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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전투 1 - 히데요시의 죽음
시바 료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시바 료타료의 작품세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그의 역사서적에 대해서는 언제나 기대를 하고 있다고 말하는데는 주저함이 없다. 이는 그의 역작, <대망>을 읽고나서부터 품게 된 생각이다. 철저한 고증과 각 인물의 세심한 마음의 움직임까지 잡아내는 그의 필력과, 그 긴 호흡 사이 사이에 잠시 멈춰가게끔 끼어드는 그림을 그려내는 듯한 경관과 주변 묘사... 대작이라는 느낌을 충분히 갖게 해줬던 대망을 처음 그의 작품으로 접해서인가, 나로서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저자가 시바 료타료라는 것만으로도 선택하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정작 주문해서 받아본 이 책을 읽으면서 실망이 앞선 것은 내 개인적인 상념 탓이었을까. 우선, 책의 조잡한 출판. 꼭 과거의 이름 없는 출판사가 찍어낸 조잡한 무협지를 보는 듯한 표지와 인쇄 구성으로, 이것이 과연 요즘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는 출판업계의 작업인가 의심스럽게 했다.
그 다음으로는 번역자의 이상한 번역 기법. 일문학을 읽으면서 일본의 고어를 알게끔 해주고자하는 의도는, 일어학도로서의 진지한 시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꿇어앉는 자세'를 일어로 읽는대로 한글로 발음 표기를 하고, 밑에 주석처럼 그 용어 설명을 따로 달아놓았다던가 (그럴 바에는 차라리 한자로 제대로 쓰고나서 괄호를 열고 원어 발음과 해석을 달아주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여러 관직을 일어 발음 그대로 써놓고 오히려 한자는 생략해버린 이상한 형태의 번역과, 일어의 표현을 그대로 직역한 듯한 껄끄러운 번역 스타일 등등... 대망을 썼던 같은 작가의 소설이라면, 각 인물들의 상황에 따른 세밀한 심경 묘사와 상황 묘사 등, 여러가지로 행간을 읽게 하는 구절이 많았을 터임에도 불구,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는 그와 같은 내용은 하나도 보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읽는 독자로 하여금 꼭 한국어를 잘 모르는 일본인이 쓴 작품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 어설프게 옮겨진 반쪽짜리 작품을 보는 느낌을 줄 정도로 행간은 커녕 활자화 되어있는 문장조차도 전혀 매끄럽지 못 하게 되어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라면 일본의 근대사를 열게끔 해준 토대를 만들게 된 첫걸음, 가장 오래 된 안정된 정치역사가 가능했던 도쿠가와 막부의 초석이 된, 일본 전체 역사상으로 살펴보아도 매우 중요한 전투 중 하나이다. 그와 같은 전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 뒤에 얼마나 많은 암투와 두뇌전과 다양한 인간군상 간의 얽히고 섥힌 정사와 야사가 있을까. 실제로 세키가하라 전투에만 관해서 얼마나 많은 일본사학자들과 소설가들이 쓴 책은 부지기수이다. 하물며 작품 하나를 쓰기 위해서는 철저한 고증과 장고를 거쳐서 쓰기 시작한다는 그 시바 료타료에 의해서 선택되어진 소재가, 이 번역작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전혀 장대함과 세밀함은 느끼지 못 할 정도로 그렇게 조잡하게 씌여졌을 거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는다. 아무래도 번역의 실패라고 밖에는...
이 번역작은 한 마디로 매우 실망스러운 작품이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시바 료타료의 '세키가하라 전투'란 작품 자체가 실망스러운 시도였다고 섣부른 추측을 하고 싶지는 않다. 언젠가는 정성스럽게 제본된 출판물로, 제대로 된 번역작으로 읽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