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소
권지예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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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자.. 내가 한국소설에 대하여 열을 올렸던 시절이 한 때나마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볼 수 있는지.. 아 있었다. 주로 한 번에 한쪽으로만 탐닉하는 못된 습관 때문이었나, 한 때는 남자작가들 작품만, 그 다음에는 여자작가들 작품만 줄창 읽다가 언젠가부터는 한국사람 이름이 저자로 되어 있으면 아예 제껴놓기 시작했다. 아마 나도 곧잘 아는 언어로 유희를 떠는 그 모습들이 때로는 진저리나게 싫었나보다. 시건방지기도 했지..

그래도 할 수 없다. 속내를 은연중에 까발리고 자신이 살아온 시공이 은연중에 녹아들은 작품을 읽다 보면, 한 작가의 작품을 몇권씩 읽다보면, 그 작가의 심성이 어떨 때는 투영되어 보일 때가 있다. 모 원로작가의 차디 찬 감성에 은연중에 배어나오는 오만함이라든가, 모 작가의 분열증적인 자아상에서 흔들리는 모습이라든가, 또는 모 작가의 투쟁으로 점철된 젊은 날이 이제는 잦아드는 모닥불처럼 한 곳으로 조용히 뻗어나가는 내면상으로 승화된 모습이라든가.. 여하튼 그런 모습들을 나도 모르게 접하다 보면 때로는 질리기 마련이다. 아 이 인간들과 내가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문화권에서 같은 시대를 사니까, 안 그래도 현실에서 좀 떨어져보려고 빠진 소설 속에서조차도 실존인물의 내음을 맡게 되는구나 싶어서.. 그래서 한국인 이름이 떡하니 찍힌 책은 말이다, 발 끝에 채여도, 아니지 손 끝에 채여도 안 집어든 시절이 좀 되었드랬다.

권지예, 이런 저런 책을 통해서 나도 모르게 조금씩 접하고 읽게 된 작가다. 내가 무뎌진 것인가, 아니면 좀 덜 시건방져진 것인가, 대체 이 작가의 내음은 읽어도 못 맡아보겠으니, 어쩌면 이 자가 진정 프로페셔널인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가려버리고 작품을 써내려가는 것이 프로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래도 뭐 어떤가, 그런 재미로 다시 한 번 한반도 출생자의 이름이 떡하니 석자 찍힌 책을 집어들게 되었으니, 뭐 그다지 나쁘지는 않지..

그.런.데. 이번 단편집을 읽으면서 뭔지 모르게 권지예라는 작가의, 그래도 휘어내려가는지 잦아들어가는지 모를 일맥상통하는 물줄기를 각 편마다 연결하여 발견한 느낌이다. 그런데 오랜만에 접한 그런 느낌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 사람이 써서 사람이 읽으라고 내놓은 작품에, 사람으로서 읽으면서 아무 느낌도 못 접한다면 그게 이상한게지 암.. 오랜 시간 외돌다 와서 그런가, 찰싹찰싹 혀 안에 감기는 한국어의 묘미를 느끼며 읽는 재미도 나름 삼삼하다. 이 책 덕분에 당분간은 한국인 저자 책에 대하여 그다지 이물감을 안 느낄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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