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집어들었었다.  레고센터에 가고 싶단 아이의 말에 주말반을 등록해주고나니 수업시간이 70분이란 말에 그냥 앉아있기엔 지루할 테니 싶어 지난 토요일 아침 급히 집을 나서며 손에 잡히는 대로 대충 들고나간 책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이가 들어가고 난 뒤 방문객 코너에 앉아서 대충 다리를 꼬고 앉아서 읽기 시작한 내 자세가 정좌로 고쳐지며 집중해서 읽는 자세로 변한 건 금방이었다.  아니, '이런 류의 책은 전에도 접해본 적이 있지' 싶은 가벼운 마음에 철퇴를 내리치며 다가오는 내용의 묵직함에 자세를 바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지고보면 이제는 나도 오랜 만에 친구들과 모이면 부모님들은 건강하신지와 주변에 아픈 사람은 없는지를 확인하는 나이가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의 근황이, 요즘 어디에서 뭐한다더라가 아니라 어디 다치거나 아프신 곳은 없는지가 더 어울리는 관심사가 된지도 벌써 몇 년째다.  가까운 친인척 중에 30대 1명과 60대 2명 등 이미 암으로 세상을 등진 이들도 있고 지금은 구순의 나이를 넘기셔서 정신은 맑아도 몸의 기력이 급전직하하여 하루하루 그냥 살아내는 것 자체가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분도 계시다.  그리고 뵐 때마다 예전과 같지 않은 체력으로 부모님의 연로함과 노쇠함이 눈에 띌 때마다 그냥 못 본 척 눈길을 돌려버리는 내 자신이 있다.  그러고보면 우리 모두가 피할 길 없이 당연히 가야하는 길인데 그저 모르는 척 못 본 척 못 들은 척 하며 지내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전에 어디서인가 실험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30대의 건장한 남녀에게 70대 노인이 되는 기분을 느껴볼 수 있게 수치로 환산한 내용을 추로 바꿔서, 조끼를 입게 하고 발목에 추를 달고 무릎에 두꺼운 것을 대서 전체적으로 몸을 무겁게 만들고 관절의 자유를 빼앗은 상태에서 지하철로 특정지역까지 이동하는 미션을 수행하게 한 실험이었다.  실험을 마친 뒤의 소회에 이구동성으로 나온 공통점은, 젊은이로 살아갈 때는 그다지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수준의 일상생활인데 노인으로서의 신체적 조건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길을 나서보니 엄청난 노력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고난이도의 모험 그 자체였다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별 생각없이 훌쩍 건너간 작은 틈이 발목을 접지르게 할 위험한 장애물이 되었고, 그다지 높아보이지 않는 낮은 턱은 오르기 전에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도전의식을 갖고 올라가야하는 고지로 변했고, 옆으로 휙휙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속도는 안전의 위협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으며, 눈 앞에서 미련없이 닫히는 문들과 그 안에서 부대끼는 청장년들의 무응대에서 느껴지는 무관심은 자신들의 생명에 대한 공포를 느끼기에 충분했다고. 

 

 

 

이제 총선을 앞두고 투표소를 향할 젊은 표심을 잡고자 나름 성공해서 뽑혀 나온 40대 초선용 예비후보들 중 한 명은 엊그제 이런 말을 했었다.  "꼰대들의 정치에 신물난 이들을 위해 나섰다, 그냥 두고보고 있는게 비겁하니까" 젊은 투사로 나섰단다.  이 나라에서 언제부터 "기성인=꼰대=중장년층을 걸친 노년층 전부"라고 동의어로 읽히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치관의 차이와 사상의 차이는 사실은 나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란 점을 간과하면서부터 우리는 주변의 노년들이 보내고 있는 현재와 내가 보내게 될 노년의 미래를 너무 무시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이민2세대로 저명한 외과의로 미국에서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저자는 말한다, 국가가 발전하며 죽음을 대하는 의료행위의 변화는 단순한 치료목적에서 삶의 품위를 유지하는 최선을 찾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하긴 그런 부분에 있어서 많이 깨어있는 미국조차도 그런 운동이 수면 위로 올라와서 실생활에 접목되는 현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10년 경부터라니, 개도국의 끝자락에서 앞으로는 위로 더 올라갈지 아니면 밑으로 굴러떨어질지 몰라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 대한민국의 인생들에게는 아직 너무 사치스러운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삶들도 '그저 살아내기 위해서 살던 삶'에서 발전해서 '조금은 살아보기 위해서 사는 삶'까지 갔으니까, 이제는 '살아갈 가치가 있기에 살아보는 삶'으로 나아갈 때가 되지 않았을까.  열심히 살아온 결과가 그저 신분증 상의 수치인 나이로 일률적으로 '꼰대=사회발전의 저해요인=세금의 낭비로 계산되는 잉여인생'이 아닌, 여태 살아온 그 삶 자체로 인정받고 대접받을 수 있는 그런 노년 말이다.  그 노년의 끝이 요즘 만연한 일반적 요양원에서의 직원의 마음에 안 들면 휠체어에 앉아 무릎 정도는 걷어차여도 되는 그런 삶이 아니라,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을 때 재산 다 탕진해서라도 어디 버텨보자는 병상에서의 전투적인 마감이 아니라, 그 삶의 마무리를 가족이/주변인들이/지역사회가/국가가 함께 지켜봐줄 수 있는 그런 의료시스템 말이다.  하긴, 이 나라에서 그런 의료시스템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우선 개개인의 생각의 틀이 달라져야할 테고, 그 중에서도 모든 것을 그저 이분법 논리로 '아군 아니면 적'이라는 식으로 단순도식에 빠져 허우적대는 정치인들이 가장 크게 달라져야하긴 하다.  결국 거둬간 세금을 자기네 표밭에 허식으로 뿌려대고 정작 필요한 곳에는 쓸 돈이 없어 국민들을 더 쥐어짜야한다고 얘기하며 선정적인 어투로 투표권자들을 자극하는 그들이 지금처럼 총천연색으로 여의도꽃밭에 만연하는 한, 한국에서의 삶의 질과 의미있는 마무리에 대한 논의가 이뤄질 수 있겠는가 싶기도 하다.

 

이에 대한 좋은 대조로, 저자는 1908년 하버드대의 철학자 조시아 로이스교수가 편 책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죽음을 의미없는 것으로 느끼지 않게 할 유일한 길은 자신을 가족, 공동체, 사회 등 더 큰 무언가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다....그러나 더 큰 무언가의 일부라는 믿음이 있다면, 죽음이 단지 끔찍한 공포로만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로이스는 말한다... [우리 밖에 전력을 다해야 할 대의가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 안에 그 일을 기꺼이 해내고자 하는 의지, 그 일을 하면서 좌절하고 꺽이는 것이 아니라 더 풍부해지고 더 스스로를 드러내는 의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말이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자신이 남기고 갈 것에 대해 더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산다는 것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느끼도록 해주는 목적을 우리 밖에서 찾고자하는 깊은 욕구를 가지게 된다."

 

 

 

아이가 내년이면 초등학교 입학할 것이기 때문에 올해 마지막으로 남은 유치원에서의 1년을 어떻게 채워나가야할지 부산을 떨며 이런저런 책들을 사봤다.  아이의 국어실력과 수학은 어떻게 하고 등등 참으로 디테일한 내용들의 책들이 엄청난 수로 검색되었었다.  그런데 그런 책들을 몇 권 사서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잔가지들의 나무결들만 들여다보느라 큰 틀을 보는 것은 잊어버렸었나 보다.  생각해보면, 이 아이가 학교생활을 잘 적응하길 바라는 이유는 단 하나, 훗날 이 아이가 자라나서 이 둥지를 떠나갈 때 자기 힘으로 훨훨 날아가기를 원해서이다.  그리고 이 아이가 날아가서 새롭게 정착할 그 사회는 내가 살아온 사회보다 더 합리적이고 질서가 있으며 어떤 일을 행했을 때 그 결과에 대한 당연한 예측과 신뢰가 가능한 사회이길 바란다.  그리고 이 아이가 그 사회에서 한 사람의 몫을 해내며 그 사회가 그 후세대에게 좀 더 좋은 사회로 전달되어지는데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나의 사랑하는 어린 아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한 사람의 남자로, 사회인으로, 인간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생명체로, 자신의 삶을 돌아봤을 때 가슴뛰는 즐거움과 미소로 돌아볼 수 있는 추억, 그리고 온 몸을 적시는 행복을 맛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내가 지금 읽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제목 그대로, 죽어갈 때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모습으로 여생을 대하고 어떻게 떠나갈 것인지 준비하는 그 과정 또한 중요한 것이란 것을 깨닫게 해준다.

 

 

이제 막 세상에 첫 발을 내딛으려는 만 5.5세 꼬마의 삶의 무게는 90을 넘긴 노인의 삶의 무게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다.  마찬가지로, 90을 넘겨 앞으로는 침상생활이 전부인 노인의 남은 시간의 가치는 이제 세상을 떠맡아가기 위해 자라나고 있는 5.5세 꼬마의 시간의 가치보다 결코 덜하지 않다.  하나의 인생은 그냥 쏘아놓은 화살처럼 앞으로만 달려가는 인생인 것 같지만 인간이란 사회적 동물이란 점을 감안할 때, 결국 그런 여러 인생들이 서로 실타래처럼 꼬여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 아이를 키우면서 더 멀리 더 넓게 보며 아이가 성장하는데 최선의 도움을 주는 부모가 될 수 있기를 기원했던 그 초심을 잃지 말고..  주변의 노년들의 모습을 "어쩌겠어"하는 마음으로 못 본 척 못 들은 척 무심하게 넘기지 말고..  내가 갈 길이니까 또 내 아이가 걸어갈 길이니까 나부터 다시 한 번 내 자신을 돌아보며 진지하게 생각해봐야겠다.

 

 

 

횡설수설했지만.. 책의 내용은 사실 단순한 호스피스 관련 서적이라 생각하고 읽기 시작한 상태에서, 누구나 언젠가는 마주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여과없이 직면하게 해줌으로써 실은 모든 사람들의 개개인이 지닐 수 밖에 없는 고유의 가치와 삶의 무게를 자각하게 해주는 책이란 걸 알게 되니 이 책이 지닌 깊이를 내가 단순하게 요약하겠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 셈이다.  어찌보면 이 책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은 그 뒷표지에 이미 나와있는지 모른다:

 

"이 책은 때로 눈물짓게 만들고, 때로 분노하게 만들며,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든다.  너무나 다루기 어려운 문제를 성찰하도록 촉발시킨 보기 드문 역작이다."

[네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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