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를 공부할수록 동시에 두 가지의 상반되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 하나는, 국가가 한 나라의 주민들에게 일체의 대안적 의식들을 어릴 때부터 마비시키는 근대만큼 대중들의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심한 시대는 역사상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제국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19세기 말~20세기 초의 경우 '자유로의 도피'는 대개 군사주의적 광기의 형태를 띠었다. 100년 전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나 영국의 주류 사회주의자들은 1848년 혁명의 시절부터 급진적 수사를 이어받고 5월 1일의 노동절이면 '제국주의 타도'를 외쳐댔지만,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국주의의 깃발 밑에서 서로를 죽이려고 광적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것이 살인적 열광보다는 '나만 배부르면 된다'는 식의 냉소주의적 형태를 띤다. 세계 인구의 15% 정도밖에 안 되는 미국, 서유럽, 일본이 세계 자원의 약 85%를 독식한다는 사실 등이 이미 노르웨이 중고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면 자원 약탈을 바탕으로 삼는 세계 체제를 바꾸려는 노르웨이 젊은이들이 다수일까? 천만에. 우리가 약탈자라 해도 우리의 소비 수준에는 손을 대면 절대로 안 된다는 집착은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대다수 서방인들의 집단 의식이다. 세계를 바꾸기 위해 몸 바칠 자유와 나의 도덕적 이상을 실천할 자유로부터 집단 도피하고 있는 것이다. 약탈 국가의 '국민'으로서의 집단적 여유와 소속감에 안주하는 것이 개인의 이상을 추구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집단주의가 극성을 부리는 근대인데도 '다름'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급진적 운동이 주목을 끈다. 개인마다 자기 나름의 우주를 이루는 만큼 한 개인은 천편일률적인 '국민'이나 체제의 부속물이 아니라 약탈적 체제와 거리를 둘 수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해방의 의미를 지닌다. 저항의 정신을 살려 후손들에게 인간이 홀로 서는 도리를 가르쳐준 사람들 중에서 우리는 한용운, 나혜석, 체 게바라, 프란츠 파농 등을 익히 안다. 역사를 제도권 위주로만 배운 우리에게는 그들의 이름이 낯설다.
박노자, <하얀 가면의 제국> (한겨레신문사,2003) p.113-114
노예정신의 동양과 대조를 이루는 '자유정신의 서양'이라는 담론의 구조는 비서구 지역 지식인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 체화한 서구 지배층의 자만에 찬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뜨끔!) '자유'란 무엇인가? 실존주의적 시각에서 본 존재론적 의미의 자유는 '나의 모든 것에 대한 나의 선택권'을 뜻한다. 그러나 대다수 서구인들은 그들이 생활방식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 제도권 교육을 받고 취직하고 생산, 소비의 순환에 빨려드는 자본주의적 생활방식 이외에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그들이 무슨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는 지구자원을 고갈시키고 인류를 집단 자살로 이끌고 있는 오늘의 소비주의 사회가 역사의 목적이자 지상낙원으로 보일 뿐이다. 현실을 절대시하는 인식론적 차원에서는 서구, 소비중심주의적 서구인과 북한 사회를 '조선 역사의 당연한 목적'으로 보는 북한의 '순진한 시민'은 어쩌면 무척 비슷하다. 오히려 자신을 모르고 북한사람들을 '자유없는 불쌍한 노예'로 보는 서구인이 당하는 세뇌가 한층 더 교묘하고 철저하다.
[...]
사회주의 계통의 국회의원들마저 전쟁 히스테리에 휩쓸려 전쟁을 지지한 1914년 7월의 유럽보다 오늘의 유럽은 전체를 위한 희생을 덜 강요한다. 그러나 "남을 속박하는 자는 자유인이 될 수 없다."는 명언대로 제3세계에 대한 서구의 착취가 중단되지 않는 한, 서구인들의 '자유'를 논하기는 힘들다. 유럽의 진보적 투쟁의 역사를 유심히 연구할 필요는 있지만, '옥시덴트'를 이상적인 지향점으로 설정해 서구 지배층이 만든 함정에 빠질 필요는 없다. 서구 중심의 세계는 우리가 지나가게 된 하나의 단계일 뿐 인류 역사의 종점도 목적도 아니다. '이상적인 서양'이라는 그림을 말끔히 지워버릴 때 비로소 진정한 세계 평등의 길로 향할 수 있을 것이다.
Ibid., p.299-301