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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레드 에디션, 양장) -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우리에게 ㅣ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백영옥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드라마는 한 회가 끝날 때마다 기다려야하는 시간이 성미에 안 맞아서 옴니버스 형식이나 에피소드 위주로 구성된 드라마가 아니면 거의 안 본다. 그러다보니 21세기 들어서서 항간에 세기(?)의 히트작이라 일컬어진 드라마들 중 본 것이 거의 없게 되었다.(가령 '별에서 온 그대', '궁', '기황후', '나인' 등등 특히 대장금처럼 호흡이 긴 작품은 더더욱..) 그래서 이번에 시니어 어벤져스라며 대대적 선전을 했던 드라마도 주변 친구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방영 중에는 본 적이 없다. 그러다가 우연히 재방송하는 것을 한 편 보게 되고 그대로 꽂혀서 TV다시보기로 새벽을 하얗게 지새워가며 그냥 쭉 내달리게 되었다.
그 드라마를 보면서 함께 울고 웃고.. 연기를 잘한다는 것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고 어떤 것인지를 이번에 소름끼치게 깨달았다. 각 배우들은 표정 하나 눈짓, 몸짓, 손짓 하나하나가 그 역할에 빙의되어 그냥 그 "캐릭터" 자체로 변해서 내게 화면 속에서 걸어나와 말을 걸어왔고, 그들의 사는 모습을 브라운관 밖에서 훔쳐보며(시청자의 역할을 결국 그런 것이란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내 생각, 의견 따위는 떠올릴 순간도 없이 그냥 그렇게 그 안으로 같이 녹아들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예전 같았으면 몰랐을 감정들, 느낌들, 관계들을 같이 곱씹고 느끼고 아파하고 웃음지으며 함께 그 순간들을 살았다. 이런 국보급 연기자들이 기라성같이 한 시대에 늘어서서 함께 출연할 수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사한 시간들이었는지.. 정말 이런 작품이야말로 수출하면(가령 저런 잔잔한 호흡의 작품들이 인정받는 일본이나, 또는 그 안에 카메오로 나온 몇몇 미남배우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중국 등에) 엄청난 국위선양일 텐데 하는 생각과 함께, DVD로 나오면 바로 사서 영원히 소장하리라 결심을 굳혔다.(부디 나오기를..)
이런 이야기를 잡다하게 늘여놓는 이유는.. 밤에는 그 드라마를 달렸다면 낮에는 이 책을 달렸기 때문이다. 아이의 수영수업을 기다리는 동안 읽을거리로 얼른 들고 나간 책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아이의 수영모습은 한 번도 안 쳐다보고 혼자서 미소짓고 때로는 혼자서 눈물 지으며 한시간 내내 고개를 푹 파뭏고 그대로 독파해버리게 되었다. 예전같았으면 몰랐을 감정을 나이가 들었기에 의미심장하게 와닿는 경험, 더 깊이 와닿는 느낌을 하루 사이에 활자물과 영상물로 다 접해버려서인가, 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날 때는 서로 연결되는 감정에 마음속 깊이 touching되는 느낌이었다.
따지고보면 나이가 어려서 접했을 때는 아직 그 글의 의미나 작가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 했던 책들이 이 나이가 되어서야 문장 하나하나가 아리게 박혀오는 글들이 있다. 황순원의 "소나기", 알퐁스 도데의 "별", 생 텍쥐뻬리의 "어린왕자"와 "야간비행", 미당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 등 학교 국어책에서 접해봤던 글들, 그리고 이 "빨강머리 앤" 같은 글 말이다. 정말 짧은 문장들로 이뤄져있고 서정적 표현에 둘러싸여있는 글들이다보니 어린 나이에 접했을 때는 그 문장들 속에 감춰져있는 깊은 감정과 철학적이기까지 한 삶에 대한 고찰을 전혀 알아듣지 못 했었더랬다. 소위 말하는 고전급 장편들이나 좀 읽어야 그 정도 수준의 깊이있는 내용을 알 수 있을까 하는 허황된 마음에 두꺼운 장편들을 끼고 읽느라 저 산문형 단편들을 휙휙 던져버리기 일쑤였으니까. 특히 빨강머리 앤의 경우는 만화로 먼저 접했었는데, 내가 참 싫어했던 "캔디" 스타일의 작풍으로 표현된 그림체에 더 우습게 여겼던 것 같다.
그런데 어제 대기실에 앉아서 읽으며 앤의 그 다정한 말들, 그 현명한 말들, 그 따뜻한 말들, 그리고 그 안에서 느껴지는 무한긍정적이면서도 위로해주는 말들은 결코 그렇게 우스운 것들이 아니었다. 아니, 작가만이 아니라 작가의 글을 통해 접하는 나까지도 같이 힐링이 되는 느낌이었다. 다이애나와의 우정을 놓고 그 소중함에 감사하며 상대에게 표현하는 앤의 모습은, 시니어벤져스에서 보여졌던 우정들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서로에 대한 지나친 애정으로 가끔은 상대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도 줬지만 그 아픔을 통해 한 뼘씩 성장해가는 모습들 속에서, 내 지나온 삶의 인연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현실 속의 내 인연들은 그렇게해서 같이 성장해간 관계도 있고 또는 그렇게 해서 영영 끈을 놔버린 인연들도 있다. 함께 했던 시간들과 추억들을 돌이켜보면 너무나 아쉽고 안타깝지만.. 또 그렇게 놓아보내진 손에 대해서는 시간이 지나며 그리움의 색이 바래지고 그 흐려져가는 실루엣들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게 되는 것을 보면 아마 그 인연은 거기까지였나보다 하는 것을 나름 수긍하는, 또 다른 의미의 깨달음의 인연들이기도 했다. 그래도 우정이란 이름으로 함께 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을 통해 느끼고 배웠던 감정들, 그리고 그 감정들을 통해 조금씩 변해갔던 내 모습 등, 그들을 어떻게 다 잊을 수 있을까.
예전에는 위에 말한 책들을 읽을 때 별다른 감흥이 없고 오히려 졸리기까지 했었던 이유는 아마 내 살아온 날이 너무 日淺하여, 책에서 표현한 감정들이 내 생전 느껴보지 못 한 생각들이고 가져보지 못 한 인연들이었기에 이해를 못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작은 오해로 가장 소중했던 친구를 잃어보기도 하고 소원해져보기도 하고 또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서 나이를 뛰어넘어 마음을 나누는 경험을 차곡차곡 내 몸 안에 쌓아가다보니, 짧은 문장들 안에 함축된 울림들이 사실은 얼마나 큰 것이었나 이제는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또 다른 느낌으로 또 다른 생각으로 다가오는 그들, 웬만한 철학서보다 더 많은 것들을 얘기해주고 가르쳐주고 보여주는 그들, 전에는 정말 이해하지 못 했었던 그들의 목록 안에 앤도 넣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잔잔하게 미소와 함께 때로는 눈물 한 방울과 함께 위로로 다가와주는 앤과 그 만화의 스틸컷들. 여자아이를 키워본 적 없어서 항상 표현함에 서툴고 갖고 있는 애정만큼 다 드러내지 못 해서 안타까운 매튜 아저씨는 앤에게 퍼프소매의 원피스를 사주며 이렇게 말한다, "네 낭만을 전부 포기하지는 말아라, 앤. 낭만은 좋은 거란다. 너무 많이는 말고, 앤. 조금은 간직해둬."
조금은 간직해둬.. 시니어벤져스가 나온 드라마에서 오랜 시간동안 가정폭력에 시달려온 딸을 위해 뒤에서 화를 내며 주저앉는 우리들의 아버지 세대를 대표하는 그 家長은 나중에 다른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기는 그 시대 남자들이 다 그랬듯이 자식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고. 그저 자식을 그런 경험에 내몰리게 한 자신의 가난이 더 미웠을 뿐이라고. 그 아버지도 사실은 딸에게 네 잘못이 아니라고 그러니 네 자신을 자책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네 마음을 네 모습을 그대로 간직해둬라고 말해주고 싶지 않았을까. 어떻게 말해야할지 미리 알았다면, 그렇게 딸을 위로해주고 붙들어주고 일으켜세워줄 수 있지 않았을까. 무뚝뚝함이, 그리고 소통부재가 가장의 권위라 믿었던 그 시절, 가해자보다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더 큰 상처를 받았을 딸에게 뒤늦게나마 그렇게 사과를 하게 되는 모습을 보며 매튜아저씨가 떠올랐더랬다. 설사 표현력의 부재로 또는 시대적 환경의 차이로 비록 말로는 다 표현 못 할지라도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이에게 해주고 싶었을 말, (남들과 다르다고 해도 그런 네 모습을 그대로 사랑하며) "조금은 간직해둬"라는 말. 그리고 어느 자녀가 자기 부모로부터 그런 격려와 지지를 원하지 않을까 싶은.. 작가를 통해 다시 돌아보게 된 앤은 정말 나한테 참 많은 얘기들을 들려줬었다. 그래서 아이가 열심히 수영교습을 받는 동안 학부모대기실에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작가가 전해주는 앤의 말들을 들으며 간혹 나도 모르게 떨어지는 눈물방울들을 가리느라 좀 고생했단 것은 안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