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가 문화적 기득권을 쌓아감에 따라 그것의 본질적인 의미와 부정적 기능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교수신문은 신년을 맞아 비판적 신화논의의 새로운 담론의 장을 여는 의미에서 ‘한일석학 E-메일 신화대담’을 준비했다.일본의 대표적 종교철학자인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와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가 대화를 나눴다. 두번에 걸친 대담은 이번에 첫번째를 싣고, 다음호에 나머지를 선보일 예정이다. 신화의 본질과 역사, 동양에서의 신화논의의 방향 등 주요한 화두들이 제시됐다.[편집자주]
나카자와 신이치 : 현대일본의 대표적 철학자이자 종교학자로 탁월한 인문학 저술가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도쿄대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79년 네팔에서 전승밀교를 연구하고 수행했다. 1982년 일본으로 돌아와 '티베트와 모차르트'를 써서 산토리 학예상을 수상했다. 현재 中央大學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무지개의 논리', '악당적 사고', '숲의 바로크', '불교가 좋다' 등이 있다.
정재서 : 서울대 중문과에서 '신선설화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옌칭 연구소, 국제일본문화연구소 객원교수 역임했고 현재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출판문화상 저작상을 수상한 '不死의 신화와 사상'을 비롯해 '山海經譯註', '동양적인 것의 슬픔', '道敎와 문학 그리고 상상력' 등이 있다.
정재서 :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이메일로나마 만나뵙게 돼 반갑습니다. 이른바 신화의 귀환이 운위될 만큼 오늘날 신화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근대 이후로는 아마 낭만주의 시대의 신화에 대한 열기를 재현한 것과 같은 그러한 현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가령 한국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최근 그리스 로마 신화를 중심으로 한 신화서가 출판시장에서 크게 호황을 누렸고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시리즈'와 같은 판타지 문학이 대중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마 전세계적 현상의 일환이라 할 것 같은데 이제 대중적 열풍을 잠시 뒤로하고 신화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카자와 선생님의 저작 '신화, 인류 最古의 철학'은 시의적절한 책이었습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신화의 의미와 가치를 잘 각인시킨 훌륭한 신화입문서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저자인 나카자와 선생님과 함께 인류 공통의 관심사인 신화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카자와 신이치(이하 나카자와) : 저의 책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 제1권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의 한국어판이 출판돼 다행히 많은 독자의 호응을 얻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우 기뻤습니다. 일본열도의 최초의 국가가 이미 고도로 발달된 상태였던 한반도 문화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탄생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또한 초기의 국가가 편집한 '古事記'나 '일본서기'와 같은 신화집의 소재 대부분이 한반도 사람들 사이에서 전승되던 신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신화집의 편찬과정에도 한반도 출신의 지식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 역시 역사학에 의해 입증된 바 있습니다. 우리 일본인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신화를 통해 한반도 사람들과 깊이 연결돼 있었던 셈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렇게 신화를 화제로 정 선생님 같은 한국의 대표적 학자와 대담하게 돼 감회가 깊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신화를 정치적으로 왜곡시켜 이용하려 했던 이데올로기로 인해, 양국의 국민 사이에 형성돼야 할 우애가 오랜 기간에 걸쳐 깊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순수한 마음으로 신화를 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화를 무조건 부정해온 근대의 사고법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신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해졌습니다. 신화에는 '현대란 무엇인가'라는 의문과도 직결된 매우 중요한 문제가 내포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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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동양신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서양에서 용은 악의 힘으로 여겨지는 반면, 동양에서는 공정하고, 인정 많고 길조를 나타내는 동물로 통한다. © |
정재서 : 작금의 신화 열기(중국의 학계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정말 神話熱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가 과연 어떤 원인에서 생겨났으며 이것이 과거 사조에 대한 반동으로 반짝 일어난 현상인지, 아니면 지속적으로 우리의 삶에 중요한 작용을 미칠 사안인지 한번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일단 저는 신화의 興起가 이른바 문명의 전환기라 할 현 시점에서 인류 의식의 패러다임의 변혁과 긴밀히 상관된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일시적 반동 현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물론 근대 이래의 과학적, 기계적 사고에 대한 반동으로 신화적 감수성이 반사적으로 필요해진 측면도 없지 않으나 그것은 문제를 너무 피상적으로 보는 것이죠. 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신화의 도래가 필연적이었고 앞으로도 불가결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첫째는 앞으로 인류의 의식이 보다 통합적이고 전일적인 사고를 지향할 것이라는 예측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향후 인류를 둘러싼 매체 환경이 신화적 상상력의 활발한 작동에 온상을 제공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입니다. 다시 말해 정신적, 물질적 양 차원에서 신화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호황(?)을 누릴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에서입니다. 신화가 이미 기득권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할 때 차제에 필요한 것은 신화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냉철한 검증과 비판이 아닌가 합니다. 이러한 자세만이 향후 신화의 범람으로부터 불가피하게 빚어질 오용과 남용을 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최근의 신화에 대한 대중적 열기에는 어딘지 냉정한 인식이 결여된 것 같아 아쉽습니다.
나카자와 : 중국의 최근의 출판현황을 보면, '神話考古'라는 제목이 붙은 책이 많이 눈에 띄게 됐습니다. 그리고 쓰촨(四川)성이나 칭하이(靑海)성과 같은 지방의 출판물에서는 도교나 라마교 등에 대한 뜨거운 '종교열기'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저는 문화대혁명 당시의 중국을 여행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변화입니다. 일본에서 그와 유사한 '신화열기'가 일어난 것은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진행중이던 때였습니다. 당시의 진취적인 일본의 대학생들의 머릿속에서는, 비합리적이고 반동적이라며 평가 절하해왔던 신화나 민속문화에 대해 열광적인 관심을 갖는 것과, 근대의 상식에 반항하는(듯이 보였던) 중국의 젊은이들의 정치운동이 하나로 연결돼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겠지요. 당시의 젊은이들은 대규모의 자연파괴를 수반한 일본열도의 도시화와 공업화에 대한 일종의 저항으로서 신화나 민속문화에 대해 열광적인 관심을 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경제의 고도성장과 정치운동의 수많은 좌절에 의해, 이런 '신화열기'는 문화의 표면에서는 냉각되어 점차로 내면화돼 갔습니다. 그런 정열은 정치로부터 멀어져서 '정신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어가고, 표현영역도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같은 서브컬처로 옮겨가게 됐습니다. 그리고 애니메이션 영역에서 되살아난 신화적 사고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여러 뛰어난 작품을 탄생시키면서, 동시에 환상에 사로잡힌 채 개인의 밀실 속에 갇혀 지내는 많은 어린이들을 위험한 정신상태로 몰아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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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공도 © |
그렇기 때문에 정 선생님이 지적하신 바와 같이, 현대의 우리 사회도 신화적 사고를 추구하고자 하는 깊은 충동을 느끼면서, 그런 충동의 발산으로 야기되는 정신적 황폐를 지켜보며 신화가 갖는 의미에 대해 계속 생각해가야 합니다. 과연 현대의 우리들은 신화에 대한 관심을 통해 무엇을 회복하고자 하는 걸까요. 저는 그게 '대칭성의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최근에 한국어로 번역된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의 제2권 '곰에서 왕으로'와 현재 집필 중인 제5권 '형이상학혁명'에서 상세히 논했으므로, 여기서는 요점만을 간단히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신화는 레비-스트로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항대립 논리의 조합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조리한 것과 날 것, 연속적인 것과 비연속적인 것 사이에 발견되는 차이를 이용해서, 이것을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의미가치를 갖는 이항대립으로 만들어, 우주의 의미를 둘러싼 복잡한 사고를 전개하려 한 것이 신화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신화의 사고와 오늘날의 컴퓨터로 대표되는 과학의 사고는 동일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신화에는 과학과는 이질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이항대립의 논리를 사용하면서, 신화는 과학에서는 절대로 거론하지 않는 것을 거론한다는 점입니다. 과학은 이 세계가 비대칭적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인간과 곰 같은 동물을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신화에서는 이런 비대칭적인 상황이 뒤집혀, 곰과 인간의 동질성을 주장합니다. 신화의 시대에는 곰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말을 했으며, 인간도 원하면 동물로 변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신화에서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대칭적인 관계가 성립돼, 그런 대칭성을 근거로 한 논리에 의해 사람들은 현실 세계로부터 보이지 않게 된 진리에 대해 생각하려 했던 셈입니다. 이런 '대칭성의 논리'는 우리 현생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무의식'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우리 마음속에서 활동하게끔 하는 '무의식의 논리'를 의미합니다. 무의식이 억압을 받거나 부분적으로 개조된 부분에 의식이 탄생하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신화열기'를 통해 표면화되고 있는 신화적 사고에 대한 관심의 저변에는, 생명활동에 직결된 무의식의 활동 사이에 막혀 있던 회로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충동이 숨겨져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무의식은 반성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 점이 '신화에 대한 대중적 열기'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의 원천입니다.
정재서 : 다음으로 신화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리스 초기에 뮈토스는 진리에 가까운 이야기였고 로고스는 허구성을 띤 이야기였습니다. 이 관계가 정반대로 역전되는 것은 플라톤 이후입니다. 인문주의의 시대로 진입하면서 신화는 허구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죠. 이후 신화는 寓意說 등에 의해 겨우 존재를 유지해오다가 근대 이후 셸링, 카시러 등에 의해 내재적 가치를 인정받고 레비-스트로스에 이르러 自明性을 획득하게 됩니다. 선생님은 특히 레비-스트로스에 주목해 구조주의의 길을 따라 신화적 논리가 갖는 힘을 잘 설명하셨습니다. 신데렐라 민담을 통해 양극적인 것들을 매개, 결합시키는 신화적 논리의 특성을 웅변한 것은 정말 압권입니다. 신화적 논리가 갖는 통합적인 힘, 그것은 선생님의 말씀대로 세계를 조화롭게 만들고자 하는 원시 인류의 지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화적 사고가 초래할 집단주의, 전체주의의 위험도 간과할 수 없지 않나 합니다. 우리에게는 나치와 一國主義의 광기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한 광기가 신화적 사고의 오용에서 비롯됐음은 이미 많이 지적된 바 있습니다. 저는 신화가 인류의 집단무의식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종족의 서사이기도 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 점은 신화가 보편성을 지니고 있지만 언제라도 편파성으로 치달을 소지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화의 양면성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신화의 본질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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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몸통에 뱀 꼬리를 단 여왜와 복희가 별의 무리 속에 서로 엉켜 있다. 손에 쥔 컴퍼스와 삼각자는 둥근 하늘과 사각형의 땅을 상징한다. © | 나카자와 : 신화의 사고가 무의식의 영역에 직결된 논리과정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그 사고는 '種' 내지는 '계급'은 인식할 수 있어도, '個'를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종은 대립하는 힘들이 서로 싸우는 여러 종류의 多樣體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안으로부터 '개'가 탄생하게 되는데, '종의 논리'(이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것은 니시다 기타로와 동시대인이었던 다나베 하지메라는 교토대의 철학자였습니다)인 무의식의 사고로는 '개'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신화가 근대정치에 이용됐을 때 발생하게 될 엄청난 참화가 예상됐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파시즘과 파시즘의 현실화에 대성공을 거둔 독일의 나치즘에 의해 역사적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개'를 인식하지 않는 무의식적인 '종'의 사고의 횡포로 인해 비참한 상황이 초래됐습니다. 이처럼 신화적 사고에는 인류의 희망인 '대칭성의 논리'와 표리관계에 있으면서, 엄청난 참화를 초래할 가능성이라는 마이너스적인 측면이 잠재돼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런 양면성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채로 21세기의 신화연구를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본래 희망은 위험과 이웃하고 있게 마련입니다. 하이데거가 말한 바와 같이,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신화는 양날의 칼입니다. 함부로 다루면 인류는 또다시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지도 모릅니다.
정재서 : 앞에서 신화가 갖는 국한성에 대해 말했는데 이와 관련해 저는 신화 담론 곧 신화학의 국한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싶습니다. 세계 각국에 있는 개별 신화의 가치는 평등하다 하겠으나 사실 신화학의 세계는 평등하지가 않습니다. 근대 이후의 신화학은 인도 유러피언 민족의 기원을 탐색하고 문화적 우월성을 보증하기 위한 의도와 긴밀히 상관돼왔습니다. 신화의 개념, 분류 등 신화일반론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표준으로 결정됐으며 이 잣대는 세계 모든 지역의 신화에 일률적으로 적용돼왔습니다. 그런데 사실 다른 지역의 신화에 비해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일찍부터 원시성을 상실하고 훨씬 인문화되고 문학화 돼 있습니다. 문제는 특정한 지역의 신화에서 도출된 코드로 타문화를 해석할 때 생겨납니다. 가령 오이디푸스 유형은 인도 유러피언 민족 이외의 종족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지역적 국한성을 지닌 신화입니다. 그러나 이 신화에서 도출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코드로 우리는 모든 문화를 다 읽어낼 수 있는 것으로 상상해왔습니다. 마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도 같은 이러한 일방적인 잣대에 의해 비서구 문화의 특성은 捨象될 수밖에 없습니다. 근대 초기에 중국은 서구 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신화부재론'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중국에는 서구처럼 서사체계가 완전하고 창조적 의미가 풍부한 신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편견이었는데 사실 오늘날의 중국신화학에서도 서구 신화학의 정의나 분류법이 과연 중국에 들어맞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상술한 이러한 문제들을 신화학자 혹은 문화연구가로서 선생님은 어떻게 다루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나카자와 : 그것은 아시아인으로서 신화를 연구하는 연구자 모두가 느끼는 어려움에 대한 것입니다. 오이디푸스 신화를 예로 들어 이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레비-스트로스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대지로부터 탄생한 존재인 인류가 안고 있는 최대의 모순"에 대한 하나의 해답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해왔습니다. 다리를 끌며 걷는 오이디푸스 일족은 대지에서 탄생한 인류에 대한 기억을 계속 간직해 왔습니다. 게다가 모든 인류가 동일한 '대지의 어머니'로부터 탄생한 존재라면, 모든 여자는 자신의 어머니며, 모든 남자는 여자들의 아들이 되는 셈이죠(이것이 앞에서 서술한 '대칭성의 논리'의 超논리적인 귀결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결혼, 모든 성의 결합은 '근친상간'이 되는 셈입니다. 현생인류가 구석기를 사용한 시대부터 이미 이런 식의 사고를 한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모성을 지닌 '대지'에 대한 사고가 존재하는 한, 인류는 大地性으로부터의 완전한 이탈의 불가능과, 근친상간으로서의 결혼의 모순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인의 오이디푸스 신화는 이런 모순에 대한 일종의 재치 있는 신화적 해결인 셈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한 여러 해결책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일본에서 전승돼 온 '道祖神'의 기원설화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도조신은 도로에 서 있는 신인데, 그 신에 대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형과 여동생이 있었는데, 둘 다 결혼상대를 찾아 멀리 길을 떠났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둘은 다시 만나는데, 서로 오누이 사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채 관계를 갖게 됩니다. 무척 기뻐하며 둘은 서로의 고향으로 향하게 되는데, 고향이 서로 같고 헤어진 오누이라는 걸 알게 되자 절망해서 자살하고 맙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마을사람이 세운 것이 지금 '도조신'이라고 불리는 도로의 신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오이디푸스 신화를 "대지로부터 탄생한 존재인 인류가 안고 있는 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신화로서 이해한다면, 이 '도조신 신화'는 오이디푸스 신화의 변형으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방향으로 신화연구를 해나갈 수 있다면, 우리는 근대에 분에 넘치는 권세를 부려온 서구형 신화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낼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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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으로 물결 무늬를 상감한 이 청동 괴물은, 악을 압도하는 것으로 믿어지던 중국신화 속의 날개달린 고양이과 동물이다. © | 정재서 : 저의 일본문화에 대한 소감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일본은 신화가 살아있는 나라다"라는 말입니다. 지난 일년간 일본에 가있으면서 줄곧 느낀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아울러 일본이 전통적인 상상력과 이미지의 유산을 바탕으로 오늘날 애니메이션, 영화 등 문화산업을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이룩한 것은 진정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문화산업에서의 신화 수용을 환각제에 비유하면서 진정한 신화의 힘과는 거리가 먼 유사 신화적 행위로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신화적 상상력의 무대가 되고 있는 사이버 공간은 가상현실의 공간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펼쳐지는 신화적 상상력도 유사 신화로서의 작용밖에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상현실은 향후 싫든 좋든 우리의 삶의 중요한 토대가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현실 위에서 진정한 신화의 힘을 체득하는 방안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 가상현실 속에서의 재신화화(Remythologization)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그 방안을 듣고 싶습니다.
나카자와 : 지적하신 부분은 현대문화의 본질에 관한 중요한 문제입니다. 앞에서 제시했던 제 개념을 사용한다면, 경제원리에 심각한 영향을 받고 있는 현대의 문화는 '비대칭성의 논리'에 의해 구석구석까지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신화적 사고나, 혹은 그와 동일한 장소로부터 발생하는 경제원리와는 이질적인 '증여의 논리' 등은 전부 '대칭성의 논리'로부터 탄생합니다. 오늘날 '가상현실'로 불리는 감각과 사고의 영역은 원래 이 '대칭성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는 무의식의 영역에 발생하는 것이므로, 그곳이 신화적 사고의 활동에 적합한 무대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거기에 지금은 '비대칭성'을 원리로 하는 경제원리가 작용함으로써, 오늘날 거대한 애니메이션과 게임산업이 형성된 것이야말로 위험한 일입니다. 레비-스트로스가 '문자를 갖지 않은 사회'라고 하고, 제가 '국가를 갖지 않은 사회'라고 했던 사회에서는 현실과 신화, '비대칭성의 논리'와 '대칭성의 논리' 사이에 언제나 타협이나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신중한 배려를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균형이 생명과 사고와의 모순 사이에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윤추구를 제1원리로 삼는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새로운 개척자로서 무의식의 영역을 발견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선발대로서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산업이 발달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윤추구형 자본주의는 신화를 이야기하던 사회처럼, 균형이나 공생을 배려하지 않은 채 무의식 영역의 개발(착취)을 촉진시켜 가겠지요. 신화학자는 그 점에 대해 경고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기술이 실현시켜가고 있는 '가상현실'을 통해서, 아마도 인류는 신화가 이미 알고 있던 무의식 영역과의 감동적인 재회를 해가게 되겠지요. 그것을 건전한 형태로 실현시키기 위해서도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자본주의는 근본적인 원리부터 다시 만들어가야 합니다. 저는 제 자신이 하고 있는 연구의 의미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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