군가와는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위치를 내 마음 속에 그리고 내 머리 속에 차지하고 그렇게 서로 엮이고 또 서로의 기억 속에 집어넣어 추억이란 이름으로 각자 살아가는 동안 시시때때로 열어보며 미소로 때로는 쓴웃음으로 되살아나는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과 공간이 바로 학교생활이라고나 할까. 사람따라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학창시절의 친구들을 만나면 지금의 나이에 상관없이 그들을 만났던 그 나이대의 정신연령에 맞게 얘기를 나눈 수준으로 나도 모르게 되돌아가게 된다. 그러다보니 초,중학교 때 친구들보다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친구들이 이 나이에 만나면 오히려 더 편하고 뒤로 갈수록 더 가까운 느낌이 드는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는 그래도 사고능력의 확장으로 대화의 화제도 풍부해지고 깊이도 더해진 수준으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본 가락이 있기에 그럴 것이다.
그래서 대학에서 평생의 지기를 만났다는 주인공의 사연도 이해가 되었고, 그렇게 만난 친구였기에 나는 내 바닥을 보여주면서까지 가깝다고 생각한 것 만큼 그에겐 내가 그만한 가치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얼마나 큰 충격이 되었을까도 이해가 되었다. 그 상대가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 사실 자체가 내 청춘의 유의미한 부분이 사실은 무의미한 시간이었다는, 내 지나간 시간에 대한 부정이 되어버리는 느낌이 될 테니까. 그러다보니, 사실은 자기가 일찍 떠나간 친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고 "착각"한 사실을 깨닫고 그 친구에 대해 이제부터라도 알아보겠다고 나선 주인공의 여정에 같이 몰입해들어가게 되었다. 주인공의 모습도 집착이라기보다는 뒤늦은 사죄라고 할까, 아니면 이제 그 아팠던 청춘으로부터 한걸음 떨어져나왔기에 오히려 담담히 돌아보는 모습 때문이라고 할까, 결코 질척거리거리는 신파조나 또는 자기변명으로 일관하는 값싼 모습이 아니었기에 더 현실적으로 함께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렇게 읽어나가며 내 지난 세월을 돌아볼 기회도 가져봤다. 나는 그 누군가에게 "親友"라고 여겨지고 있기는 할까. 그리고 그 누군가가 내가 생각하는 "누군가"와 동일인물이기는 할까 등등.
아이를 키우며 또 바라게 되는 것은 살아가며 그런 친구들을 평생 한 두명쯤은 꼭 만나기를, 그리고 놓치지 않고 그 끈을 계속 이어갈 수 있기를 하는 점이다. 그런 친구들만 가질 수 있다면 외동이라도 놓고가는 부모 입장에서는 큰 걱정없이 세상을 떠나는 날 마음 편히 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집안의 큰일에는 형제자매 만한 관계가 없겠지만 남편의 친구들이나 내 대학동기들을 보면 남자애들의 우정이란 서로 다른 부모 밑에 태어났다고 해서 큰 일을 당한 친구에게 "내 부모는 아니니까"하며 외면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게되니 그 부분도 역시 마음이 놓이게 된다. 어쨌든 우리 부부가 세상을 뜬 뒤에 홀로 이 각박한 세상을 헤쳐나가야하는 녀석이 결코 외롭지는 않을 것임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믿음과 평안함은 아직은 어디에 있는 누군지도 모르는 하지만 장래 내 아이와 서로에게 좋은 친구들이 되어줄 그 녀석들 덕분이란 것, 그래서 그 누군지도 모를 '꼬마들'에게(적어도 아직은. 아마도?) 감사함으로 함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도 내게는 우리집 녀석을 볼 때마다 흐뭇함으로 그 성장을 지켜볼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니, 진정한 우정이란 그 당사자 뿐 아니라 주변에도 기쁨이 되어주는 소중한 관계일 것이다. 마치 주인공이 외아들을 사고사로 잃고 쓸쓸히 가는 시간들을 견뎌내고 있는 노부부를 찾아갔을 때, 이미 떠나버린 아들이지만 그 아들에게 그래도 좋은 친구들이 있었단 사실을 알게 된 것 하나만으로도 흐뭇해했던 부모의 마음처럼 말이다.
그래서 은연 중에 여러가지 입장에서 감정이입이 된 것일까.. 주인공을 따라서 함께 먼저 세상을 뜬 친구의 족적을 따라가며 나도 모르게 바랐었다, 그 친구에게도 주인공과의 그 때의 그 시간이 정말 따뜻하고 소중한 시간이었기를. 함께 한 그 순간들이 너무나 귀했기에 다른 무엇과 바꾸고 싶지 않은 청춘의 한 자락으로 몸에 각인되고 마음에 기록되어 혹 살아있었다면 그 생을 통해 내내 기억되고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었기를. 다행히도 끝에 가서는 독자인 나 뿐만 아니라 이야기 속의 주인공도 알게 되었다, 주인공이 생각한 그 친구와의 "우리"모습은 그 친구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우리"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오랜만에 진지하게 읽고 또 그 온기가 오래 남는 소설이었다.
사족: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어쩌면 이제는 故人이 된 친구의 사고사 원인에 대해 그 동안 은연 중에 주인공이 다른 학우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품고 있었던 도덕적 우월감을 - '나는 최소한 그 때 음주운전을 조장하며 너희들처럼 그 친구의 등을 떠밀지는 않았다'는 - 부숴버리는 기억이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 친구가 거절하지 못 하는 성격으로 서투른 운전실력에도 그 밤에 폭우가 쏟아지는 그 산길을 홀로 운전해서 나가게 되었을 때, 침묵으로 동조한 자신이 그 친구와의 우정밀도를 돌이켜볼 때 사실은 그 자리에 있었던 그 누구보다도 가장 책임을 느껴야 했었다는 때늦은 후회감. 그것을 그 긴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는 것 아니었을까. 이제 그 깨달음이 주는 무게감을 지게되었으니 주인공이 앞으로 삶의 남은 시간들을 어떻게 견뎌낼지는.. 참으로 쉽지 않은 시간들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