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 케어
하마나카 아키 지음, 권일영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려고 장바구니에 넣어두고 배송을 기다리는 중. 흥미진진할 것 같은 내용에 기대가 많지만, 책소개 글에 나온 ˝개호˝라는 단어에 어색함을 느낀다. 한국어로 ˝간병˝이란 말을 쓰면 될 텐데 일본식 한자어를 독음 그대로 올린 듯. 없는 단어도 아니고. 번역자에 대해 약간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 부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 제왕의 생애 (양장)
쑤퉁 지음, 문현선 옮김 / 아고라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벼르다가 읽었다.  사놓고 언젠가는 읽고 싶은데 괜히 내용이 심각하고 읽다보면 피곤해질 것 같은 느낌에 책장 한구석에 밀어넣고는 계속 외면했었더랬다.  그래도 계속 가볍게 읽을 만화류를 섭렵하고, 내 공부(?)할 요량으로 아이의 초등준비 관련 정보서적들을 접하며 메모하고, 음울한 현대사회가 하늘에서 혼자 뚝 떨어진 것은 아니란 내용의 다독이는 산문류들을 읽다보면 조금은 심각한 것 같아도 내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를 접해보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집어들게 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소설이지만 내용에 나오는 제왕의 탄생과 일생, 한 국가의 몰락은 결코 새삼스러울 것 없는 현실 속의 과거 여러 왕조들의 내용이 섞여나온다.  난 영화 "베테랑"을 안 봤는데 그 영화를 본 친구의 말에 의하면 주인공의 면면을 설명해주기 위한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정말 저런 일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황당한 얘기들이 많았다고 했다.  궁금해서 얘기해달라고 하니 몇가지를 추려서 말해주는데 나처럼 남의 인생에 관심없는 사람도 쉽게 일반 신문지상에서 접해본 다양한 집안의 다양한 2, 3세들의 행패들이 영화 속의 주인공 한 명의 행동으로 녹아들어가서 화면에 펼쳐진 내용들이었다.  그러다보니 에피소드를 들을 때마다, "아 그거? 어느 기업의 누구 얘기네, 현실에서는 이랬었대" 하며 깔깔거리며 한참 수다를 떨게 되었지만.  그처럼 이 책도 읽다보면 소설 속의 주인공 한 명의 일생을 통해서 과거 실제로 살다 간 수많은 중국의 제왕들과 이 땅의 제왕들의 삶이 오버랩되어 함께 스쳐지나가는 걸 알 수 있다.

 

 

일국의 왕이 急逝를 한다.  후계자를 정하는 일에 있어서 존재감을 떨칠 수 있는 위치의 권력자들은 자신의 권력에 누수현상이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화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상대적으로 무능하거나 어린 황손(또는 왕손)을 찾아 추천한다.  위정자들의 입맛에 맞게 밀실 안에서 적당히 결정된 꼭두각시 제왕은 이렇게 탄생한다.  그리고 수렴첨정이나 권신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타고난 천성에 상관없이 새로운 제왕의 치세는 몇몇 권력자들의 기쁨을 위해 백성을 쥐어짜는 세태로 나타나고 그로 인해 나라 안은 어지러워진다.  견디다 못 한 민초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쯤에는 보통 국경 밖도 소란스러워지고 내우외환이 겹친 나라는, 제왕이 쫓겨나거나 또는 그 자리에 앉은 상태에서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

 

선왕의 急逝로 인해 후계자를 정할 때 종친회에서 선왕의 적통과 멀지 않은 친척 중 가장 나이어린 아이를 왕으로 내세워 (중국의 경우)태후나 (조선의 경우)대왕대비가 멋대로 국정을 주물러 터트리려고 한 예는 청나라 말기의 서태후나 조선 성종조를 떠올리면 쉬울 것이다.  또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라갔다가 결국 망국의 왕이 된 이로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를 떠올려봐도 좋을 것이고, 의지를 갖고 한 번 해보려고 했지만 결국 권력의 정점에 있던 태후와의 정치경쟁에서 져서 죽음으로 끝나는 경우는 한나라 초기의 황제들이나 청나라 광서제가 생각나고, "못 살겠다 갈아엎자" 하고 민초들의 반란봉기의 모습에서는 나중에 명나라를 건국하게 된 태조 주원장을 떠올릴 수도 있다.  살기등등하게 권력을 휘두르며 신나게 제왕놀이에 빠진 임금을 갈아엎자고 나선 이로는 연산군 폐위에 앞장선 신하들이나 또는 중종과 달리 적극적으로 선왕(광해군)의 폐위에 나선 인조가 연상되기도 한다.  선왕의 장례에 총애받던 후궁들을 강제로 순장시키거나 사람이 아닌 모습으로 둔갑시키고 분을 풀어대는 모습은 한나라의 여태후를 떠올려도 좋을 것이고, 나라를 통채로 손 안에 넣고 긴 지팡이 끝으로 황제를 통해 직접 통치까지 나선 이로는 당나라의 측천무후를 떠올려도 무방할 것이다.  망국의 순간에 불에 탄 궁궐 안에서 잿더미로 화한 상태로 처절하게 스러져간 제왕으로는 후에 영락제가 된 삼촌에게 쫓겨 달아났는지 아니면 스러졌는지 알 길조차 없었던 명나라의 2대황제 건문제나 또는 같은 왕조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를 떠올리면 쉬울 것이다.   황제의 죽음에 후궁들을 차례로 교살하여 순장시키는 경우는..  글쎄 엄청 많았겠지만 내 경우에는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 때문에 그런가, 명의 영락제가 가장 강렬한 인상을 갖고 있다.

 

 

하긴 따지고 보면, 조선왕조에서 아버지가 왕위에 있을 때 적장자로 태어나 제대로 세자교육을 받고 순탄하게 왕위를 물려받아 요절하지 않고 끝까지 왕으로써 일생을 마친 이는 단 한 명, 숙종 뿐이라니 어쩌면 최고의 권력 정점에 앉는 "제위"라는 것은 원래 그렇게 돌고 도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역사 속에서의 이런 행동들은 "그 결과 나라는..." 이렇게만 흘러갈 뿐 정작 그렇게 간택(?)되어 왕위에 올라선 이들의 마음 속이나 삶에 대해서는 의례 관심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바로 그 틈새를 꿰뚫어 "그렇게 꼭두각시로 열심히 내둘려진 그 아이는 어땠을까?  어린 나이에 허울 좋은 생사여탈권을 모두 쥔다는 장난감에 현혹되어 그저 하루 하루를 즐겁게 보내고자 했으나 사실은 매일 매일이 바로 자기자신이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드는 생활의 연속이었던 그 아이는, 정말 하루 하루의 시간 속에서 어떻게 버텨내고 어떻게 견뎌냈을까?"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의문에서부터 이 책은 출발한다.  그러고보니 나 역시 궁금해졌다, 내 자리가 아닌데 주변의 다른 어른들의 당리당략으로 툭 굴러들어온 복인지 화인지 모를 그 지위가 아무 것도 모르던 어린아이를 어떻게 변화시켜나갔을까.

 

결론은, "지위가 사람을 변화시킨다"였다.  소설의 주인공은, 결국 그 자리가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었단 사실을 알고 난 뒤에도 그 동안 익숙해졌던 권력을 놓치기 싫어서 정적을 암살하고자 했고, 제왕으로서의 의무 중 하나였던 후손을 얻기 위한 일상생활 같은 공적 생활에서 일어나는 비빈들의 암투 속에서 누구는 취하고 누구는 버리며 자신의 안위를 추구해나간다.  놀이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 한 결과로 제 때에 당도하지 못 한 전장에선 처절한 패배를 맛보고, 어리석은 왕이라도 일국의 얼굴이기에 그를 지키고자 나선 충신들은 목숨으로 그 댓가를 치루고 그 결과의 처절한 고통은 백성들의 몫이 된다(이 부분은 꼭 병자호란 때의 인조가 떠오른다).   그래도 소설 속의 주인공은 운이 좋았다.  폐위가 되어도 조선조의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유배지에서 치욕 속에 생을 보내지도 않았고, 고려왕조의 마지막 왕손들 마냥 길거리에서 인간사냥을 당하지도 않았으며, 진시황의 자손들처럼 저잣거리의 구경거리로 고깃덩어리로 전락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보다는 원래 왕위계승자였던 이복형의 승자로서의 자신감과 어리고 용렬한 동생에 대한 무시로, 개처럼 기어서 살아서 궁 밖으로 나갈 기회를 얻었다. 

 

폐서인으로 몸을 감추고 세상을 떠돌며 자유를 찾아 줄타기왕으로 거듭난 과거의 제왕은, 쫓겨난 왕에서 줄타기의 제왕으로 당당하게 경성으로 돌아간 길에서 결국 망국의 난을 겪고 만다.   이유는, 당당하고 유능하고 훌륭한 군인이자 정치인인 줄 알았던 이복형이 재위6년 만에 깔끔하게 나라를 말아먹었기 때문이다.  알고보니 너무나 뛰어났기에 오히려 독선적이었던 그가 담당하기에는 나라의 앞날이 이미 너무 풍전등화였기 때문이었다. - 그러니까 제왕의 능력에 상관없이 기울어진 정세로는 돌이킬 길이 없어진 나라라면 누가 있을까.  아마 진시황의 손자이자 황제란 이름을 감당할 수 없는 정세에 다시 진왕으로 명명된 진영을 제1손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진시황의 장손으로 사실 아주 똑똑했던 것 같은데 정말 시대를 잘못 만났다고 밖에는..  따지고 보면 호랑이 새끼는 다 호랑이라고, 史記에 나온 진시황의 자녀들을 보면 다 영웅호걸들이었다, 2세황제가 된 막내아들 호해만 빼놓고.  그러고보면 좋은 유전자와 엄청난 운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그 기운을 대대손손 더 길게 전해주지 못 한 진시황의 치명적이자 유일한 패인은 바로 사랑에 눈이 멀어 자식의 그릇 크기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 한 어리석음이었다고 할까..  또는 망국에 대한 아쉬움이겠지만, 기대를 품을 수 있는 황손이었는데 이미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진 국세 탓에 결국 황위 근처에도 못 가보고 이역땅에서 숨진 조선조의 마지막 황태자 이우라든가. - 사족이긴 하나 조선의 모든 왕손들은 이름이 외자였단 점.  아마 지고지순한 최고권력의 왕의 자손들에게 돌림자란 것을 부여하여 다른 왕족들과 같은 항렬에 넣는 것이 불손한 일이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최근에  자치통감에서 접하고 뇌리에 선명하게 남은 後唐의 莊宗 이존욱이 어쩌면 섭국의 마지막 제왕, 단문의 현실 속 모델이었는지 모르겠다.

 

 

한 때는 황족의 가장 어린아이였던 단백, 권력을 탐하는 이들에 의하여 선왕의 뜻에 반하여 제왕으로 선택된 단백, 꼭두각시로 매일매일을 보내며 무료함에 놀이에 더 치중하게 되는 단백, 마음을 터놓을 이가 없어 환관과 가깝게 지내며 오히려 그를 통해 진정한 충신을 얻게되는 단백, 모자란 능력으로 결국 원래 제위계승자였던 이복형에게 쫓겨나며 자신의 무능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단백, 세상 속에 홀로 나섰을 때 그 실상에 잘 적응하지 못 하나 결국 가장 원하는 것을 찾아가는 단백, 망국의 순간에 가진 모든 동료들을 다 잃어버리는 슬픔을 맛보는 단백, 그리고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잃어버리고 또한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고 홀로 과거의 스승을 찾아서 깊은 산중에 최후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단백.  한 사람의 일생으로 부귀영화부터 노숙하는 최하층까지 두루 섭렵하는 모습을 따라 함께 걸어가다보니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씁쓸함과 연민의 정이 몰려온다.  주변인들의 욕심에 의해 그가 선택되지 않았다면, 그의 일생과 그 나라의 미래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先王의 막내아들이자 現王의 막내동생으로 왕족으로 편하게 떵떵거리며 좋아하는 놀이나 하며 藩王으로 임명되어 어디 지방의 작은 지역 하나를 차지하고 편하고 평범하게 살아갔다면, 그리고 그의 재위기간 동안 위기 속에 점차 국력이 약해진 나라 대신 아직은 자주방어가 가능한 나라인 상태에서 유능한 그의 형이 왕이 되었다면, 그 많은 왕족들이 자결하고 칼에 찔리고 참수당함으로 삶을 마감하고, 또 그 나라가 그렇게 숱한 백성들의 시신을 넘고 불타오르는 검은 연기들을 넘어서야 하늘이 보이는 비극의 현장이 되었을까.  진시황과 2세황제의 폭정을 못 이겨 결국 난을 일으키며 외친 진승의 일성, "왕후장상에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는가?"라는 물음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한 세상이 뒤엎어지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피와 희생이 있어야하니 이왕이면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있는 씨에게 처음부터 물려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역사서를 접할 때마다 되풀이하는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소설이지만 꼭 소설만 같지는 않은, 그래서 더 안타까우면서도 괜히 이런저런 생각에 더 잠기게 한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숫타니파타 (미니북) - 불교 최초의 경전
법정(法頂) 지음 / 이레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꽤 오래 전 공지영작가의 소설로 이 제목을 접한 적이 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 소설은 공지영작가의 작품으로 처음 접해본 것이었는데 너무나 현실적인 내용에 아직도 소설의 인상이 강하게 남아있다.  그 덕분에 위 제목도 기억에 오래 남았었다, 정말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주고 싶은, 아니 줄 수 밖에 없는 적절한 조언이라 생각하며.  그리고 나중에 알았다, 그 제목의 불교의 이 경전에서 나온 글귀란 것을.  

 

그 때 이 경전을 찾아서 읽어봤을 때는 그렇게 글귀 하나하나가 마음에 남지 않았다.  이제 이 나이가 되어 다시 찾아들고 읽어보니 문구 하나하나가 각각 10년의 세월만큼의 깊이를 담고 다가온다.  그 때 미리 알았더라면 그래서 이해했더라면 지금의 나보다 조금은 더 여유롭고 조금은 더 배려하며 조금은 더  성숙한 모습이었을까.

 

 

[무소의 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폭력을 쓰지 말고, 살아 있는 그 어느 것도 괴롭히지 말며, 또 자녀를 갖고자 하지도 말라. 하물며 친구이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만남이 깊어지면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고통이 따르는 법. 사랑으로부터 근심 걱정이 생기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친구를 좋아한 나머지 마음이 거기 얽매이게 되면 본래의 뜻을 잃는다. 가까이 사귀면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자식이나 아내에 대한 집착은 마치 가지가 무성한 대나무가 서로 엉켜 있는 것과 같다. 죽순이 다른 것에 달라 붙지 않도록,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묶여 있지 않는 사슴이 숲속에서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동행이 있으면 쉬거나 가거나 섰거나 또는 여행하는 데도 항상 간섭을 받게 된다. 남들이 원치 않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동행이 있으면 유희와 환락이 따른다. 또 그들에 대한 애정은 깊어만 간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싫다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사방으로 돌아다니지 말고, 남을 해치려 들지 말고, 무엇이든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온갖 고난을 이겨 두려움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출가한 처지에 아직도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출가하지 않고 집에서 수행하는 재가자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흔히 있다. 남의 자녀에게 집착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잎이 진 코빌라라 나무처럼, 재가 수행자의 표적을 없애버리고 집안의 굴레를 벗어나 용기 있는 이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만일 그대가 지혜롭고 성실하고 예의 바르고 현명한 동반자를 얻었다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리니, 기쁜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그와 함께 가라.

그러나 만일 그대가 지혜롭고 성실하고 예의 바르고 현명한 동반자를 얻지 못했다면 마치 왕이 정복했던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우리는 친구를 얻는 행복을 바란다. 자기보다 뛰어나거나 대등한 친구는 가까이 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친구를 만나지 못할 때는 허물을 짓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금세공이 잘 만들어 낸 두 개의 황금 팔찌가 한 팔에서 서로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와 같이,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잔소리와 말다툼이 일어나리라.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살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욕망은 실로 그 빛깔이 곱고 감미로우며 우리를 즐겁게 한다. 그러나 한편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마음을 어지럽힌다. 욕망의 대상에는 이러한 근심 걱정이 있는 것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것이 내게는 재앙이고 종기이고 화이며, 질병이고 화살이고 공포이다. 이렇듯 모든 욕망의 대상에는 그와 같은 두려움이 있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마치 어깨가 떡 벌어진 얼룩 코끼리가 그 무리를 떠나 자유로이 숲 속을 거닐듯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탐내지 말고 속이지 말며, 갈망하지 말고 남의 덕을 가리지도 말며, 혼탁과 미혹을 버리고 세상의 온갖 집착에서 벗어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그릇되고 굽은 것에 사로잡힌 나쁜 친구를 멀리하라.  탐욕에 빠져 게으른 사람을 가까이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널리 배워 진리를 아는, 생각이 깊고 현명한 친구를 가까이하라.  그것이 이익이 됨을 알고 의심을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이것은 집착이구나. 이곳에는 즐거움도 상쾌함도 적고 괴로움 뿐이다.  이것은 고기를 낚는 낚시구나.' 이와 같이 깨닫고, 지혜로운 자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물속의 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한번 불타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최고의 목표에 이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마음의 안일함을 물리치고 수행에 게으르지 말며, 부지런히 정진하여 몸의 힘과 지혜의 힘을 갖추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홀로 앉아 명상하고 모든 일에 항상 이치와 법도에 맞도록 행동하며 살아가는데 있어서 무엇이 근심인지 똑똑히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집착을 없애는 일에 게으르지 말고, 벙어리도 되지 말라.  학문을 닦고 마음을 안정시켜 이치를 분명히 알며, 자제하고 노력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빨이 억세고 뭇짐승의 왕인 사자가 다른 짐승을 제압하듯이, 궁핍하고 외딴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자비와 고요와 동정과 해탈과 기쁨을 적당한 때에 따라 익히고, 모든 세상을 저버림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탐욕과 혐오와 헤맴을 버리고, 속박을 끊고, 목숨을 잃어도 두려워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친구를 사귀고 또한 남에게 봉사한다.  오늘 당장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그런 사람은 보기 드물다.  자신의 이익만을 아는 사람은 추하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읽다보니 최근 내가 깊이 분을 품게 되었던 일이 실은 매우 작은 일이었고, 내가 귀히 여기는 사람들이 실은 많은 생명체들 중 극히 일부이며, 내가 근심하는 인간관계가 실은 그럴 정도의 가치가 없고, 결국 우리 모두는 각각 이 우주를 이뤄나가는 유기물들임과 동시에 그 안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큰 공동체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내가 오늘 하루 살아가며 겪는 작은 일들 중에 화내고 깊이 상심하고 걱정할 만한 정도의 일들이 과연 있기는 할까.  따지고보면 다 흘러가는 일들이고 또 흘려보내면 그만인 일들인데, 마음이 생각만큼 쉽게 정리되고 자리잡지 못 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

 

[자비]

...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지키듯이,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발하라.

 

또한 온 세계에 대해서 무한한 자비를 행하라.  위로 아래로 옆으로, 장애도 원한도 적의도 없는 자비를 행하라.

 

서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앉아있을 때나 누워서 잠들지 않는 한, 이 자비심을 굳게 가지라.  이 세상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신성한 경지라 부른다.

 

온갖 빗나간 생각에 흔들리지 말고, 계율을 지키고 지혜를 갖추어 모든 욕망에 대한 집착을 버린 사람은 다시는 인간의 모태에 드는 일이 없을 것이다.

 

---------------------------

 

나 역시 외아들을 키우고 있는 어미가 되어있다 보니 이제서야 저 위의 글귀가 실천하기에 얼마나 어렵고 가열찬 것인지 알겠다.  자비란 것이, 사랑이란 것이 그렇게 치열한 것이었구나.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고자 "노력하는" 이가 조금이라도 더 많아질 수만 있다면..  요즘처럼 하루가 멀다하고 강력사건과 테러위협이 난무하는 세상이 조금은 더 편해지고 조금은 더 살기 좋은 곳이 될 텐데.  결국 모두가 원하는 세상은 서로 아끼고 양보하고 배려하며 더불어 행복한 곳일 텐데 말이다.  요즘의 폭력적인 세태가 목적의 잘못된 인지인지 아니면 과정의 잘못된 발현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아들과 그의 세대가 살아갈 세상은 이보다는 더 평화롭고 더 자애로우며 더 아름다운 곳이 되어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 누리의 생명체와 사물 위에 사랑과 자비가 눈송이처럼 내려서 덮여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 그러려면 우선은 나부터 노력해야겠다, 외아들을 키우는 어미의 마음으로.

 

 

[그런데 한가지, 문득 든 생각.  현재 망명 중인 달라이 라마는 이번 생이 끝나면 더 이상 환생하지 않겠다며 자신의 사후 다음 달라이 라마를 찾지 말라고 공언했다.  활불이라 일컬이지며 몇 천년에 걸친 꾸준한 환생을 통해 濟生의 목적이 뚜렷했던 그의 노력은, 중국의 조직적인 정치적 탄압과 국제사회의 물질공세로 인해 생명에 대한 더 이상의 자비를 잃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영적 노력이 오히려 정쟁의 한 방편으로 활용하는 모습에, 어리석은 중생들에 대한 더 큰 사랑으로 그 판에서 빠져주기 위한 과감한 결단이었을까.  그 결단이 어느 쪽이었든 결코 이 곳에 대한 포기는 아니었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치통감 29 - 오대후량시대 자치통감 29
사마광 지음, 권중달 옮김 / 도서출판 삼화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중1 때 김용의 영웅문을 읽고 중국문화에 덮인 중국역사물에 폭 빠지기 시작했더랬다.  그러다보니 실존인물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사마천의 사기를 처음 간략본으로 읽고나서 천여년의 시공을 넘어 그 인물들과 사건들이 마치 실사같이 묘사되어 나온 일화들에 '이런 세상이 있었나'하고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마천의 사기 원본은 하나라도 그에 대한 역서는 다양하고, 원서도 간략본 한 권으로 추략되기에는 실로 방대한 양이란 것을 알고 또 다양한 역자들의 책으로 참 많이도 읽어봤다.  이제는 갖가지 제목으로 얼굴만 바꿔서 나온(하기사 역자들의 수준에 따라서 내용물도 마구 바뀌기는 하더라) <사기>역본들에 더 이상 흥미를 가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현대의 중국인사학자들의 역작물들에 대한 번역서들을 찾아읽으며 때로는 감탄하고 때로는 그 졸저에 대해 황당해하며(하긴 그 원서가 졸작인지 아니면 번역물이 졸작인지는 한문에 까막눈인 내가 판단할 일은 아니지만), 흘러흘러 몇 권은 훗날 아이에게 물려주기 위해 소장품으로 놔두고 나머지는 다 중고서적으로 팔았었더랬다.  그러면서 매번 느낀 것은 번역자들의 수준이랄까...  이왕이면 앞으로 이런 책들은 가능하면 배경지식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고차원의 언어유희에 능숙할 정도로 인문학에 밝은 견해와, 가을날 숲길을 산책하는 나그네의 머리 위로 뜬금없이 툭! 떨어지는 밤톨같은 깨방정 따위는 없는 진지한 문학자 또는 사학자가 번역한 번역서로 접해보고 싶다는 소원이 몽글몽글 솟아올랐었더랬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알라딘 사이트에서 역사물들을 검색하며 역자들의 면면을 읽어가던 차에 권중달 교수에 대한 평을 읽었다.  권중달 교수의 역서라면 두 말 하지 않고 찾아 읽어도 된다는 무한신뢰의 글들을...  나름 궁금해져서 이미 교단에서는 은퇴하셨으나 학계의 원로학자로 활동 중인 그 분이 평소에 출간해둔 역서가 뭐가 있을까 하고 검색해보니 <자치통감> 군단이 나타났다.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시절 스쳐지나간 세계사 책 속에서 흘낏 나온 뒤 사라진, 자치통감의 원저자인 "사마광"이란 이름은 내게는 그다지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 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 동안 자치통감이란 책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었는데, 얼마 전 케이블방송에서 본 "위황후"라는 중국드라마를 통해서 한무제와 위황후, 그리고 미천한 가문 출신으로 지켜줄 세력이 모두 스러진 뒤에는 필연적으로 정쟁에 희생되어 자살로 마감해야했던 위황후와 그녀의 유일한 아들이자 한무제의 장남이었던 여태자 집안, 결국 너무 장수한 황제에 (또는 위황후의 입장에서는 본인이 너무 오래 살아서) 가려 안타깝게 죽은 壯年의 태자와 그로 인해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한나라의 모습에 관심을 갖게 된 차라 "한무제의 전후"시기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검색했었다.  그랬더니 웬 걸.. 이 책에 기술된 역사가 전국시대로부터 秦-한-삼국시대-남북조-수-당-오대십국시대를 거쳐 무려 일천년을 넘는 세월동안 16개왕조를 담고 있었고 권중달 교수의 역서로만 총32권, 총서로 살 경우 80만원이 넘는 대단한 역작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사마광의 생애를 보면 1019년에 태어나 1086년에 사망하였다니 지금으로부터 또 근 천년 전의 인물인데, 모든 것이 미흡한 그 시대에 어떻게 그 과거의 일들을 각국의 흩어진 역사사료들을 모아 꼼꼼히 다 기록하였으며 그렇게 기록된 책들이 다시 그 엄청난 시대적 변화를 거쳐서 또다시 천년을 살아남아 엉뚱한 나라(? 뭐 중국인 입장에서는..)의 뜬금없는 사람인(사마광이 처음 이 대작을 기술한 목적이 당시 입조하던 송나라의 황제를 위하여 국가경영기술을 깨우치게 해주기 위해서였다니) 내가 읽게 된 것인지, 읽어나가면서도 스스로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차피 다 살 수는 없고 또 그렇게까지 읽을 것 같지는 않아서 몇 권만 흥미위주로 골라서 읽어보자는 생각으로 목차들을 검색해서 이왕이면 피바람이 난무했던 한말 이후나 당말 이후의 난세대 위주로 한두권씩 사보았다.  읽다보면 "이 사람 왜 이래?"하다가 그 앞권을 사보게 되고, 또는 "이 사람이 그 뒤에 어떻게 되었지?"하다보니 그 뒷권을 사보게 되고 해서 결과적으로 현재까지 10권을 모으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낱권으로 사서 살살 모으는 것이 그래도 총서로 한 번에 구매하는 것보다 더 쌀 수 있다는 계산법이다..)  그렇게 읽다보니, 싸구려 감상 중 하나는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더니.."이긴 했다.  단순히 일국의 왕이나 군주 정도가 아니라 소소하게 반란을 일으켰거나 나라를 망하게 한 간신들, 그 간신을 해치움으로써 또다시 권신으로 등극했다가 다시 다른 누군가에게 철퇴를 맞고 - 상징적 표현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실제 일어나기도 한 공격이었다- 사라져가는 소소한 인물들의 실상이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히 얽히고 섥혀서 소설보다 더한 재미로 다가왔다.  그러다보면 처음에는 황당하다며 실소를 금할 수 없게 했던 반란군주 중에는 앞뒤의 사정을 찾아 읽다보면 이해하게 되는 인물들이 나온다.  또 개중에는 참 괜찮은 군왕이 될 수 있었는데(또는 조금은 더 오래 그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게 목숨과 나라를 다 빼앗기는 군주들도 나온다.  그 중에서 특히 의 莊宗 이존욱의 경우가 가장 아쉽고 기억에 남는지라 한달에 걸쳐 사서 모은 자치통감 역서들 중 이 29권을 특별히 꼽아보게 되었다.

 

 

순간의 판단이 一身의 멸망 정도가 아니라 一族의 誅殺을 초래할 수 있고 (이걸 자치통감에서는 간단하게 族誅라고 표현하더라) 그 아래 수많은 백성들의 流離乞食과 한 城의 초토화는 기본이었던 그 시대에, 노회하고 음흉하고 순간판단력이 뛰어나며 결단력이 있어야만 그나마 자신의 1세대는 지켜낼 수 있었던 때에 상대적으로 어린 약관 정도의 나이에 父王의 죽음으로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왕위를 이어받은 이존욱은 10여 년을 솔선하여 전쟁터를 누비며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 주변국을 정벌하며 百尺竿頭에서 살아남고 조금씩 통일해나간다.  을 멸망시킨 후 드디어 國名을 唐을 잇는다하며 稱帝한 것까지는 좋은데(역사에서는 이 나라를 唐이라 한단다), 사람이 이룬 뒤에 수성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했던가... 고락을 함께 한 군신들을 무시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이룬 일이라 하여 그 때부터 매일 연회와 수렵으로 주위를 안 돌아보고, 또 내실을 기하기보다는 천하통일에 대한 야심이 컸었나(그래봐야 진시황의 시대와는 달랐던 것이 이때는 한참 거란이 팽창하던 시기라 그가 겨뤄야 할 세력은 그 당대에 해결될 수준도 아니었다) 또다른 강국인 후촉을 공격하다가 결국 불만을 품은 세력들의 반란으로 피난하던 차에 벌어진 격렬한 전투 속에 화살을 맞고 죽고만다.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긴 10여 년의 전쟁을 끝으로 황제로 오른지 불과 4년 만, 칭제한 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하여 과거의 고락을 함께 한 동료들을 다 잊고 한 때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던 삶의 허무한 결말이었다.  이 때가 만 42세.  

 

혼자만의 비명횡사라면 그나마 덜 억울할 텐데 난리통에 그의 후계자는 또 다른 곳에서 자결하고 그의 다른 어린 아들들은 그 후로 결코 생사조차 파악되지 않은 상태로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결국 그 나라는 통채로 다른 장군에게 넘어간다.  그런데 사실 그 장군은 그리 하고싶어 일으킨 반란이 아니라 조정의 조여오는 의심과 온갖 권신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과정에서 '이대로라면 족멸당하여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차라리 선수를 쳐서 살아남을 것인가'의 기로에서 강요된 선택에 따른 부산물에 불과했단 것도 안타깝다.  그런데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하나..  그렇게 장종(이존욱의 사후 묘호)에게서 결과적으로 나라를 찬탈하게 된 이사원(사후 묘호 명종)은 또 장종이 그러했던 것처럼 권신에게 휘둘려 권력의 분산을 겪게 되고 역시 그의 사후에는 또 다른 장군인 석경당에게 그 나라를 빼앗기게 된다. - 그리고 석경당도 사실 그 제위가 탐나 일으킨 반란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세태에 따르다보니 결국 제위찬탈이 되더라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전쟁터를 넘나들며 항상 검과 창을 휘둘렀을 테니 보통 생각하는 나약하고 비대한 군주는 분명 아니었다.  황제로 즉위한 후에도 手拍을 통해 측근장군과 함께 무예를 겨루고 生母와 嫡母에 대한 예의가 지극하였다는 것을 봐서는 심신이 다 무뎌진 군왕도 아니었다.  하지만 교만함은 일신을 망하게 하였고 당시 시대적 특성 상 그 가문을 통채로 지구 상에서 말살하게해버린 것에는 결코 예외가 없었다는 점은 역시 역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귀한 교훈이기도 하다.  장종의 팬(?) 입장에서 그나마 다행이라 한다면..  JFK 주니어가 사고사를 당했을 때 사람들이 그의 어머니가 먼저 사망해서 그 아들의 비극적인 죽음을 못 본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 했던 것과 같은 점이랄까.

 

 

한 가지 목적을 향해 뜻을 모아 열심히 다같이 노력했는데 그것이 일단 이뤄지고 나면 그렇게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과거지사가 되고 기억 속에 추억으로서도 가치가 없는 수준이 되는 것일까?  일단 권력의 중점에 서고나면 그 떡고물들을 노리고 주변인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또 어디선가는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또 누군가는 음모를 꾸미고.  창과 칼만 안 들었다 뿐이지 인간사회가 있는 곳이라면 현재까지도 똑같이 되풀이되고 있는 권력층(그게 정치판이든 기업 내 암투이든)의 생태는 참 놀라울 따름이다.  그래서 모택동이 중국의 赤化統一을 위해 시간이 부족한 때에도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밤잠을 쪼개가면서까지 탐독했었나 보다.  知彼知己白戰不殆라고, 인간의 본성이 그러하다면 어차피 그 판 안에서 놀 바에야 그 생리에 누구보다 정통한 자가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될 테니까.(모택동을 보면 그 판단이 맞기도 했고.)

 

그래도 이 책 내용 중 우리나라의 일부 재계나 정치계의 인물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부분은, 험난한 시대였을수록 후계자를 고를 때 각국의 그나마 현명한 군주들은 꼭 자기 핏줄에만 연연하지는 않고 오히려 각 후보자의 재능을 깊이 고려했다는 점이다.  전쟁통에 주운 고아를 양자로 들여 키우고 그가 훗날 후계자가 되기도 하고, 또는 아끼는 장수에게 자신의 姓을 하사하여 가족으로 만들고 親子들과 함께 동등한 대우로 - 함께 親王으로 책봉해준다든가- 나라를 지키는데 활용하기도 함으로써 그 어지러운 난세에 나라의 수명을 좀 더 길게 유지하려 노력했다든가.  그와 달리 현대의 몇몇은 자녀의 무능함에 상관없이 단순히 자기 유전자를 이어받았단 이유 하나만으로 멀쩡한 회사를(그것도 주식회사를!) 물려줬다가 家業이기도 했던 기업체를 통채로 공중분해 해버리게 했다든가, 그 아버지가 정치판에서 이름이 있었다고 그 뒤를 이어 한 번 뛰어볼까 하며 슬쩍 숟가락을 얹고 보려 애쓰는 몇몇 2세들 등등, 그것이 결코 선대의 업적을 위하는 길이 아니란 것을 그들도 조금은 알아야하지 않을까.

 

 

읽다보니 새삼 아쉽게 느껴지는 점은, 어디 이런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요즘 한참 유행하는 히어로물보다 더 놀라운 인간드라마가 꼭 남의 나라에만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한국의 국사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나는 남침을 잊지말자는 의미로 6.25전쟁이라 부르지만 공식명칭은 "한국전쟁"이라 한댄다) 시기를 거쳐 현재의 한반도 상황 상 위아래 두 나라가 과거문물에 대한 조사와 유지에 대해 협조하지 못 하는 반세기를 거쳐 이미 많이 유실되고 왜곡되어, 많은 부분이 후세대에 제대로-아니 거의- 전달되지 못 하고 있는 현 상황을 돌아보면 아쉽기만 하다.  언젠가는 이념과 사상을 떠나서 학문에만 정통한 이들이 모여서 학자로서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며 함께 연구를 해나갈 수 있는 성숙한 분위기가 한반도 위에도 형성될 수 있기를 바란다.

 

 

여하튼..  이런저런 걸 다 떠나서, 이런 쫄깃쫄깃한 책을 편안한 모국어로 읽게 해주는 국가별 또는 문화별로 포진한 우리나라의 저명한 학자들의 노고에 정말 감사하다.  또 한 편으로는, 이런 훌륭한 학자들이 비용이나 기타 출판계 사정에 상관없이 이런 귀한 譯書들을 부족함없이 출간할 수 있는 여건이 되면 좋겠다.  일전에 조선왕조의 승정원기록을 한글로 완역하는데 거의 30년 계획으로 해오는 과정에 곧 그 끝이 보인다는 대단한 내용을 기사로 읽은 적이 있다.  아무리 얍삽한 세태에 휘둘리는 세상이 되었다고 해도, 이렇게 묵묵히 내공을 기울여 한가지 우물을 오롯이 파고 후대에 전달해주는 학자들이 있는 한 그 사회는 아직 희망이 있는 사회란 것이 내 믿음이요 오늘의 소박한 위안이다.

 

중국역사, 오호십국시대, 진왕 이존욱, 후당 장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집어들었었다.  레고센터에 가고 싶단 아이의 말에 주말반을 등록해주고나니 수업시간이 70분이란 말에 그냥 앉아있기엔 지루할 테니 싶어 지난 토요일 아침 급히 집을 나서며 손에 잡히는 대로 대충 들고나간 책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이가 들어가고 난 뒤 방문객 코너에 앉아서 대충 다리를 꼬고 앉아서 읽기 시작한 내 자세가 정좌로 고쳐지며 집중해서 읽는 자세로 변한 건 금방이었다.  아니, '이런 류의 책은 전에도 접해본 적이 있지' 싶은 가벼운 마음에 철퇴를 내리치며 다가오는 내용의 묵직함에 자세를 바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지고보면 이제는 나도 오랜 만에 친구들과 모이면 부모님들은 건강하신지와 주변에 아픈 사람은 없는지를 확인하는 나이가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의 근황이, 요즘 어디에서 뭐한다더라가 아니라 어디 다치거나 아프신 곳은 없는지가 더 어울리는 관심사가 된지도 벌써 몇 년째다.  가까운 친인척 중에 30대 1명과 60대 2명 등 이미 암으로 세상을 등진 이들도 있고 지금은 구순의 나이를 넘기셔서 정신은 맑아도 몸의 기력이 급전직하하여 하루하루 그냥 살아내는 것 자체가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분도 계시다.  그리고 뵐 때마다 예전과 같지 않은 체력으로 부모님의 연로함과 노쇠함이 눈에 띌 때마다 그냥 못 본 척 눈길을 돌려버리는 내 자신이 있다.  그러고보면 우리 모두가 피할 길 없이 당연히 가야하는 길인데 그저 모르는 척 못 본 척 못 들은 척 하며 지내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전에 어디서인가 실험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30대의 건장한 남녀에게 70대 노인이 되는 기분을 느껴볼 수 있게 수치로 환산한 내용을 추로 바꿔서, 조끼를 입게 하고 발목에 추를 달고 무릎에 두꺼운 것을 대서 전체적으로 몸을 무겁게 만들고 관절의 자유를 빼앗은 상태에서 지하철로 특정지역까지 이동하는 미션을 수행하게 한 실험이었다.  실험을 마친 뒤의 소회에 이구동성으로 나온 공통점은, 젊은이로 살아갈 때는 그다지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수준의 일상생활인데 노인으로서의 신체적 조건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길을 나서보니 엄청난 노력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고난이도의 모험 그 자체였다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별 생각없이 훌쩍 건너간 작은 틈이 발목을 접지르게 할 위험한 장애물이 되었고, 그다지 높아보이지 않는 낮은 턱은 오르기 전에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도전의식을 갖고 올라가야하는 고지로 변했고, 옆으로 휙휙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속도는 안전의 위협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으며, 눈 앞에서 미련없이 닫히는 문들과 그 안에서 부대끼는 청장년들의 무응대에서 느껴지는 무관심은 자신들의 생명에 대한 공포를 느끼기에 충분했다고. 

 

 

 

이제 총선을 앞두고 투표소를 향할 젊은 표심을 잡고자 나름 성공해서 뽑혀 나온 40대 초선용 예비후보들 중 한 명은 엊그제 이런 말을 했었다.  "꼰대들의 정치에 신물난 이들을 위해 나섰다, 그냥 두고보고 있는게 비겁하니까" 젊은 투사로 나섰단다.  이 나라에서 언제부터 "기성인=꼰대=중장년층을 걸친 노년층 전부"라고 동의어로 읽히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치관의 차이와 사상의 차이는 사실은 나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란 점을 간과하면서부터 우리는 주변의 노년들이 보내고 있는 현재와 내가 보내게 될 노년의 미래를 너무 무시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이민2세대로 저명한 외과의로 미국에서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저자는 말한다, 국가가 발전하며 죽음을 대하는 의료행위의 변화는 단순한 치료목적에서 삶의 품위를 유지하는 최선을 찾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하긴 그런 부분에 있어서 많이 깨어있는 미국조차도 그런 운동이 수면 위로 올라와서 실생활에 접목되는 현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10년 경부터라니, 개도국의 끝자락에서 앞으로는 위로 더 올라갈지 아니면 밑으로 굴러떨어질지 몰라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 대한민국의 인생들에게는 아직 너무 사치스러운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삶들도 '그저 살아내기 위해서 살던 삶'에서 발전해서 '조금은 살아보기 위해서 사는 삶'까지 갔으니까, 이제는 '살아갈 가치가 있기에 살아보는 삶'으로 나아갈 때가 되지 않았을까.  열심히 살아온 결과가 그저 신분증 상의 수치인 나이로 일률적으로 '꼰대=사회발전의 저해요인=세금의 낭비로 계산되는 잉여인생'이 아닌, 여태 살아온 그 삶 자체로 인정받고 대접받을 수 있는 그런 노년 말이다.  그 노년의 끝이 요즘 만연한 일반적 요양원에서의 직원의 마음에 안 들면 휠체어에 앉아 무릎 정도는 걷어차여도 되는 그런 삶이 아니라,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을 때 재산 다 탕진해서라도 어디 버텨보자는 병상에서의 전투적인 마감이 아니라, 그 삶의 마무리를 가족이/주변인들이/지역사회가/국가가 함께 지켜봐줄 수 있는 그런 의료시스템 말이다.  하긴, 이 나라에서 그런 의료시스템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우선 개개인의 생각의 틀이 달라져야할 테고, 그 중에서도 모든 것을 그저 이분법 논리로 '아군 아니면 적'이라는 식으로 단순도식에 빠져 허우적대는 정치인들이 가장 크게 달라져야하긴 하다.  결국 거둬간 세금을 자기네 표밭에 허식으로 뿌려대고 정작 필요한 곳에는 쓸 돈이 없어 국민들을 더 쥐어짜야한다고 얘기하며 선정적인 어투로 투표권자들을 자극하는 그들이 지금처럼 총천연색으로 여의도꽃밭에 만연하는 한, 한국에서의 삶의 질과 의미있는 마무리에 대한 논의가 이뤄질 수 있겠는가 싶기도 하다.

 

이에 대한 좋은 대조로, 저자는 1908년 하버드대의 철학자 조시아 로이스교수가 편 책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죽음을 의미없는 것으로 느끼지 않게 할 유일한 길은 자신을 가족, 공동체, 사회 등 더 큰 무언가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다....그러나 더 큰 무언가의 일부라는 믿음이 있다면, 죽음이 단지 끔찍한 공포로만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로이스는 말한다... [우리 밖에 전력을 다해야 할 대의가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 안에 그 일을 기꺼이 해내고자 하는 의지, 그 일을 하면서 좌절하고 꺽이는 것이 아니라 더 풍부해지고 더 스스로를 드러내는 의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말이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자신이 남기고 갈 것에 대해 더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산다는 것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느끼도록 해주는 목적을 우리 밖에서 찾고자하는 깊은 욕구를 가지게 된다."

 

 

 

아이가 내년이면 초등학교 입학할 것이기 때문에 올해 마지막으로 남은 유치원에서의 1년을 어떻게 채워나가야할지 부산을 떨며 이런저런 책들을 사봤다.  아이의 국어실력과 수학은 어떻게 하고 등등 참으로 디테일한 내용들의 책들이 엄청난 수로 검색되었었다.  그런데 그런 책들을 몇 권 사서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잔가지들의 나무결들만 들여다보느라 큰 틀을 보는 것은 잊어버렸었나 보다.  생각해보면, 이 아이가 학교생활을 잘 적응하길 바라는 이유는 단 하나, 훗날 이 아이가 자라나서 이 둥지를 떠나갈 때 자기 힘으로 훨훨 날아가기를 원해서이다.  그리고 이 아이가 날아가서 새롭게 정착할 그 사회는 내가 살아온 사회보다 더 합리적이고 질서가 있으며 어떤 일을 행했을 때 그 결과에 대한 당연한 예측과 신뢰가 가능한 사회이길 바란다.  그리고 이 아이가 그 사회에서 한 사람의 몫을 해내며 그 사회가 그 후세대에게 좀 더 좋은 사회로 전달되어지는데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나의 사랑하는 어린 아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한 사람의 남자로, 사회인으로, 인간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생명체로, 자신의 삶을 돌아봤을 때 가슴뛰는 즐거움과 미소로 돌아볼 수 있는 추억, 그리고 온 몸을 적시는 행복을 맛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내가 지금 읽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제목 그대로, 죽어갈 때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모습으로 여생을 대하고 어떻게 떠나갈 것인지 준비하는 그 과정 또한 중요한 것이란 것을 깨닫게 해준다.

 

 

이제 막 세상에 첫 발을 내딛으려는 만 5.5세 꼬마의 삶의 무게는 90을 넘긴 노인의 삶의 무게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다.  마찬가지로, 90을 넘겨 앞으로는 침상생활이 전부인 노인의 남은 시간의 가치는 이제 세상을 떠맡아가기 위해 자라나고 있는 5.5세 꼬마의 시간의 가치보다 결코 덜하지 않다.  하나의 인생은 그냥 쏘아놓은 화살처럼 앞으로만 달려가는 인생인 것 같지만 인간이란 사회적 동물이란 점을 감안할 때, 결국 그런 여러 인생들이 서로 실타래처럼 꼬여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 아이를 키우면서 더 멀리 더 넓게 보며 아이가 성장하는데 최선의 도움을 주는 부모가 될 수 있기를 기원했던 그 초심을 잃지 말고..  주변의 노년들의 모습을 "어쩌겠어"하는 마음으로 못 본 척 못 들은 척 무심하게 넘기지 말고..  내가 갈 길이니까 또 내 아이가 걸어갈 길이니까 나부터 다시 한 번 내 자신을 돌아보며 진지하게 생각해봐야겠다.

 

 

 

횡설수설했지만.. 책의 내용은 사실 단순한 호스피스 관련 서적이라 생각하고 읽기 시작한 상태에서, 누구나 언젠가는 마주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여과없이 직면하게 해줌으로써 실은 모든 사람들의 개개인이 지닐 수 밖에 없는 고유의 가치와 삶의 무게를 자각하게 해주는 책이란 걸 알게 되니 이 책이 지닌 깊이를 내가 단순하게 요약하겠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 셈이다.  어찌보면 이 책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은 그 뒷표지에 이미 나와있는지 모른다:

 

"이 책은 때로 눈물짓게 만들고, 때로 분노하게 만들며,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든다.  너무나 다루기 어려운 문제를 성찰하도록 촉발시킨 보기 드문 역작이다."

[네이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