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조건 - 하버드대학교. 인간성장보고서, 그들은 어떻게 오래도록 행복했을까?
조지 E. 베일런트 지음, 이덕남 옮김, 이시형 감수 / 프런티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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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정말 '행복의 조건"이란 것이 뭔지 궁금해서 책을 들었다. 그런데 내용은 의외로 몇십년에 걸쳐서 관찰하고 검토해온 3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의 삶의 기록이자 그 삶을 관찰해온 관찰자의 의견으로, 어떻게 보면 담담하게 서술한 그래서 더 객관적인 내용이었다.   

3집단으로 나뉜 사람들은 크게 태어날 때부터 가정경제 등에 문제가 없고 본인들도 최고대학 중 하나라 일컬어지는 하버드대를 졸업한 남성으로 구성된 엘리트 집단 (학생시절 때부터 뽑은 집단에 고 JFK 대통령도 포함되어 있었다니 어떻게 보면 사람들을 선별하는 작업도 대단했던 듯), 가정의 교육환경이나 경제환경이 그다지 좋지 않고 본인들도 특출난 아이큐 등의 수재는 아닌 이너시티 집단, 그리고 본인들은 뛰어난 아이큐 소유자로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중산층 태생이나 시대적 배경 등으로 인해 (대충 1930년대 출생자들이니까 이해가 된다) 꿈을 많이 펼치지 못 했던 여성집단.. 어떻게 보면 3집단의 공통점은 별로 없지만 대신 사회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하는 사람들은 골고루 들어간 집단이라고 해야할까.. 즉 억지로 덧붙이자면 출생 당시 상/중/하로 어느 정도 나뉜 가정환경을 골고루 골라낸 것이라고 해야할까.. 그래서 그들의 삶의 족적을 그린 내용과 과정은 오히려 객관적으로 각자 개인이 나이들어가면서 발전해나가는 과정과 개인적으로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지 여부를 측정하는데 더 신빙성을 줄 수 있었던 것 같다. 

각자 나이 70-80대에 접어든 피관찰자들의 지난 세월과 면담내용으로 짧막짧막하게 구성된 내용들을 쭉 읽고 있자니,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행복의 조건/삶의 가치가 수정되어야 하는 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돈이 많을수록 편하고 즐거운 노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들의 얘기를 읽자니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대충 소일거리가 있으면 사람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자기가 소속된 community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고 나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교류하는 사람들의 노년이 더 활기차고 빛나고 있었다. 가족이야 필요하면 만나지만 서로에게 어느 정도 시간과 공간을 허용할 수 밖에 없는 현대사회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틀렸다. 서로 떨어져사는 것이 당연한 것 같기만 한 미국에서조차도, 가족과 손자들, 증손들과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고 사는 사람들이 더 행복해 보였다. 배우자는 같이 늙어가는 존재인 것이겠지 했는데 그것도 틀렸다. 사람과 함께 하는 관계는 어떻게 해나가냐에 따라서 나이에 상관없이 세월 속에서 더 빛낼 수 있고 또는 바래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가장 큰 울림은, 자신이 태어난 가정환경이나 자라온 과거가 현재 그들이 누리고 있는 행복지수에 크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란 것이다. 아니 다르게 말하면, 과거의 우울함이나 자신을 짓눌렀던 인간관계에서 헤어나오지 못 하는 사람들은 나이가 70-80대에 들어서서도 여전히 그 관계에서 나왔던 부정적 오로라에 (심지어 그 상대는 이미 세상을 떠난지 오래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짓눌려서 자신의 삶을 허비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아 그때 내가 이랬다면" 하고 과거를 돌아보고 후회하고, 누군가와 새롭게 시작할 때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아 부모님이 날 이렇게 키우셔서" 하고 남을 탓하지 않는가. 누군가보다 좀 떨어지는 것 같을 때 "내가 기회만 있었어도 너 같은 것은.."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기 보다 자신이 처한 환경을 탓하지는 않았는가.. 나는 그랬었는데, 사실 이런 태도가 오히려 내 삶을 어둡게 하고 내 미래에서 행복을 멀리하게 하는 요인이란 것을 알았을 때는 상당히 놀랐었다. 그래, 여러 책에서 "남을 탓하지 말라, 어린 시절의 상처를 직시하고 용서하라, 사랑하라" 하는 내용은 항상 관념적으로 교훈적으로 들었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냥 여러 사람들의 실생활을 조명하면서 보여준 내용인데 사실 그 말들이 실제로 운용되고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더 철퇴같이 다가온 내용이었다. 

이제부터는 나도 과거보다는 현재에 더 집중하고 감사하면서, 주변의 사람 하나 하나가 사실은 소중한 존재란 사실을 잊지 말고 살아가야겠다.  현재 인간 평균수명 80세.  앞으로는 더 늘어날 수도 있고 대충 평균수명 100세까지는 무리 없이 갈 것이란 말들도 있다.  그럼 여태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은데, 나도 행복해야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학자들조차도 당대에 못 끝내고 후대에 물려주면서 계속 자료를 쌓아가게 할 수 밖에 없는 이런 장구한 프로젝트를 가능케 한 미국정부나 관련 재단들의 기부금 정신.. 정말 부럽다, 아마 그들은 그래서 선진국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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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기도
레이첼 나오미 리멘 지음, 류해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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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멘 박사의 책을 처음 접한 것은 유학생활에 지쳐서 한글로 된 책을 접하고 싶어 인터넷으로 찾은 책 중, 레멘 박사의 책이 있었다. 책표지 가득히 채운 그녀의 온화한 백발머리의 사진은 그 책을 천천히 음미하며 정독한 뒤에야 발견할 수 있었을 정도로, 참 낡은 느낌의 회색빛 나는 그런 책이었다. 내가 그곳에서 그렇게 찾지 않았더라면 내 손에 결코 잡히지 않았을 책... 그렇게 만난 레멘 박사의 글귀 하나 하나는 참 따스하고 가슴 적시는 얘기들이었다. 예일대였었나 하버드였었나.. 어려운 의대공부를 마치고 또 다른 유수한 대학에서 소아과 전문의로 교수로 바쁘게 살아가며 느낀 일들을 조용히 적어내려간 내용 중에, 한가지 아직도 마음을 적시고 잊혀지지 않는 레멘 박사의 어린 환자 얘기가 있다. 소아암으로 결코 살아서 병동을 떠날 수 없으리라 모두 예견하던 어린 남자아이가, 어느날 간호사에게 옷장 속의 옷들을 자기 가방에 싸달라고 부탁했단다. 왜 그러냐는 질문에, 저 오늘 집에 가요라고 대답하는 그 순진한 표정에 간호사는 차마 사실을 말해주지 못 하고, 다른 젊은 의사들에게 아이의 기대를 꺽는 건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기대만 하고 있게 하는 것이 더 안 되었다고 대신 사실을 전해달라고 부탁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당시 소아과 과장이었던 레멘 박사가 들었다. 다 큰 어른들이 어린 환자에게 휘둘리며 어린 환자를 혼자 내버려뒀다는 사실에 알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직접 처리하겠다고 나선 레멘 박사 역시.. 어린 환자의 단호하고 확신에 찬 말에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단다. 그리고 그날 밤.. 그 어린 환자는 엄마 품에서 "이제 집에 가요" 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본향으로 돌아간다는 아이의 말을 잘못 알아듣고, 그 아이의 기대가 엉뚱한 것이리라는 어른들의 잣대로 오히려 아이보다 못 한 판단에 우왕좌왕했던 자신들의 모습이 부끄러워서.. 몸보다는 마음을 먼저 접하고 그 마음을 치료하는 영혼의 치료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는 레멘 박사. 그녀의 또 다른 책을 이렇게라도 우연히 접하게 된 기쁨은 정말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앞으로도 그녀의 저서들을 좀 더 많이 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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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비룡소 클래식 14
생 텍쥐페리 글 그림, 박성창 옮김 / 비룡소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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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를 접하기 전에 생텍쥐뻬리를 접한 작품은 고등학교 때 읽은 명작전에서였다. 참 진부한 내용을 억지로 쥐어짜서 쓴다는 느낌의 작가였기에, 대학에 입학한 후 전공과목의 교수님이 어린왕자를 교재로 선택하셨을 때는 하품까지 나올 정도였다. 선배들 말에 의하면, 그 교수님은 항상 어린왕자를 교재로 선택한다고 하셨으니 아마 그 교수님은 어린왕자의 팬이신가 보다 하는 정도가 다였다. 참 지겹게 들은 한 학기였다. 그렇게 나와 어린왕자와의 만남은 만 18살의 봄으로 끝났다. 그 만남이 있은지 이제 10여년이 흘렀다. 어린왕자를 매 학년에게 가르치셨던 그 교수님도 이제 우리와 함께 안 하시게 된지 벌써 몇년이 지났다.  

그렇게 잊고 지냈던 어린왕자가, 회사를 다니며 사무실에서 부딪히는 여러 군상들의 사람들과 겹치며, 조금씩 삶이란 것에 지쳐가는 때에 어느 날 갑자기 내 기억 속에 떠올랐다. "나를 길들여줘"하는 여우의 갸냘픈 목소리와 함께.  "길들인다는 것이 뭐야?"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귀여운 어린왕자의 몸짓과 함께.  그렇게 어린왕자에 대한 추억이 되돌아왔다.  친구에게 빌려 읽은 어린왕자에게서 10여 년 전, 교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해주시고 싶어하셨던 그러나 그 때는 못 알아들었던, 그 "어른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어른들의 마음"이 이해가 안 되어서 답답해하는 "어린왕자의 마음"도 이제는 알게 되었다. 맞다, 나도 이제는 어른이 되어버렸으니까..  

세월이 지나서야 내가 10대 시절 바보처럼 여겼던 생텍쥐페리의 마음이 전해져온다. 이젠 작고하신 교수님이 성성한 백발로 아직은 어리게만 느껴졌을 우리들을 향해서 그토록 전달해주시고 싶어하셨던 그 메시지도 이제서야 가슴 아프게 전해져온다.  나이에 상관없이 항상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간 사람들은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동떨어져가나 보다.  비행기를 타고 출격하여 밤바다 너머로 사라져가버린 생텍쥐뻬리... 항상 자연을 노래하며 순진한 눈을 반짝였던, 그리고 그토록 사랑했던 록키산맥으로 사라져가버린 존 덴버... 그들이 마지막으로 비행하며 봤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구구절절이 가슴을 후비며 파고드는, 어른들의 어리석은 인간관계를 슬퍼하는 어린왕자의 소행성이었을까.  그리고 이제 어린왕자를 눈 앞에 두고 나도 모르게 회한에 젖어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린왕자를 사랑하시고 제자들을 사랑해주셨던 교수님, 조금이나마 그 앞에 놓인 삶을 더 충실히 살아갈 수 있게끔 가르쳐주려 하셨던 그 마음을 못 알아보고, 교수님이 소개해주셨던 어린왕자를 아무 생각 없이 떠나보내버렸던 못난 제자들에 대한 애틋한 심정이 이제서야 가슴 아프게 느껴져오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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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에서 길을 묻다 - 혼자 떠나는 세계도시여행
이나미 지음 / 안그라픽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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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당했다..

프라하.. 뭔지 모르게 이름만 들어도 묘하게 가슴을 설레게 하는 도시. 한 번도 가보지 못 했지만 언젠가는 가보고 싶은 도시. 정작 길을 떠날 여유가 생긴다면 그래도 다른 곳을 먼저 돌아보느라 뒤로 밀릴 것을 알고 있는 그 도시.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립기만 한 그 도시..

누군가가 그 도시를 다녀와서 여행기를 냈다. "미리보기"를 통해서 접한 그 누군가는, 혼자만의 여행을 고독하면서도 사색적으로 얘기를 풀어내 느낌이었다. 그래서 주저없이 선택했다..

그런데, 그게 실수였나 보다. 어떤 식당에 들어가서 카메라의 렌즈가 부착이 안 되니, 그걸 다시 부착시키는데 씨름하느라 그 식당에서 연주하는 피아노를 제대로 못 들었댄다. 그 피아니스트에게 미안해서, 동양에서 음악감상할 줄 모르는 여인이 온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려주기 위하여 조금 노력했다고 했다. 저자는, 아니 여행자는 그 얘기를 쓰고 설명하느라 장장 3페이지나 사용해버렸다. 음식 맛에 대한 여행자의 기분을, 독자에게 전해주기 위하여서도 한페이지는 그냥 지나갔다. 그녀의 상세한 설명과 자신의 기분을 알려주기 위한 노력에는 감사하지만... 여백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하여 여행기를 집어든 나같은 독자에게는 좀 안 맞는 거 같다.

읽다가 여행자, 아니 저자의 프로필을 봤다. 전문 디자이너.. 역시.. 그녀는 프로였다. 하지만 프로 여행자나 글쟁이는 아니었나 보다. 어쨌거나, 간신히 끝을 내긴 했지만, 내 마음 속의 프라하는 조금 그 빛이 옅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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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소
권지예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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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자.. 내가 한국소설에 대하여 열을 올렸던 시절이 한 때나마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볼 수 있는지.. 아 있었다. 주로 한 번에 한쪽으로만 탐닉하는 못된 습관 때문이었나, 한 때는 남자작가들 작품만, 그 다음에는 여자작가들 작품만 줄창 읽다가 언젠가부터는 한국사람 이름이 저자로 되어 있으면 아예 제껴놓기 시작했다. 아마 나도 곧잘 아는 언어로 유희를 떠는 그 모습들이 때로는 진저리나게 싫었나보다. 시건방지기도 했지..

그래도 할 수 없다. 속내를 은연중에 까발리고 자신이 살아온 시공이 은연중에 녹아들은 작품을 읽다 보면, 한 작가의 작품을 몇권씩 읽다보면, 그 작가의 심성이 어떨 때는 투영되어 보일 때가 있다. 모 원로작가의 차디 찬 감성에 은연중에 배어나오는 오만함이라든가, 모 작가의 분열증적인 자아상에서 흔들리는 모습이라든가, 또는 모 작가의 투쟁으로 점철된 젊은 날이 이제는 잦아드는 모닥불처럼 한 곳으로 조용히 뻗어나가는 내면상으로 승화된 모습이라든가.. 여하튼 그런 모습들을 나도 모르게 접하다 보면 때로는 질리기 마련이다. 아 이 인간들과 내가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문화권에서 같은 시대를 사니까, 안 그래도 현실에서 좀 떨어져보려고 빠진 소설 속에서조차도 실존인물의 내음을 맡게 되는구나 싶어서.. 그래서 한국인 이름이 떡하니 찍힌 책은 말이다, 발 끝에 채여도, 아니지 손 끝에 채여도 안 집어든 시절이 좀 되었드랬다.

권지예, 이런 저런 책을 통해서 나도 모르게 조금씩 접하고 읽게 된 작가다. 내가 무뎌진 것인가, 아니면 좀 덜 시건방져진 것인가, 대체 이 작가의 내음은 읽어도 못 맡아보겠으니, 어쩌면 이 자가 진정 프로페셔널인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가려버리고 작품을 써내려가는 것이 프로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래도 뭐 어떤가, 그런 재미로 다시 한 번 한반도 출생자의 이름이 떡하니 석자 찍힌 책을 집어들게 되었으니, 뭐 그다지 나쁘지는 않지..

그.런.데. 이번 단편집을 읽으면서 뭔지 모르게 권지예라는 작가의, 그래도 휘어내려가는지 잦아들어가는지 모를 일맥상통하는 물줄기를 각 편마다 연결하여 발견한 느낌이다. 그런데 오랜만에 접한 그런 느낌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 사람이 써서 사람이 읽으라고 내놓은 작품에, 사람으로서 읽으면서 아무 느낌도 못 접한다면 그게 이상한게지 암.. 오랜 시간 외돌다 와서 그런가, 찰싹찰싹 혀 안에 감기는 한국어의 묘미를 느끼며 읽는 재미도 나름 삼삼하다. 이 책 덕분에 당분간은 한국인 저자 책에 대하여 그다지 이물감을 안 느낄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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