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마스와 데리다의 도발적 문제제기

아방가드르적 '유럽'전망 제시 ... 에코, 바티모, 로티 동참

2003년 06월 26일 강진숙 통신원

지난 5월 31일, 유럽 언론에는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 유럽 전역의 저명한 지식인들이 사전에 비밀로 부친 채 유럽 각국의 일간지에 자신들의 주장을 일제히 쏟아냈기 때문이다. 이 지식인들의 도발적인 문제제기는 EU가 장차 어떠한 외교정책을 수립, 실행해야 하는가에 맞춰졌다. 그 선두로서 독일의 대사상가로 평가받는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와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독일의 유력한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이하 FAZ)'에 아방가르드적인 핵심유럽의 전망을 제시했다. 이런 지식인 집단의 움직임이 중요한 이유는 우선 이 지식인 집단의 주도층이 이라크전의 발발 전후로 반전과 평화 운동을 주도했던 주체들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 반전평화운동을 계기로 유럽 통합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있어 지식인들의 역사적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떻게 전개되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유례없는 이 유럽 지식인 운동의 대변자는 위르겐 하버마스다. 지난 5월 31일 FAZ에 게재한 기고문에서 그는 프랑스의 동료 철학자 자크 데리다와 공동으로 유럽의 전망에 대해 논증했다. 그들의 핵심적 문제제기는 유럽 통합(통일)을 시험했던 이라크 전 직후, 세계적으로 유럽의 역할은 왜 새롭게 규정돼야 하는가 라는 점에 있다. 요컨대 유럽인들의 공동의지와 '정체성'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전쟁이 유럽 지역에서 발발한 것은 아니지만, 전쟁은 유럽을 변화시켰다. EU 내에서 외교정책에 대한 관심이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각각의 일국 차원의 관심사를 벗어나 유럽차원의 사고들로 진전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하버마스는 시민들의 “우리-감정”(일체감)을 이성적 정치의 척도로 만들 방법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하버마스와 데리다의 기고문은 지난 1월 31일 언론을 통해 영국과 스페인의 주도 아래 EU 소속 8개국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던 ‘8개국의 서신’에 반대 의사를 드러낸 것이다. 이 비판의 출발점은 두 역사적인 날, 즉 전쟁지지와 반전의 입장이 사회적으로 표출된 시점의 비교이다. “하나는 유럽 내 신문들이 아연실색해 있는 독자들에게 ‘부시에 대한 충성의 표명’을 보도한 날이다. 이 날 스페인 총리는 다른 EU 국가들에게는 비밀로 한 채 유럽의 전쟁 지지국들을 향해 부시에 대한 충성을 표명하도록 신문지상을 통해 요청했었다. 또 다른 하나는 지난 2월 15일 시위 대중들이 유럽 전역의 수도들, 예컨대 런던, 로마,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베를린 그리고 파리에서 이러한 교섭행위에 대한 반대를 분출한 날이다.” 두 철학자들은 이 두 날을 망각하지 말 것을 주장하며 유럽의 외교정책 개혁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그들의 논점은 매력적인 문화적 ‘비전’ 없이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 2월 15일에 있었던 대규모 반전시위는 “유럽 공론장의 탄생을 알리는 역사적 신호”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같은 날 일제히 다른 저명한 유럽의 신문들에도 하버마스와 데리다의 공동 기고문에 대한 다른 지식인들의 보충 의견들이 실렸다. 예컨대 파리의 ‘리베라시옹’은 데리다의 요구와 하버마스와 공동으로 작성한 텍스트를 제시했다. 이탈리아의 ‘레푸블리카’에는 움베르토 에코가 표명했고, 스위스의 ‘새로운 취리히 신문’에는 아돌프 무쉬히가, 스페인의 '엘 빠이스'에는 페르난도 사바터, 이탈리아의 ‘라 스탐파’지에는 ‘모더니티의 종언’으로 알려진 지안니 바티모 등이 유럽 유수의 신문들에 각각 의견들을 표명했다. 그리고 신실용주의를 제창한 미국의 철학자 리차드 로티는 하버마스의 의견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을 ‘남독일 신문’에 제시했다.

이 대규모의 지식인 ‘발의’ 운동에 대한 근거에 대해 하버마스와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즉 유럽인들의 연대는 우선 ‘핵심 유럽’ 차원에서 설명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유럽적 가치인 계몽사상을 복원하고, 공동의지로 통합된 유럽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런 요구는 유럽 내의 변화, 즉 2004년도 유럽연합 회원국들의 가입을 목전에 두고 있고, 동시에 터어키의 입회 신청 등에 직면하여 지식인 집단 내에서 폭발력을 갖게 된 것이다. 그들이 핵심유럽의 역할에 대해 주장하는 바, “진전한다는 것은 배제를 뜻하지 않고”, “아방가르드적인 핵심 유럽은 작은 유럽으로 고착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추동력 있는 기관차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하버마스의 주장에는 심도 깊은 고민과 논리적 근거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해명돼야 할 과제가 많다. 예컨대, 약 4억에 달하는 유럽 시민들의 다양한 동기와 서로 다른 요구들을 어떻게 하나의 공동의지로 구축할 것인가. 그리고 어떤 목적을 향한 공동의지인가. 또 한편으로 하버마스가 공동 의지로 구축할 수 있다는 유럽 모델은 시민들의 결속 아래 구축되는 단일 민족국가를 말하는 것인가. 우려되는 점은 경제적, 정치적 역사가 다른 유럽 각국의 정체성에 대한 ‘차이’가 전제되지 않는 한 또 다른 집단주의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버마스를 위시한 이 유럽 지식인 운동의 전개는 여러 가지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역사를 생성하는 길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우리’라는 감성을 이성적 정치의 척도로 현실화시키는 방법의 모색, 경제적 목적의 블록화가 아니라 반전운동을 계기로 외교정책적 공동 대응을 위한 유럽 통합의 전망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핵심 유럽’의 진취적인 모델을 구상하고 있다는 점 등은 앞으로 새로운 유럽을 추동할 ‘기관차’의 동력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강진숙 독일통신원/라이프치히 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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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파괴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파괴라고 해서 부정적인 것은 아니고 사람들을 구속하는 사회조건이나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갖가지 전제를 묻고 해석하는 일을 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무한한 길을 보여주는 일이겠지요. 발터 벤야민의 말을 빌리면, 지식인의 일은 사람들에게 도달해야 할 곳으로 이끌어 줄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길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부수는' 작업이겠지요. 장애물을 부순 뒤 어느 길로 갈 것인지는 사람들이 결정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애물을 부수는' 작업에는 지금까지 닫힌 집단을 만들어 온 사람들에게 이제까지와는 다른 집단이나 사회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을 포함합니다.  [...]  "여기저기에 길이 보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언제나 기로에 서 있다. 어떤 순간일지라도 다음 순간을 모른다. 인간은 기존의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지만, 목적은 잿더미가 아니라 잿더미 속을 누비고 다니는 일이다." ("파괴적 성격", <폭력비판론>)

 사까이 나오끼, <국민주의의 포이에시스> (창작과비평,2003) 중 대담 부분에서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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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 : 근대형성기에 대한 미시적 접근의 한계

빈약한 실증 빈곤한 해설...구성주의에 포획된 과거

2003년 11월 13일   강성민 기자

근대 형성에 관한 미시적 탐구들이 젊은 국문학자를 중심으로 활발하다. 권보드래 서울대 강사가 펴낸 '연애의 시대'(현실문화연구 刊)는 1920년대 초반 이 땅을 물들인 연애사건들을 추적했으며, '국민국가의 정치적 상상력'(소명출판 刊)은 애국계몽기 지식인들이 새로운 국가에 무엇을 채울 지 상상하고 실천했던 모습을 주목했다.

'연애의 시대'는 올초에 출간된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신명직 지음) 및 김진송 씨의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이상 현실문화연구 刊)의 계보를 잇는다. 이 책들의 공통점은 몸과 욕망의 근대를 끌어당긴다는 데 있다. 신문잡지의 잡스러운 사건사고와 정제되지 않은 표현들을 통해 당시 대중의 삶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앎을 보충하자는 취지를 갖고 있다.

지난 1999년 '딴스홀…'의 이런 시도는 신선했고, 그 안에 담은 근대의 실물들 또한 '근대적 자기인식'의 다른 측면에 대한 충분한 응답이 돼줬다.

 *1928년 조선일보에 실린 '모던걸의 장신운동'이란 삽화. 여성들의 몸치장을 과장해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올해의 두 책은 물음표를 찍지 않을 수 없다. '연애의 시대'는 '戀愛'라는 박래품이 조선반도에 불어닥친 과정을 따라가고 있지만, 자료확보의 미흡과 그에 따른 해석의 빈곤을 초래하고 있다. 저자가 특히 추적하는 것은 기생과 여학생, 가정부인들의 삶에 나타난 변화다. 3·1운동 이후 급격히 늘어난 교육열풍으로 거리를 온통 여자들이 메우기 시작했다. 신문에는 이들 '신여성'에 대한 당혹스러운 관람기가 실리기 시작하더니, 신여성과 서울로 유학온 유부남과의 불륜이 대대적으로 퍼지면서 조선반도는 연애의 열풍에 휩싸이게 된다.

연애편지라는 새로운 소통방식, 독서를 통한 연애의 내면화, 비극자살로 인한 삶과 죽음의 관념에 나타난 변화는 이 지점에서 던져볼 수 있는 질문들이고 저자 또한 챙기고 있는 주제들이다.

식민지 근대를 읽어내는 편향성

하지만 이 책엔 중요한 게 하나 빠져있다. '재미'가 없는 것이다. 이런 류의 책이 줄 수 있는 재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연애의 치마밑을 긴장되게 엿보고 조선팔도 구석구석을 헤집는 博覽의 교차점에서 생길 만한 것이다.

이 책은 근대에 '연애'라는 근사한 거푸집을 덮어 씌울뿐 전혀 잘 빠진 결론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신문 사회면의 표면을 계속 미끄러져나가면서, 어디서 한번 본듯한 이야기들을 열거하고 이미 일본에서 수없이 다뤄온 연애개념의 수용경로를 모방적으로 재구성한다는 느낌이다.

이것은 신문읽기의 한계가 아닐까.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문학과지성사 刊)이 '文化史' 서적으로서 자신의 경쟁력을 온갖 공문서, 비밀문서, 증언 등을 통해 확보한 점은 유명하다. 과거나 지금이나 신문'만' 읽고 쓰는 글은 결코 풍부해질 수 없는 것이다. 

3편의 중편논문을 모아 낸 '국민국가의 정치적 상상력'에 오면 부작용이 더하다. '위생담론과 신체에 대한 인식틀의 변환', '전쟁서사와 국민국가의 프로젝트', '꿈-서사의 민족담론과 계몽의 수사학' 등 그 동안 잘 다루지 않았던 참신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제목을 달았다.

하지만 국민국가의 프로젝트라는 문제설정부터 문제다. 일본이라면 이런 문제설정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국민국가를 통해 동아시아 제국으로 성장하고 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야심을 세웠고 실천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한국은 고작 10여년의 애국계몽기 동안 그런 소망을 품어봤고, 이후는 식민지의 길을 걸었다. 이 책은 그런 역사적 맥락과 전혀 상반되는 건국의 흥분감을 내내 연출한다. 안해도 되는 연구를 한다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저자들이 계몽지식인들의 국가기획이, 해방 이후의 건국기획과 맺는 연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왜 이 시점에서 국민국가 프로젝트를 살펴야 하는가. 다만 당시 지식인들이 그렇게 근대를 내면화했고, 그게 지식인 주체구성의 한 형식이었다고 말하면 충분한가. 당시 지식인들은 과연 그토록 치밀하게 지도를 그리듯 근대를 준비했을까. 근대적 매체의 마술에 의해 계몽된 건 지식인이었을까, 대중이었을까.

이 책의 첫번째 글은 신체를 위생적으로 관리해 국가에 적합한 국민을 생산키 위한 계몽의 실천과 그에 따른 여러 인식의 변화를 추적한다. 소제목은 '질병의 발견, 위생의 정치학', '구습의 타자화, 서구적 매너의 형성', '욕망포획과 정절의 내면화', '훈육되는 신체와 정신' 등으로 흘러간다.

또 하나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건 과도한 구성주의적 용어들이다. 로고스 패러다임을 깨려고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어렵게 발명해낸 그 전략적 용어들이 여기선 거의 자동녹음기처럼 연발되고 있어서 낯이 뜨거울 정도다. 특히 국가 안에 국민을 '배치'한다는 식의 용어들은 그 뒤에 무슨 말이 나올 지도 대충 짐작이 갈 만큼 식상함을 준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그냥 넘어갈 수 있다.

무비판적 同人主義 문제

또 다시 문제가 되는 것은 글의 전반에 등장하는 주체와 타자,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구별이 전혀 현실 고려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가령 신체를 통제하는 생체권력의 형성을 말하는 부분은 전근대와의 단절을 강조하고 있다. 근대적 교육, 인구조사 등을 통해 파놉티콘이 형성된다는 식의 주장을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도 유교적 신체규율이 엄연히 있었다. 최소한 그 두개의 규율을 다른 것으로 보려면 서로 치밀하게 비교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런 것은 가볍게 생략될 뿐이다.

治道(깨끗한 거리)를 위생적 신체와 일치시키는 은유적 논의전개 방식은 글을 흐름화하지 못하고, 끝없이 분절시키고 있다. 이것은 근대성 연구의 후발주자로서 외국의 선행연구자들의 관점을 일종의 '선입견'으로 갖고 연역적으로 연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인 것 같다.

그러니 강박이 생긴다. 앞의 글들에서 공통적인 것은 "삶은 기획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근대에서 서구이성에 포섭되지 않는 미적 주체의 기획논리를 발견하자는 과도한 의욕 말이다. 물론 그런 식의 기획이 전혀 없진 않았지만 과연 그게 우리 삶의 본질이었을까.

이들 연구자들이 수시로 참조하는 일본 근대의 탈전통과 문명의 재배치는 국가권력의 구체적 실천과 당대 지식인들의 긴밀하고도 거대한 연계 아래서 이뤄졌던 것이다. 한국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런 중요한 차이는 왜 무시되는 것일까.

결과적으로 볼 때 최근 근대에 대한 미시적 탐구서들은 구체성을 잃고 수입개념에 갇혀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근대성 연구의 '同人主義'에서 그 원인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현재 국민국가, 계몽근대에 대한 연구자 집단은 상호간의 비평적 거리를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 상호인용은 충분히 하지만 서로의 견해에 대한 메타견해나 비판은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 마치 일심동체인 것처럼 똑같은 주제와 소재, 관점과 기술법으로 앞으로 밀고 나가기만 한다. 과연 이런 식의 학문접근이 성찰성과 객관성을 지속적으로 확보해나갈 수 있을 지 의문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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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서 교수와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의 만남

신화의 興起, 인류의식의 패러다임 변화 의미
 
                                                 2003년 12월 31일   정리 강성민 기자

 

신화가 문화적 기득권을 쌓아감에 따라 그것의 본질적인 의미와 부정적 기능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교수신문은 신년을 맞아 비판적 신화논의의 새로운 담론의 장을 여는 의미에서 ‘한일석학 E-메일 신화대담’을 준비했다.일본의 대표적 종교철학자인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와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가 대화를 나눴다. 두번에 걸친 대담은  이번에 첫번째를 싣고, 다음호에 나머지를 선보일 예정이다. 신화의 본질과 역사, 동양에서의 신화논의의 방향 등 주요한 화두들이 제시됐다.[편집자주]


나카자와 신이치 : 현대일본의 대표적 철학자이자 종교학자로 탁월한 인문학 저술가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도쿄대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79년 네팔에서 전승밀교를 연구하고 수행했다. 1982년 일본으로 돌아와 '티베트와 모차르트'를 써서 산토리 학예상을 수상했다. 현재 中央大學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무지개의 논리', '악당적 사고', '숲의 바로크', '불교가 좋다' 등이 있다.

 

정재서 : 서울대 중문과에서 '신선설화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옌칭 연구소, 국제일본문화연구소 객원교수 역임했고 현재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출판문화상 저작상을 수상한 '不死의 신화와 사상'을 비롯해 '山海經譯註', '동양적인 것의 슬픔', '道敎와 문학 그리고 상상력' 등이 있다.

 

정재서 :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이메일로나마 만나뵙게 돼 반갑습니다. 이른바 신화의 귀환이 운위될 만큼 오늘날 신화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근대 이후로는 아마 낭만주의 시대의 신화에 대한 열기를 재현한 것과 같은 그러한 현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가령 한국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최근 그리스 로마 신화를 중심으로 한 신화서가 출판시장에서 크게 호황을 누렸고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시리즈'와 같은 판타지 문학이 대중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마 전세계적 현상의 일환이라 할 것 같은데 이제 대중적 열풍을 잠시 뒤로하고 신화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카자와 선생님의 저작 '신화, 인류 最古의 철학'은 시의적절한 책이었습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신화의 의미와 가치를 잘 각인시킨 훌륭한 신화입문서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저자인 나카자와 선생님과 함께 인류 공통의 관심사인 신화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카자와 신이치(이하 나카자와) : 저의 책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 제1권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의 한국어판이 출판돼 다행히 많은 독자의 호응을 얻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우 기뻤습니다. 일본열도의 최초의 국가가 이미 고도로 발달된 상태였던 한반도 문화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탄생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또한 초기의 국가가 편집한 '古事記'나 '일본서기'와 같은 신화집의 소재 대부분이 한반도 사람들 사이에서 전승되던 신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신화집의 편찬과정에도 한반도 출신의 지식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 역시 역사학에 의해 입증된 바 있습니다.
  우리 일본인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신화를 통해 한반도 사람들과 깊이 연결돼 있었던 셈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렇게 신화를 화제로 정 선생님 같은 한국의 대표적 학자와 대담하게 돼 감회가 깊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신화를 정치적으로 왜곡시켜 이용하려 했던 이데올로기로 인해, 양국의 국민 사이에 형성돼야 할 우애가 오랜 기간에 걸쳐 깊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순수한 마음으로 신화를 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화를 무조건 부정해온 근대의 사고법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신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해졌습니다. 신화에는 '현대란 무엇인가'라는 의문과도 직결된 매우 중요한 문제가 내포돼 있습니다.

용은 동양신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서양에서 용은 악의 힘으로 여겨지는 반면, 동양에서는 공정하고, 인정 많고 길조를 나타내는 동물로 통한다. ©

 

정재서 : 작금의 신화 열기(중국의 학계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정말 神話熱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가 과연 어떤 원인에서 생겨났으며 이것이 과거 사조에 대한 반동으로 반짝 일어난 현상인지, 아니면 지속적으로 우리의 삶에 중요한 작용을 미칠 사안인지 한번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일단 저는 신화의 興起가 이른바 문명의 전환기라 할 현 시점에서 인류 의식의 패러다임의 변혁과 긴밀히 상관된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일시적 반동 현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물론 근대 이래의 과학적, 기계적 사고에 대한 반동으로 신화적 감수성이 반사적으로 필요해진 측면도 없지 않으나 그것은 문제를 너무 피상적으로 보는 것이죠. 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신화의 도래가 필연적이었고 앞으로도 불가결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첫째는 앞으로 인류의 의식이 보다 통합적이고 전일적인 사고를 지향할 것이라는 예측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향후 인류를 둘러싼 매체 환경이 신화적 상상력의 활발한 작동에  온상을 제공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입니다. 다시 말해 정신적, 물질적 양 차원에서 신화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호황(?)을 누릴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에서입니다. 신화가 이미 기득권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할 때 차제에 필요한 것은 신화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냉철한 검증과 비판이 아닌가 합니다. 이러한 자세만이 향후 신화의 범람으로부터 불가피하게 빚어질 오용과 남용을 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최근의 신화에 대한 대중적 열기에는 어딘지 냉정한 인식이 결여된 것 같아 아쉽습니다.

나카자와 : 중국의 최근의 출판현황을 보면, '神話考古'라는 제목이 붙은 책이 많이 눈에 띄게 됐습니다. 그리고 쓰촨(四川)성이나 칭하이(靑海)성과 같은 지방의 출판물에서는 도교나 라마교 등에 대한 뜨거운 '종교열기'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저는 문화대혁명 당시의 중국을 여행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변화입니다.
  일본에서 그와 유사한 '신화열기'가 일어난 것은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진행중이던 때였습니다. 당시의 진취적인 일본의 대학생들의 머릿속에서는, 비합리적이고 반동적이라며 평가 절하해왔던 신화나 민속문화에 대해 열광적인 관심을 갖는 것과, 근대의 상식에 반항하는(듯이 보였던) 중국의 젊은이들의 정치운동이 하나로 연결돼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겠지요.
  당시의 젊은이들은 대규모의 자연파괴를 수반한 일본열도의 도시화와 공업화에 대한 일종의 저항으로서 신화나 민속문화에 대해 열광적인 관심을 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경제의 고도성장과 정치운동의 수많은 좌절에 의해, 이런 '신화열기'는 문화의 표면에서는 냉각되어 점차로 내면화돼 갔습니다. 그런 정열은 정치로부터 멀어져서 '정신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어가고, 표현영역도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같은 서브컬처로 옮겨가게 됐습니다. 그리고 애니메이션 영역에서 되살아난 신화적 사고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여러 뛰어난 작품을 탄생시키면서, 동시에 환상에 사로잡힌 채 개인의 밀실 속에 갇혀 지내는 많은 어린이들을 위험한 정신상태로 몰아넣었습니다.

뇌공도 ©

그렇기 때문에 정 선생님이 지적하신 바와 같이, 현대의 우리 사회도 신화적 사고를 추구하고자 하는 깊은 충동을 느끼면서, 그런 충동의 발산으로 야기되는 정신적 황폐를 지켜보며 신화가 갖는 의미에 대해 계속 생각해가야 합니다. 과연 현대의 우리들은 신화에 대한 관심을 통해 무엇을 회복하고자 하는 걸까요. 저는 그게 '대칭성의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최근에 한국어로 번역된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의 제2권 '곰에서 왕으로'와 현재 집필 중인 제5권 '형이상학혁명'에서 상세히 논했으므로, 여기서는 요점만을 간단히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신화는 레비-스트로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항대립 논리의 조합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조리한 것과 날 것, 연속적인 것과 비연속적인 것 사이에 발견되는 차이를 이용해서, 이것을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의미가치를 갖는 이항대립으로 만들어, 우주의 의미를 둘러싼 복잡한 사고를 전개하려 한 것이 신화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신화의 사고와 오늘날의 컴퓨터로 대표되는 과학의 사고는 동일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신화에는 과학과는 이질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이항대립의 논리를 사용하면서, 신화는 과학에서는 절대로 거론하지 않는 것을 거론한다는 점입니다. 과학은 이 세계가 비대칭적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인간과 곰 같은 동물을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신화에서는 이런 비대칭적인 상황이 뒤집혀, 곰과 인간의 동질성을 주장합니다. 신화의 시대에는 곰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말을 했으며, 인간도 원하면 동물로 변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신화에서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대칭적인 관계가 성립돼, 그런 대칭성을 근거로 한 논리에 의해 사람들은 현실 세계로부터 보이지 않게 된 진리에 대해 생각하려 했던 셈입니다.
이런 '대칭성의 논리'는 우리 현생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무의식'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우리 마음속에서 활동하게끔 하는 '무의식의 논리'를 의미합니다. 무의식이 억압을 받거나 부분적으로 개조된 부분에 의식이 탄생하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신화열기'를 통해 표면화되고 있는 신화적 사고에 대한 관심의 저변에는, 생명활동에 직결된 무의식의 활동 사이에 막혀 있던 회로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충동이 숨겨져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무의식은 반성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 점이 '신화에 대한 대중적 열기'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의 원천입니다.

정재서 : 다음으로 신화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리스 초기에 뮈토스는 진리에 가까운 이야기였고 로고스는 허구성을 띤 이야기였습니다. 이 관계가 정반대로 역전되는 것은 플라톤 이후입니다. 인문주의의 시대로 진입하면서 신화는 허구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죠. 이후 신화는 寓意說 등에 의해 겨우 존재를 유지해오다가 근대 이후 셸링, 카시러 등에 의해 내재적 가치를 인정받고 레비-스트로스에 이르러 自明性을 획득하게 됩니다. 선생님은 특히 레비-스트로스에 주목해 구조주의의 길을 따라 신화적 논리가 갖는 힘을 잘 설명하셨습니다. 신데렐라 민담을 통해 양극적인 것들을 매개, 결합시키는 신화적 논리의 특성을 웅변한 것은 정말 압권입니다. 신화적 논리가 갖는 통합적인 힘, 그것은 선생님의 말씀대로 세계를 조화롭게 만들고자 하는 원시 인류의 지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화적 사고가 초래할 집단주의, 전체주의의 위험도 간과할 수 없지 않나 합니다. 우리에게는 나치와 一國主義의 광기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한 광기가 신화적 사고의 오용에서 비롯됐음은 이미 많이 지적된 바 있습니다. 저는 신화가 인류의 집단무의식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종족의 서사이기도 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 점은 신화가 보편성을 지니고 있지만 언제라도 편파성으로 치달을 소지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화의 양면성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신화의 본질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아닌가 합니다.

인간의 몸통에 뱀 꼬리를 단 여왜와 복희가 별의 무리 속에 서로 엉켜 있다. 손에 쥔 컴퍼스와 삼각자는 둥근 하늘과 사각형의 땅을 상징한다. ©
나카자와 : 신화의 사고가 무의식의 영역에 직결된 논리과정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그 사고는 '種' 내지는 '계급'은 인식할 수 있어도, '個'를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종은 대립하는 힘들이 서로 싸우는 여러 종류의 多樣體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안으로부터 '개'가 탄생하게 되는데, '종의 논리'(이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것은 니시다 기타로와 동시대인이었던 다나베 하지메라는 교토대의 철학자였습니다)인 무의식의 사고로는 '개'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신화가 근대정치에 이용됐을 때 발생하게 될 엄청난 참화가 예상됐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파시즘과 파시즘의 현실화에 대성공을 거둔 독일의 나치즘에 의해 역사적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개'를 인식하지 않는 무의식적인 '종'의 사고의 횡포로 인해 비참한 상황이 초래됐습니다. 이처럼 신화적 사고에는 인류의 희망인 '대칭성의 논리'와 표리관계에 있으면서, 엄청난 참화를 초래할 가능성이라는 마이너스적인 측면이 잠재돼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런 양면성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채로 21세기의 신화연구를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본래 희망은 위험과 이웃하고 있게 마련입니다. 하이데거가 말한 바와 같이,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신화는 양날의 칼입니다. 함부로 다루면 인류는 또다시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지도 모릅니다.

정재서 : 앞에서 신화가 갖는 국한성에 대해 말했는데 이와 관련해 저는 신화 담론 곧 신화학의 국한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싶습니다. 세계 각국에 있는 개별 신화의 가치는 평등하다 하겠으나 사실 신화학의 세계는 평등하지가 않습니다. 근대 이후의 신화학은 인도 유러피언 민족의 기원을 탐색하고 문화적 우월성을 보증하기 위한 의도와 긴밀히 상관돼왔습니다. 신화의 개념, 분류 등 신화일반론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표준으로 결정됐으며 이 잣대는 세계 모든 지역의 신화에 일률적으로 적용돼왔습니다. 그런데 사실 다른 지역의 신화에 비해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일찍부터 원시성을 상실하고 훨씬 인문화되고 문학화 돼 있습니다. 문제는 특정한 지역의 신화에서 도출된 코드로 타문화를 해석할 때 생겨납니다. 가령 오이디푸스 유형은 인도 유러피언 민족 이외의 종족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지역적 국한성을 지닌 신화입니다. 그러나 이 신화에서 도출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코드로 우리는 모든 문화를 다 읽어낼 수 있는 것으로 상상해왔습니다. 마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도 같은 이러한 일방적인 잣대에 의해 비서구 문화의 특성은 捨象될 수밖에 없습니다. 근대 초기에 중국은 서구 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신화부재론'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중국에는 서구처럼 서사체계가 완전하고 창조적 의미가 풍부한 신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편견이었는데 사실 오늘날의 중국신화학에서도 서구 신화학의 정의나 분류법이 과연 중국에 들어맞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상술한 이러한 문제들을 신화학자 혹은 문화연구가로서 선생님은 어떻게 다루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나카자와 : 그것은 아시아인으로서 신화를 연구하는 연구자 모두가 느끼는 어려움에 대한 것입니다. 오이디푸스 신화를 예로 들어 이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레비-스트로스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대지로부터 탄생한 존재인 인류가 안고 있는 최대의 모순"에 대한 하나의 해답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해왔습니다. 다리를 끌며 걷는 오이디푸스 일족은 대지에서 탄생한 인류에 대한 기억을 계속 간직해 왔습니다. 게다가 모든 인류가 동일한 '대지의 어머니'로부터 탄생한 존재라면, 모든 여자는 자신의 어머니며, 모든 남자는 여자들의 아들이 되는 셈이죠(이것이 앞에서 서술한 '대칭성의 논리'의 超논리적인 귀결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결혼, 모든 성의 결합은 '근친상간'이 되는 셈입니다.
  현생인류가 구석기를 사용한 시대부터 이미 이런 식의 사고를 한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모성을 지닌 '대지'에 대한 사고가 존재하는 한, 인류는 大地性으로부터의 완전한 이탈의 불가능과, 근친상간으로서의 결혼의 모순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인의 오이디푸스 신화는 이런 모순에 대한 일종의 재치 있는 신화적 해결인 셈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한 여러 해결책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일본에서 전승돼 온 '道祖神'의 기원설화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도조신은 도로에 서 있는 신인데, 그 신에 대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형과 여동생이 있었는데, 둘 다 결혼상대를 찾아 멀리 길을 떠났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둘은 다시 만나는데, 서로 오누이 사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채 관계를 갖게 됩니다. 무척 기뻐하며 둘은 서로의 고향으로 향하게 되는데, 고향이 서로 같고 헤어진 오누이라는 걸 알게 되자 절망해서 자살하고 맙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마을사람이 세운 것이 지금 '도조신'이라고 불리는 도로의 신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오이디푸스 신화를 "대지로부터 탄생한 존재인 인류가 안고 있는 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신화로서 이해한다면, 이 '도조신 신화'는 오이디푸스 신화의 변형으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방향으로 신화연구를 해나갈 수 있다면, 우리는 근대에 분에 넘치는 권세를 부려온 서구형 신화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낼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은으로 물결 무늬를 상감한 이 청동 괴물은, 악을 압도하는 것으로 믿어지던 중국신화 속의 날개달린 고양이과 동물이다. ©
정재서 : 저의 일본문화에 대한 소감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일본은 신화가 살아있는 나라다"라는 말입니다. 지난 일년간 일본에 가있으면서 줄곧 느낀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아울러 일본이 전통적인 상상력과 이미지의 유산을 바탕으로 오늘날 애니메이션, 영화 등 문화산업을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이룩한 것은 진정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문화산업에서의 신화 수용을 환각제에 비유하면서 진정한 신화의 힘과는 거리가 먼 유사 신화적 행위로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신화적 상상력의 무대가 되고 있는 사이버 공간은 가상현실의 공간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펼쳐지는 신화적 상상력도 유사 신화로서의 작용밖에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상현실은 향후 싫든 좋든 우리의 삶의 중요한 토대가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현실 위에서 진정한 신화의 힘을 체득하는 방안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 가상현실 속에서의 재신화화(Remythologization)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그 방안을 듣고 싶습니다.

나카자와 : 지적하신 부분은 현대문화의 본질에 관한 중요한 문제입니다. 앞에서 제시했던 제 개념을 사용한다면, 경제원리에 심각한 영향을 받고 있는 현대의 문화는 '비대칭성의 논리'에 의해 구석구석까지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신화적 사고나, 혹은 그와 동일한 장소로부터 발생하는 경제원리와는 이질적인 '증여의 논리' 등은 전부 '대칭성의 논리'로부터 탄생합니다. 오늘날 '가상현실'로 불리는 감각과 사고의 영역은 원래 이 '대칭성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는 무의식의 영역에 발생하는 것이므로, 그곳이 신화적 사고의 활동에 적합한 무대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거기에 지금은 '비대칭성'을 원리로 하는 경제원리가 작용함으로써, 오늘날 거대한 애니메이션과 게임산업이 형성된 것이야말로 위험한 일입니다.
  레비-스트로스가 '문자를 갖지 않은 사회'라고 하고, 제가 '국가를 갖지 않은 사회'라고 했던 사회에서는 현실과 신화, '비대칭성의 논리'와 '대칭성의 논리' 사이에 언제나 타협이나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신중한 배려를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균형이 생명과 사고와의 모순 사이에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윤추구를 제1원리로 삼는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새로운 개척자로서 무의식의 영역을 발견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선발대로서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산업이 발달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윤추구형 자본주의는 신화를 이야기하던 사회처럼, 균형이나 공생을 배려하지 않은 채 무의식 영역의 개발(착취)을 촉진시켜 가겠지요. 신화학자는 그 점에 대해 경고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기술이 실현시켜가고 있는 '가상현실'을 통해서, 아마도 인류는 신화가 이미 알고 있던 무의식 영역과의 감동적인 재회를 해가게 되겠지요. 그것을 건전한 형태로 실현시키기 위해서도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자본주의는 근본적인 원리부터 다시 만들어가야 합니다. 저는 제 자신이 하고 있는 연구의 의미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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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를 공부할수록 동시에 두 가지의 상반되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 하나는, 국가가 한 나라의 주민들에게 일체의 대안적 의식들을 어릴 때부터 마비시키는 근대만큼 대중들의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심한 시대는 역사상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제국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19세기 말~20세기 초의 경우 '자유로의 도피'는 대개 군사주의적 광기의 형태를 띠었다. 100년 전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나 영국의 주류 사회주의자들은 1848년 혁명의 시절부터 급진적 수사를 이어받고 5월 1일의 노동절이면 '제국주의 타도'를 외쳐댔지만,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국주의의 깃발 밑에서 서로를 죽이려고 광적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것이 살인적 열광보다는 '나만 배부르면 된다'는 식의 냉소주의적 형태를 띤다. 세계 인구의 15% 정도밖에 안 되는 미국, 서유럽, 일본이 세계 자원의 약 85%를 독식한다는 사실 등이 이미 노르웨이 중고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면 자원 약탈을 바탕으로 삼는 세계 체제를 바꾸려는 노르웨이 젊은이들이 다수일까? 천만에. 우리가 약탈자라 해도 우리의 소비 수준에는 손을 대면 절대로 안 된다는 집착은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대다수 서방인들의 집단 의식이다. 세계를 바꾸기 위해 몸 바칠 자유와 나의 도덕적 이상을 실천할 자유로부터 집단 도피하고 있는 것이다. 약탈 국가의 '국민'으로서의 집단적 여유와 소속감에 안주하는 것이 개인의 이상을 추구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집단주의가 극성을 부리는 근대인데도 '다름'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급진적 운동이 주목을 끈다. 개인마다 자기 나름의 우주를 이루는 만큼 한 개인은 천편일률적인 '국민'이나 체제의 부속물이 아니라 약탈적 체제와 거리를 둘 수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해방의 의미를 지닌다. 저항의 정신을 살려 후손들에게 인간이 홀로 서는 도리를 가르쳐준 사람들 중에서 우리는 한용운, 나혜석, 체 게바라, 프란츠 파농 등을 익히 안다. 역사를 제도권 위주로만 배운 우리에게는 그들의 이름이 낯설다.

 박노자, <하얀 가면의 제국> (한겨레신문사,2003) p.113-114

노예정신의 동양과 대조를 이루는 '자유정신의 서양'이라는 담론의 구조는 비서구 지역 지식인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 체화한 서구 지배층의 자만에 찬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뜨끔!) '자유'란 무엇인가? 실존주의적 시각에서 본 존재론적 의미의 자유는 '나의 모든 것에 대한 나의 선택권'을 뜻한다. 그러나 대다수 서구인들은 그들이 생활방식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 제도권 교육을 받고 취직하고 생산, 소비의 순환에 빨려드는 자본주의적 생활방식 이외에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그들이 무슨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는 지구자원을 고갈시키고 인류를 집단 자살로 이끌고 있는 오늘의 소비주의 사회가 역사의 목적이자 지상낙원으로 보일 뿐이다. 현실을 절대시하는 인식론적 차원에서는 서구, 소비중심주의적 서구인과 북한 사회를 '조선 역사의 당연한 목적'으로 보는 북한의 '순진한 시민'은 어쩌면 무척 비슷하다. 오히려 자신을 모르고 북한사람들을 '자유없는 불쌍한 노예'로 보는 서구인이 당하는 세뇌가 한층 더 교묘하고 철저하다.

[...]

사회주의 계통의 국회의원들마저 전쟁 히스테리에 휩쓸려 전쟁을 지지한 1914년 7월의 유럽보다 오늘의 유럽은 전체를 위한 희생을 덜 강요한다. 그러나 "남을 속박하는 자는 자유인이 될 수 없다."는 명언대로 제3세계에 대한 서구의 착취가 중단되지 않는 한, 서구인들의 '자유'를 논하기는 힘들다. 유럽의 진보적 투쟁의 역사를 유심히 연구할 필요는 있지만, '옥시덴트'를 이상적인 지향점으로 설정해 서구 지배층이 만든 함정에 빠질 필요는 없다. 서구 중심의 세계는 우리가 지나가게 된 하나의 단계일 뿐 인류 역사의 종점도 목적도 아니다. '이상적인 서양'이라는 그림을 말끔히 지워버릴 때 비로소 진정한 세계 평등의 길로 향할 수 있을 것이다.

 Ibid., p.299-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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